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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zi Apr 27. 2024

安子,Who are you?

5부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연변대를 찾은 손님들, 상해유랑기

10화.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대학교 2학년 때 일이다. 고등학교 불알친구가 갑자기 연변대학교로 나를 찾아왔다. 이 친구는 1년 재수를 했지만 대학입시에서 또 떨어졌고, 그 후 산동 웨이하이시에서 공무원으로 있는 사촌 매형의 도움으로 어느 로컬 기업에서 한국어 통역을 하고 있었다. 핸드폰도 없고 BP기도 없던 시절이라 사전 연락을 주고받고 만나기가 어려웠다. 그날도 학교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다가 기숙사로 돌아와 보니, 그 친구가 내 침대에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키가 훤칠하게 잘 생긴 친구는 캐주얼 자켓에 청바지 차림에 하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영락없는 한국대학생 스타일이었다.

    "뭐야 너? 어떻게 왔어?" 내가 깜짝 놀라서 묻자, 

    "동생 놈이 공부 잘하고 있는지 형이 감시하러 왔지 뭐."라고 하면서 능글능글 웃었다. 

    우리는 서로 자기가 형이라고 우겼다. 생일은 그 놈이 몇 달 더 빨랐다. 

    "한국사람이랑 같이 왔어. 김사장이라고 무역하는 사람이야. 지금 백산호텔에 있어." 

    백산호텔은 3성급 호텔인데 그 무렵 연길에서 제일 좋은 호텔이었다. 숙박비가 비싸서 웬만한 사람들은 묵을 엄두도 못 내는 호텔이다. 

    "빨리 씻고 와. 밥이나 같이 먹자." 친구 놈이 재촉했다. 


    우리는 택시를 잡아타고 백산호텔로 갔다. 택시로 우리 학교에서 불과 5분도 안 되는 거리지만, 그때 우리는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녔다. 택시비가 5위안이었는데(그 무렵 암시장 환율시세로 한화 500원이다.) 그때 고향마을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계신 어머니 한달 월급이 130위안 정도 었으니, 5위안은 결코 작은 돈이라 할 수 없었다. 버스비가 10전 20전, 학교 구내식당 점심 값이 1위안, 비싸야 2위안 정도 할 때었다. 

    백산호텔에 도착한 친구는 당연하다는 듯이 지갑을 꺼내 택시비를 지불했다. 지갑에는 100위안짜리 푸르스레한 지폐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나는 순간 친구가 엄청 멋있어 보었다.

    친구가 호텔 로비 소파에 잠깐 앉아 있어라고 하더니, 카운터로 가서 어딘가로 전화 한 통을 걸었다. 잠시 후, 머리가 희끗희끗한 50대 중반의 신사가 손에 비닐봉지 하나 들고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흰색 체크무늬 재킷과 청바지 차림에 아랫배가 조금 나와 있는 풍채 좋은 중년 남자였다. 

    친구가 나를 그분한테 소개했다. 

    "사장님, 이 친구가 제가 얘기했던 고등학교 친구입니다. 저랑 젤 친한 친구입니다." 그러고는 나를 향해 

"인사드려라. 이분은 한국에서 오신 김사장님이시다."라고 했다. 

    "안녕하십니까? 안동훈라고 합니다." 

    "김창렬이라고 합니다. 택수한테서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연길 오면 안동훈씨를꼭 보고 가야 한다네요. 허허..." 김사장이 악수를 청하며 사람 좋게 웃었다. 

    나는 한국사람을 처음 보는지라 호기심도 나고 조금 어색하기도 했다. 

    김사장이 손에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나한테 내밀었다. 

    "이건 한국 넥타이인데요, 맘에 들겠는지 모르겠네요." 

    비닐봉지에는 길쭉한 종이박스에 넣은 고급스러운 넥타이와 수성펜 한 박스가 들어 있었다. 나는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그날, 우리는 백산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그렇게 맛있는 요리는 처음이었다. 사실 난 호텔식당에서 식사를 해본 적이 없었다. 김사장은 백두산에 가보려고 왔다고 했다. 

    저녁식사가 끝난 후, 김사장은 둘이서 회포를 풀라고 하며 자리를 피했다. 나는 친구를 데리고 호텔 근처의 생맥주집으로 갔다. 연길맥주공장에서 생산하는 "빙천" 생맥주를 판매하는 호프집이다. 생맥주에 북한산 마른 명태를 북북 찢어서, 라면 수프와 식초를 섞어 만든 양념에 찍어서 먹는데 맥주안주로 제법이다.

    "공부는 할만해?" 친구가 물었다.

    "재미없어, 하나도." 

    "그럼 공부 그만하고 나한테로 와. 웨이하이시라고 한국사람들이 많이 들어와." 친구가 농담을 진담처럼 던졌다. 

    "한국사람들이랑 뭐 하는데 넌?" 난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물었다. 진짜 궁금했다. 

    "한국사람들은 무역을 해. 오다를 갖고 와서 중국공장에서 만들어서 수출해." 

    "뭘 만드는데?" 

    "별거 다 해. 김사장은 조화를 만들어." 친구가 명태 쪼가리를 양념에 찍으며 말했다. 

    "조화? 그게 뭔데?" 처음 듣는 단어다. 

    "인조꽃이야. 천으로 만들어." 

    천으로 만든 인조꽃이라,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았지만 어떤 모양인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런 건 어디에 쓰는데?" 

    "주로 화환으로 많이 써. 장례식장 같은 데서." 

    "넌 통역한다며? 중국말 잘 못하잖아?" 내가 알기론 그 친구도 한어를 잘 하진 못했었다. 

    "지금은 꽤 잘해. 하다 보면 늘어. 중국여자도 꼬실 수 있어. 거짓말 아냐." 친구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건 진짜였고, 친구는 지금 웨이하이에서 알아주는 바람둥이가 되어 있다. 

    "월급은 얼마나 받는데? 아까 보니 돈 많더라." 나는 내심 부러웠다. 그때 내 한 달 생활비가 100위안 정도였다. 

    "용돈 좀 줄까? 나 돈 많아." 친구가 지갑을 꺼내서 빳빳한 지폐 몇 장을 꺼내 내게 건넸다. 

    난 얼른 잡아챘다. 세어보니 6장, 600위안이었다. 그때 일반 직장인 4, 5 개월 월급이다. 

    "진짜 나 주는 거야?" 아무리 불알친구라 하지만 돈은 민감한 물건이다. 

    "그래, 형이 용돈 주는거야 공부 잘하라고." 친구 놈이 의기양양해했다. 

    "그래. 고맙습니다. 형님~" 형이 아니라 삼촌이라도 불러 줄 수 있다. 그때 나는 공부는 뒷전으로 하고 친한 친구들과 술자리를 자주 가졌기에, 이미 여러 생맥주집에 외상이 많이 걸려 있었다.

    그날, 우리는 고등학교 친구들의 소식이나 고등학교 때 사귀었던 여자친구 소식들을 묻고 전하며 새벽까지 마셨다. 내가 혹시 옥희 소식 있냐고 물었더니 하얼빈에서 미용기술 배우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친구가 다음 날 아침 일찍 김사장 모시고 백두산에 가야 해서 우리는 아쉬운 대로 일어났다. 용돈도 받았겠다, 내가 계산하려 하자 친구가 내 손을 탁 치고는 빳빳한 지폐 한 장을 꺼내 술값을 치렀다. 그리고 그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난 멋진 친구를 둔 것 같다. 


    다음 날, 기숙사에서 김사장이 준 선물들을 꺼내 보았다. 고급스러운 케이스에 담긴 넥타이는 실크 원단에 그린 컬러와 골드 컬러가 뒤섞인 디자인이었고 뒷면에는 DAKS라는 로고가 찍혀 있었다. 암튼, 내가 그전에는 본 적 없는 고급 넥타이었고 이 넥타이는 대학교 졸업 후에도 아껴가며 착용했던 최애의 넥타이었다. 수성펜 역시 처음 보는, 고급스럽게 만든 펜이었고 여러 가지 색상으로 10개나 들어 있었다. 난 그걸 우리 반 여학생들에게 모두 나눠줬다. 그녀들도 신기해 하긴 마찬가지 었다. 

    이튿날 저녁, 친구가 또 기숙사로 나를 데리러 왔다. 백두산 관광을 마쳤고 내일 오전 기차로 북경으로 간다고 했다. 그날 저녁, 호텔 근처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김사장이랑 셋이서 식사를 마치고 나서 헤어질 때, 김사장이 나한테 책 한 권을 내밀었다. 

    "내가 다 읽은 책인데 괜찮다면 미스터 안한테 주고 갈게요." 

    나는 고맙다고 말하면서 그 책을 받았다. 하얀 표지에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고 쓰여 있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고 존경하는 김우중 회장님의 자서전인데요, 읽어 보면 세상을 보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 김사장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나는 잘 읽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고 그들과 헤어졌고 그 후 나는 김사장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책 한 권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게 될 줄은. 앞서도 얘기했다시피, 난 좋아하는 책을 수 십 번을 반복해서 읽는 습관이 있다. 소설도 아닌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가 대학생활 내내 나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심지어 그때 난 김우중이 누군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분이 자그마한 무역회사로 시작해서, 조선, 자동차 등 거대한 사업까지 하나하나 일궈내는 파란만장 인생스토리는, 중국이라는 아직도 상당히 폐쇄된 환경에서 별 볼 일 없는 지방대를 다니며 친구들과 시답지 않은 술자리나 벌리면서 흥청망청 시간이나 낭비하고 있던 시골뜨기 대학생인 나한테 커다란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그 책에서 나는 중국과는 너무도 다른 신기하고 황홀한 세상을 보았고 인간이 어떻게 아이디어 하나로 거대한 세상을 만들어 내는지를 보았다. 그리고, 내 두뇌는 걷잡을 수 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나는 김우중 회장을 내 인생의 롤모델로 삼고 그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내 인생을 그려보기 시작했다. 







11화.  1992년 가을, 연변대를 찾은 손님들 


    1992년 9월, 나는 대학교 4학년 즉 졸업반 학생이 되었다. 88학번 친구들은 이미 7월 초에 모두 졸업해서 뿔뿔이 흩어졌고, 일부는 석사공부를 하느라 대학에 남았다. 그중에는 훗날 연변대학교 조선어-한국어대학 학장과 부학장이 된 친구들도 있었다.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것도 이번 학기가 마지막이었고 1993년 상반기 학기는 모두 취직준비로 분주할 때여서 수업이 거의 없다. 친하게 진했던 88학번 동창들이 떠난 기숙사 빈자리는 한국어 공부를 위해 연변대에 단기 연수로 파견된 중국무장경찰부대 텐진공항분대 군인들로 채워졌다. 모두 한족 군인들이었다.

    나랑 함께 88학번이었다가 학점이 부족해서 89학번으로 내려앉은 친구가 그들을 굉장히 싫어해서 툭 하면 시비를 걸었다. 학교에서는 그 군인들이 한국어를 더 잘 배울 수 있도록 일부러 조선족 학생들과 합숙하도록 배려한 것인데, 서툰 한어 때문에 소통도 잘 되지 않은 데다가 그 군인들이 우리를 좀 무시하는 듯한 "불손"한 태도도 한몫 했다. 암튼, 그 친구는 가을 학기 내내 군인들과 트러블을 일으켰고 술이 취해 들어온 날은 더 심했다. 나는 혹시라도 싸움으로 번질까 봐 조마조마했고 그때마다 서투른 한어로 군인들을 설득해서 자리를 잠시 피하도록 했다. 다행히 주먹다짐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주먹다짐이 있었다면, 그 친구는 아마 무사히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 하면, 중국은 그때도 지금도 군인을 우대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훗날, 나는 텐진국제공항에서 우연히 우리 숙소에 같이 살았던 군인 중 하나를 만났다. 그 친구는 이미 병장에서 중위로 승진해 있었는데 내가 반가움 마음에 다가가서 아는 척했더니 그 친구도 대뜸 나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웃음기가 하나도 없는 쌀쌀한 표정으로 그냥 "니 하오." 한마디 던지고는 다른 군인과 함께 유유히 사라졌다. 


    9월 하순 어느 일요일,  89학번 짝꿍들이 더러는 전날 고향마을로 돌아갔고, 숙소에 남아 있던 친구도 여자친구랑 데이트를 하러 나가서 나 혼자만 숙소에 남았다.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나는 모처럼 일요일 오전에 교실로 나가서 공부를 했다. 여러 번의 땡땡이로 어떤 과목은 수업을 몇 번이나 빼먹어서 강의내용을 전혀 몰랐다. 마침 교실에는 공부를 진짜 열심히 하는 여학생 몇 명이 나와 있었고 나는 그들 중 한 명에게서 필기책을 빌려서 주요 내용만 부지런히 베껴 썼다. 남학생은 나뿐이었다. 나는 정장차림에 김사장이 선물로 준 DAKS 넥타이를 하고 있었다. 평소에 나랑 곧잘 농담을 하던 여학생이 그날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오늘은 웬일로 넥타이까지 매고 학교로 나왔지? 해가 서쪽에서 떴나?" 하며 농을 걸었다. 나는 그냥 피식 웃고 넘겼다.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때 남학생들은 자주 정장차림으로 수업 들으러 다녔다. 패션이란 걸 잘 몰랐거니와 사실 그 시절엔 정장 말고 편히 입을 만한 캐주얼 복장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남학생들은 다들 정장 차림 아니면 운동복 차림이었다. 한마디로 촌스러웠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강의내용을 열심히 베끼고 있는데, 갑자기 복도에서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학과장님 목소리도 들렸다. 잠시 후, 교실문이 벌컥 열리더니 학과장님이 한 무리 학생들을 데리고 들어 왔다. 

    "여긴 4학년 교실입니다. 졸업반인데 오늘 공부하러 나온 학생도 몇 명 있네요." 학과장님은 우리 기분 따위는 아무래도 괜찮은 모양이다. 

    그 한 무리 학생들은 우리를 한동안 바라보더니 아무 말도 없이 학과장님을 따라 교실을 나갔다. 그런데 그들 옷차림이 좀 이상했다. 다들 셔츠(남방)나 아웃도어(그때는 아웃도어가 뭔지도 몰랐다)에 청바지 그리고 운동화 차림이었다. 어떤 학생들은 손에 카메라도 들고 있었다. 남조선 대학생들 데모 뉴스 화면에서 자주 보던 옷차림이었고 또 김사장이라는 한국사람을 만나 본 적이 있었던 나는 직감적으로 그들이 한국대학생들이란 걸 알았다. 

    1992년 여름방학이 거의 끝나 갈 무렵(정확히는 8월 24일이다), 40년간 적대국가로 지내던 한국과 중국이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맺었다. 그때 한국은 어떤 분위기 었는지 모르겠지만, 연변대학교 학생들은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았다. 한-중 수교 주제를 가지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고, 나처럼 대학 졸업 후 국가에서 주는 직장을 마다하고 한국무역회사에 취직할 꿈을 가진 학생들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수교 전에는 사업하는 사람들이나 친척방문을 오는 사람들, 개인 여행을 오는 사람들이 주로 중국을 다녀갔지만, 수교 직후에는 단체관광객들이 홍수처럼 중국으로 밀고 들어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교실을 견학했던 그 한국학생들도 아마 초기의 단체관광객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때 그 광경을 떠올리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일요일에 정장을 빼입고 DAKS 넥타이 차림에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는 나를 보고, 그 한국학생들은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하고. 한국대학교는 일요일이 아니라 평일에도 정장차림으로 수업 듣는 학생들이 없었을 테니 그 "괴이"한 모습에 놀라지는 않았을까 걱정된다. 혹시라도 그때 그 장면을 사진 찍은 학생이 있다면 "나한테 연락 좀 부탁드립니다. 사진도 한 장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그 시절 사진이 별로 없었다. 카메라는 귀한 물건이었다. 


    11월 초순, 그날도 일요일이었고, 그날도 외톨이가 된 나는 교실로 나가 곧 있을 고대한어 중간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평소에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느라고 공부를 별로 하지 않는다. 시험시즌에만 벼락치기를 한다. 눈이 피로해서 2층 교실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을라니, 멀리서부터 한 무리 사람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분위기로 봐서는 지체 높은 분이 우리 학교를 시찰 나온 것 같았다. 가까이 왔을 때 보니,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은 얼굴이 보었다. 검은 뿔테 안경에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 있었고, 그분 옆에서 연변대 총장선생님이 공손한 몸짓으로 뭐라고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순간 그 사람이 누군지 기억났다. 바로 장쩌민 국가주석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교실에 있던 애들한테 소리쳤다. " 장쩌민이 왔어! 장쩌민이 왔어!" 

    애들은 처음에는 내가 농담하는 줄 알고 그저 웃기만 하다가, 내가 진지하게 창밖을 가리키며 빨리 와 보라고 하자, 하나둘 씩 다가와서 보더니 "진짜네!" 하면서 서로 질세라 교실을 뛰쳐나갔다. 창밖 도로에도 언제 소문을 듣고 왔는지, 숱한 학생들이 모여들어 "총서기님 안녕하세요!" 하며 소리쳤다.

    장쩌민주석도 손을 들어 인사했다. "연변대 학생 여러분, 안녕하세요." 

    어떤 여학생들은 격동된 나머지 발을 동동 굴렀다. 나는 여전히 2층 교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장쩌민주석은 생각보다 키가 크지 않았다. 

    장쩌민주석이 왜 시골 지방대를 시찰 나왔는지 그때는 몰랐다. 그때 연변조선족 자치주 당서기장은 장더쟝(张德江, 한족)이었고, 주장(州长)은 전철수(조선족) 었다. 장더쟝은 연변대와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했고, 연변대에서 한동안 부총장을 지내다 정계에 입문했다. 그러다가 길림성 부서기장 겸 연변자치주 당서기장을 거쳐, 장쩌민주석이 연변대를 다녀간 후 3년 뒤, 길림성 당서기장 겸 인민대표대회 주임(한국의 도의회 의장격)으로 승진했고, 그리고 몇 년 후 중국의 부자 동네인 저장성 당서기장, 그리고 또 몇 년 후 중국경제 1번지인 광둥성(2022년 GDP 한국 추월) 당서기장으로 고속 승진하였다. 동북 3성 출신이 남방 주요 경제대성(大省)의 1인자를 두 번이나 한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 모든 것은 최종적으로 장쩌민의 심복이었던 장더쟝을 중앙정치무대로 진출시키기 위한 밑밥(수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장더쟝은 더욱더 고속승진하여 시진핑 1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7명 중 하나), 국무원 부총리, 중국인민대표대회 주임(한국의 국회의장 격) 등 직을 역임했다. 연변대학교에서 배출한 최고의 인물인 셈이다. 

    장더쟝이 길림성 당서기장, 저장성 당서기장, 광둥성 당서기장(중앙정치국 위원),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등 노른자위 자리로 고속 승진하는 동안, 장더쟝과 함께 연변자치주를 관리했던 전철수주장은 정년퇴직할 때까지 길림성 부성장직에 머물렀다.







12화.  상하이 유랑기 


    국가의 "계획"에 따르면, 나는 연변대를 졸업하면 고향으로 돌아가 공무원이나 고등학교 조선어문 선생님을 하게 되어 있었다. 대학교 4학년이 되자, 든든한 뒷배가 있는 친구들은 여러 인맥을 총동원하여 성정부 기관이니, 시청이니, 방송국이니, 교육국이니 등 "함금량"이 높은 직장을 찾기 시작했지만, 무려 김우중 회장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수 십 번이나 읽은 내 눈에는 그들의 몸부림이 그냥 하찮고 우습게 보였다. 그들은 그들의 부모가 걸어온 인생을 다시 반복하려 하고 있었고, 그들만의 리그에서 새로운 인생을 그리고 있었다. 

    공부는 별로 하지 않았지만, 머리가 좋았는지 내 성적은 나름 괜찮아서, 졸업학년이 되자 학교로부터 여러 직장들을 추천받았다. 그중에는 흑룡강성인민방송국 기자직도 있었지만 나는 면접이라도 보라는 제안을 거절했다. 그때 나는 이미 소주시에 만들고 있는 한국봉제공장 취직이 예정되어 있었다. 소가죽 가방이나 백을 만들어 미국에 수출하는 회사였다. 그리고 월급도 무려 1,000위안이나 주겠다고 했다. 내 어머니의 거의 8개월치 월급이다. 시청이니, 방송국이니 취직해도 월급은 고작 130위안밖에 안되는데, 내가 동경하는 한국기업에 취직해서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는 데다가, 무엇보다 나는 내가 존경하는 롤모델 김우중 회장처럼 그런 인생을 살고 싶었다. 


    1993년 7월 2일, 졸업장을 받아 든 나는 다른 짝꿍 두 명과 함께 89학번 동창생들의 배웅을 받으며 연길에서 기차를 타고 길림성 성도인 장춘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장춘공항 근처 싸구려 호텔에서 하루 밤을 묵고서, 다음날 오전 비행기로 상해로 날아갔다. 2시 반이나 걸렸지만, 처음 타보는 비행기도 그렇고, 이제 곧 내가 동경하는 새 삶이 시작된다는 부푼 마음에 한껏 흥분된 상태였다. 두 명의 짝꿍은 나보다도 한어가 서툴었는데 그들이 왜 국가에서 주는 직장을 마다하고 나랑 함께 멀리 소주에 있는 한국기업에 취직하려 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아마도 높은 월급에 끌려서?

    상해홍교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공항 공중전화박스를 찾아 서둘러 소주 한국기업에 전화를 걸었다. 4월에 연변대로 통역직원 모집하러 온 한국기업의 담당자로부터 받은 연락처가 있었다. 담당자는 여성분이었고, 김 차장이라고 했다. 그때 우리는 그 기업과 근로계약서도 체결했었다. 

    "김 차장님 안녕하세요. 저는 안동훈입니다." 

    "아~ 안동훈 씨,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대학교는 졸업하셨죠?" 김 차장이 반가워하며 물었다. 

    "네. 어제 졸업했고요. 저희 3명 지금 상해공항에 막 도착했습니다." 

    "네? 지금 상해라고요? 아니 왜 벌써 오셨나요?" 김 차장이 황당해했다. 

    "아니, 출발 전에 전화를 주셨어야죠. 지금은요, 소주공장 한창 짓고 있고요, 9월이나 10월에나 가동됩니다. 이렇게 사전연락도 없이 무작정 찾아오시면 어떻게 해요? 지금 소주공장엔 숙소도 없고 아무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방금까지도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하던 김 차장이 얼굴을 갈아끼고 한바탕 잔소리했다. 

    순간 나 역시 패닉에 빠졌다. 한껏 부푼 마음으로 하루도 지체할세라 동북에서 날아왔는데, 이게 무슨 소리람? 

    "저희는 졸업하면 바로 출근하라고 해서..." 나도 어이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래도 그렇죠. 사전에 전화라도 해주셔야죠. 이렇게 불쑥 찾아오면 저희도 황당하잖아요?" 김 차장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럼 어떡하죠? 다시 돌아가야 하나요 우리?"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글쎄요. 돌아가든, 상해에서 관광 하든 그건 학생들이 알아서 하시면 되고요. 암튼 소주공장은 9월이나 10월 돼야 오픈합니다. 그때도 계속 여기 오고 싶다면 그때 오시면 돼요." 김 차장이 대화를 빨리 마무리 짓고 싶어 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9월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우리는 망연자실해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탓이 컸다. 물론 김 차장이 졸업하면 바로 출근하라고 했던 것도 오해 소지가 되겠지만, 적어도 출발 전에 전화라도 한통 했으면 이런 난감한 사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중국은 사전에 연락하고 만나거나 하는 문화자체가 없었다. 친구든 친척이든 불쑥불쑥 찾아와서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게 문화라면 "문화" 었다. 중요한 건, 통신여건이 낙후하다 보니 전화기가 있는 일반 가정집은 몇몇 안되었고 학교나 기관 같은 곳에는 전화기는 있지만 사람 찾아주는 게 귀찮아서 다들 꺼려했다. 여전히 편지가 주요 통신수단이었고 급할 땐 전보(电报)를 이용하기도 했는데 몇 글자 안되지만 비용이 꽤 비싸서 급한 용무 외에는 잘 사용하지 않았다.  1993년의 중국 실태였다. 


    의논 끝에 한 명은 기차로 연길에 다시 돌아가기로 했고 나와 다른 짝꿍 한 명은 상해에 남기로 했다. 마침 88학번 동창생 하나가 상해 어느 단과대학에서 한국어 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혹시라도 상해에서 더 좋은 일자리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연길로 돌아 간 친구는 인맥을 동원해서 연길시 어느 초등학교 교사로 바로 취직했다. 술을 엄청 좋아하는 친구인데 술 때문에 인생 망쳤다. 몇 년 뒤 술에 취해 출근한 그는 자기가 가르치는 여학생을 성추행했다가 교사직에서 잘렸다. 인맥을 어떻게 동원했는지 감옥은 가지 않았지만 그 후 매일 술에 절어서 살다가 알코올중독으로 사망했다. 어린 딸아이와 아내를 남겨두고...


    상해에 남은 나와 다른 짝꿍은 88학번 동창생을 찾아갔다. 그 친구도 상해에 정착한 지 1년도 채 안되는지라, 학교에서 제공하는 2인실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었다. 우리 사정을 얘기했더니, 선뜻 자기 기숙사를 내주었다. 자기는 다른 캠퍼스에 있는 기숙사에서 지내면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고향에서 부모님이 부쳐주신 된장이며, 김치며 마음대로 꺼내 먹어라고 했다. 다만, 된장찌개는 자주 끓이지 말라고 했다. 다른 숙소 사람들이 항의를 한다고. 상해 사람들은 악취 나는 취두부는 즐겨 먹으면서도 조선족들이 즐겨 먹는 된장찌개 냄새는 그토록 싫어한다고 했다. 


    암튼 우리는 당분간 그 친구한테 빌붙어 살면서 상해에서 취직자리를 알아보기로 했다. 그 무렵 상해에는 한국기업들이 꽤 많이 진출해 있었고, 찾아보면 통역자리 정도는 있을 것 같았다. 

    상해한인회를 찾아 한국기업 연락처를 받은 우리는 상해 지도를 얻어 가지고,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한국기업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일단 먼저 전화를 걸어 보았다. 연변대 한국어학과를 졸업한 학생이라고 소개하고, 통역이나 무역업무를 하고 싶다고 했다. 대부분 당분간 직원 채용 계획이 없다고 했는데 다행히 한 무역회사에서 날자와 시간, 주소를 알려주면서 면접 보러 오라고 했다. 

    그중 의류무역을 하는 꽤 큰 업체가 있었는데, 그날은 나 혼자 면접을 보러 갔다. 한국사람들이 시간관념이 철저하다고 들어서, 면접 시간에 늦지 않게 나는 일찍이 출발해서 버스를 두세 번 정도 갈아타서야 그 회사를 간신히 찾아갔다. 

    면접은 부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봤는데, 생각보다 간단했다. 이력서를 보고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조금 있다 중국봉제공장에서 담당자가 오는데 통역을 좀 해보라고 했다. 내 통역실력을 테스트해보려는 것이었다. 나는 내심 긴장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 중국공장 손님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10분 정도 지나서, 중국공장 담당자 2명이 도착했다. 한분은 무역부서 담당 매니저 었고, 다른 한분은 봉제라인 담당자였다.

    작은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은 우리는 간단한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용은 대개 이러했다. 한국무역회사에서 중국공장에 셔츠 10만 벌 오다를 주기로 했는데 원단과 부자재 구입에서 난관에 봉착한 것 같았다. 그래서 원단과 부자재 샘플들을 두 박스 챙겨 왔는데, 일부 맞추기 어려운 컬러의 원단이나 단추 등을 다른 비슷한 원단이나 단추로 대체하면 어떻겠냐고 한국회사와 협상하러 온 모양이다. 

    나의 통역 테스트도 처음엔 순조로웠다. 중국공장 담당자들이 얘기하는 내용을 한국회사 부장님한테 통역해 주면 되었다. 중국어는 서툴지만 한국어(조선어)는 태어날 때부터 배우기 시작한 것이니, 함경도 말투만 좀 조심하면 그만이다. 슬쩍 부장님 기색을 보니 내심 만족해하는 눈치 었다. 

    하지만 내 서툰 중국어 실력은 한국회사 부장님의 말씀을 중국어로 중국회사 담당자들한테 전달하면서부터 들통 났다. 몇 개 생소한 외래어 단어만 빼고는 거의 다 이해했지만 그걸 중국어로 통역하는데 애를 먹었다. 머릿속으로 알고 있는 단어와 문법을 죄다 동원해서 이렇게 말하면 되나 저렇게 말하면 되나 하고 여러 번 "연습"하고 나서 더듬거리는 중국어로 중국공장 담당자들 한테 조심조심 통역하고 있을라니, 부장님 기색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부장님이 이번에 좀 더 길게 설명했다. 그리고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디 통역 한번 해봐 하는 식으로. 

나는 잔뜩 긴장도 되고, 어떤 내용은 기억도 나지 않자, 더 심하게 더듬거렸다. 

    "아까는 잘하더니 왜 그러죠? 안동훈 씨 혹시 중국어는 잘 못하세요?" 부장님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조금 긴장한 것 같습니다. 어떤 단어들은 잘 모르겠고요..." 내가 어색하게 변명하자, 부장님은 어이가 없었던지 나를 제쳐놓고 중국회사 담당자들과 직접 소통했다. 유창한 중국 표준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나는 일이 글러졌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미팅이 끝나고 중국손님들이 돌아가자 부장님이 한숨을 후 내쉬더니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안동훈 씨는 한국어는 괜찮게 하는 것 같은데 중국어가 많이 서툰 것 같네요. 솔직히 저보다도 못한 것 같아요. 중국교포신데 중국어를 못한다, 이건 좀 이해가 되지 않네요. 우리 회사에 교포직원이 몇 명 있는데 다들 중국어는 잘하거든요." 

    부장님이 잠깐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보다시피 우리 회사는 의류무역을 하는 회사예요. 중국공장과 많은 내용들을 소통하면서 진행해야 하거든요. 생산라인 감독이나 검수 작업 등 현장은 통역분들이 직접 맡아서 관리도 해야 하는데 안동훈 씨 중국어 실력으로는 그분들과 소통하기 어려울 것 같네요. 연변대를 졸업했다고 해서 많이 기대했는데... 아쉽네요." 

    나는 너무 창피해서 얼굴이 빨개져서 황급히 인사하고 나왔다. 수 십 개 한국회사에 연락해서 겨우 얻은 면접 기회였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날려 버리다니. 그리고 풀이 죽어 친구 기숙사로 돌아왔다. 


    그 이후로도 여전히 패배의 연속이었다. 함께 남은 짝꿍도 마찬가지 었다. 어느덧 상해 친구한테 빌붙어 산지도 달포가 넘었다. 갖고 온 돈도 떨어진 지 오래서 끼니를 굶는 일이 많았다. 어떤 날엔 아침 점심을 모두 건너뛰고 저녁에만 된장을 푼 육수물에 국수를 끓여 먹었다. 88학번 친구가 일요일에만 상해 기숙사로 오는데 그날은 우리가 "영양"을 보충하는 날이었다.

    어느 날 짝꿍이 나보고 쿤산(소주시 관할하의 하급도시)으로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거기 고향 후배가 한국신발공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상해에서는 더 이상 취직 가능성이 없어 보었다. 그렇다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나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큰소리치면서 비행기까지 타고 상해로 날아왔는데 이제 와서 무슨 낯짝으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단 말인가? 죽어도 여기서 죽어야 한다. 

    어차피 상해도 가망 없겠다, 쿤산에서라도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아니면 굶어 죽게 생겼다. 우리는 달포동안이나 빌붙어 산 88학번 친구한테서 쿤산으로 가는 여비까지 빌려서 기차를 타고 쿤산으로 갔다. 밤낮없이 펄펄 끓는 더운 열기로 골타르 길바닥이 흐물흐물 춤추던 8월 중순이었다. 

    짝꿍 고향 후배가 일하는 한국회사는 신발 만드는 공장이라고 했다. 직원수가 2000명이나 된다고 했다. 고향 후배는 대부분 시간 공장 기숙사에서 숙식하고 있었고, 회사에서 얻어 준 방 2개짜리 허름한 아파트는 사실상 거의 비워두고 있어서 우리는 당분간 거기서 지내기로 했다. 그리고 그 고향후배에게 일자리도 부탁했다. 

    1주일이 지나도 일자리는 소식 없었다. 에어컨도 없는 덥고 허름한 아파트에서 또다시 하루 한 끼로 버티던 우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리를 채용한 소주회사 김 차장한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어디세요? 그동안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되세요? 얼마나 찾았는데요, 하마터면 다른 통역들을 뽑으려고 했지 뭐예요." 김 차장이 엄청 짜증을 냈다. 

    "공장이 계획보다 빨리 완공돼서 지금 한국본사에서 상무님이랑 직원들이 모두 들어와 계셔요. 빨리 오세요. 할 일이 태산 같은데..." 그러면서 회사 주소를 불러 주었다.

    나는 그때 김 차장 잔소리가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오히려 고마웠다. 

    살았다! 나와 짝꿍은 서로 부둥켜안고 좋아서 쿵쿵 뛰었다. 솔직히 그동안 너무 힘들었다. 끼니를 굶거나 처음 겪어보는 무더운 남방 날씨는 그래도 이를 악물고 견딜만했지만 상해에서의 취직 실패는 우리에게 너무 큰 패배감을 안겨주었고 전의마저 상실되고 있었다. 과연 이 길이 맞기는 한 건지 하고... 


    우여곡절 끝에 굶어 죽기 딱 직전에 소주공장으로 취직한 우리는 거기서 불과 2개월도 못 버티고 그만두었다. 먼저 짝꿍이 한국인 상사 지시를 여러 번 거부해서 트러블을 빚다가 결국 쫓겨났다. 이 친구가 바로 연변대학교 숙소에서 툭 하면 무장경찰부대 군인들과 트집을 걸었던 그 친구다. 180cm 훤칠한 키에 인물도 잘 생겼고, 마음씨도 엄청 좋은 사람인데, 성질머리가 좀 고약했다. 

    그 친구를 자르기 전, 상무님이 나를 사무실로 불렀다. 

    "미스터 안(한국직원들은 우리를 그렇게 불렀다), 우리는 미스터 안과 미스터 정이 우리 회사에서 오래 일하기를 바랬어. 그런데 미스터 정이 요즘 우리 이대리와 트러블이 심각해요. 몇 번이나 주의를 줬는데도 계속 지시를 거부하고 마음대로 하고 있대요. 아무래도 미스터 정은 내보내야 할 것 같은데, 그래도 미스터 안과 미스터 정이 함께 연변대에서 온 친구니까 미스터 안한테는 미리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내가 그냥 잠자코 있으니 상무님이 내 표정을 슬쩍 살피고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속담에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하잖아? 미스터 정이 그만 두면, 미스터 안도 그만둘 거야? 난 솔직히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난 미스터 안이 우리 회사에 꼭 필요한 인재라고 봐. 다른 통역들은 어리고 고등학교밖에 다니지 못했잖아. 미스터 안이 그 친구들을 잘 관리해 줬으면 좋겠어." 

    "미스터 정은 꼭 잘라야 합니까? 기회를 더 줄 수 없습니까? 그 친구 나쁜 사람 아닙니다."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알아. 나쁜 사람 아니란 걸. 그런데 우리 이대리랑 너무 맞지 않아. 이대리는 미스터 정과는 죽어도 함께 일을 못하겠다고 해. 차라리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한다고." 상무님이 담배 한 개비를 붙여 물고 계속했다. "어쩔 수 없어. 그렇다고 이대리를 한국에 보낼 순 없잖아?" 

    상무님은 이미 결심이 선 것 같았다. 

    "잘 알겠습니다. 저도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이런 "협박"이 먹히진 않겠지만, 나는 마지막까지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그러시던가." 상무님이 담배가 끼어 있는 손으로 이만 나가봐 하고 손짓했다. 


    그날 오후, 친구는 짐을 싸서 다시 쿤산 후배한테로 갔다. 10월 초순의 일이다. 

    사실 나도 그만두고 싶었다. 친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 회사와 상무님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었다. 김 차장이 연변대학교를 방문해서 우리를 면접했을 때, 우리한테 약속한 대우에는 월급 1,000위안, 2인 1실 숙소, 그리고 한국직원들과 식사를 같이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회사에 입사해 보니 첫 3개월은 월급 500위안, 4인 1실의 숙소, 식대를 지불하고 회사 식당에서 다른 수백 명 한족직원들과 함께 먹어야 하는 구내 식당밥이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여러 번 항의했다. 계약서 내용과는 너무 틀리지 않냐고? 첫 3개월 월급 500위안, 4인 1실은 회사내규라 하니 따르겠지만, 한국직원들과 겸상까지는 아니지만 조선족 아줌마가 해주는 밥을 먹으면 안 되겠냐고? 

    그랬더니 회사에서 식대 보조금으로 50위안 더 올려주고 조선족 아줌마가 해주는 식사는 없던 걸로 하자고 했다. 

    "저희가 억지 부리는 게 아니고요, 저 한족사람들 먹는 밥은 정말 입에 너무 맞지 않습니다. 한국사람들과 같이 식사하겠다는 게 아니라, 반찬이라도 만들어 주면 좋겠다는 얘기입니다." 내가 한마디 했다. 

    그랬더니 상무님이 그게 무슨 소리냐며 따졌다. "아니, 미스터 안은 중국사람이 자나? 중국에서 나서 자란 사람이 왜 중국음식을 못 먹겠다는 거지? "

    어찌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재미교포들은 김치나 된장찌개보다는 햄버거나 스테이크가 입맛에 더 맞을 것이다. 이런 논리라면 우리 중국동포들도 당연히 조선음식보다는 중국음식이 입에 더 잘 맞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달랐다. 우리는 조선족들만 모여사는 동네에서 나서 자랐고, 김치와 된장찌개 없이는 밥이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지 않는다. 물론 가끔씩 중국음식도 먹는다. 하지만 그것도 어쩌다 먹는 거지 하루 세끼 먹는 게 아니다. 더군다나 소주공장에서 일하는 한족직원들은 죄다 남방사람들이고 그들의 음식은 북방 한족들 음식과는 차이가 많았다. 

    그런데 상무님이 그런 식으로 얘기하니 어이도 없고 화도 났다. 

    "식당 음식은 저희 입에 전혀 맞지 않습니다. 믿지 못하시겠으면, 상무님도 직원 식당밥 한번 드셔보시죠." 

    그 말에 상무님이 흠칫하더니, 어디서 이런 놈이 다 굴러왔나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상무님은 누구랑 타협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결국 우리는 50위안 식대 보조금을 더 받는 걸로 타협했다. 솔직히 상해에서 하루 한 끼조차 제대로 먹지 못했던 거랑 비교하면 여기는 천당이었다. 


    내가 이 회사와는 더는 같이 할 수 없겠다고 판단하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다. 추석날이었다. 한국직원들 기숙사로 조선족 아줌마가 우리를 불렀다. 상무님 포함 다섯 명의 한국직원들은 이미 전날에 소주 시내에 호텔을 잡고 휴가를 보내러 가서 한국직원 전용 숙소는 비어 있었고, 추석인데도 누구 하나 챙겨주지 않는 우리 처지가 딱했던 모양이다. 아줌마 남편도 그 회사에서 함께 일하고 있었는데 두 분 다 50대로 보었다. 아줌마는 상다리 부러지게 한가득 음식을 차려주었다. 아줌마 남편 포함해서 조선족 직원은 모두 5명이었고 다른 2명의 통역들은 나보다 두세 살 어린 친구들이었다. 자식벌 되는 친구들이 타지에서 고생하는 게 안쓰러웠는지, 아줌마는 평소에도 우리에게 맛있는 반찬을 자주 가져다주었었다.

    그날 우리는 오랜만에 입에 딱 맞는 한국음식들을 배 터지게 먹었다. 된장찌개며 김치는 말할 것도 없고 불고기며 생선조림도 있었다. 우리가 허겁지겁 먹는 걸 보더니 아줌마가 한마디 했다. 

    "그동안 내가 너희들한테 가져다준 그 반찬들 말이야, 사실 한국사람들이 잘 드시지 않아서 버리려던 걸 상무님이 너희들한테 가져다주라고 해서 가져다 준거야. 어떤 건 여러 번 덮여 내도 잘 드시지 않아서 버리려 했는데, 아까운걸 왜 버리냐, 재네들 가져다줘, 이러시는 거야 상무님이..." 

    나는 갑자기 똥을 씹은 기분이었다. 한국이나 한국기업에 대한 동경이 순삭하는 순간이었다. 짝꿍 친구는 화가 나서 씩씩거렸고 다른 어린 친구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편분이 그런 얘기는 왜 꺼내냐며 아줌마를 나무랐다. 

    그 후, 우리는 아줌마가 가져다 주는 반찬들을 손도 대지 않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상해에서 겪은 굶주린 시간들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참고 견뎌야 하는 일인데, 그놈의 자존심이 대체 뭐라고 나는 그러질 못했다. 그리고 10월 말, 나는 그 회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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