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부 운명의 그녀
13화. 운명의 그녀
하나 남은 짝꿍마저 회사를 떠난 후, 나는 한동안 외로움과 무기력함에 빠져서 좀 우울하게 지냈다. 술도 많이 마시고 담배도 많이 피웠다.
그때, 난 회사에서 자재과 관리를 맡았는데 자재과에는 나 말고도 여직원 2명과 남자직원 1명이 더 있었는데 셋 다 고등학교 학력이었다. 회사에서는 자재과를 나에게 맡겨 보고 싶어 했다. 대학을 졸업한 데다가 나는 겉으로 보기에는 조용한 성격이었고 짝꿍처럼 성질도 고약하지 않았다. 자재과 업무는 매일 입고되고 출고되는 가죽원단이나 액세러리 같은 자재들을 장부에 기재하고 오더에 따라 미리 준비하고 정리하는 일이었다.
언제부터인지, 짝꿍과 트러블을 빚었던 생산과 이대리가 툭하면 자재과를 찾아왔다. 처음에는 원단이나 액세러리를 찾는 시늉을 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대놓고 여직원 한 명을 자재창고로 자주 불러냈다. 얼굴이 반반하게 생긴 여자애여서 나도 처음엔 좀 호감이 갔지만 일을 시켜보니 일머리도 없었고 게으르기까지 했다. 이대리와 자주 붙어 있더니 내가 회사를 그만둘 쯤에는 아예 내 지시를 대놓고 무시까지 했다. 그 둘이 자재창고에서 무슨 행각을 벌였는지는 모르겠다.
안경을 낀 다른 여직원은 외모는 평이한 편이었지만 일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했다. 이름은 이소혜(李晓慧)라고 하는데 나는 부르기 편하게 그냥 후이(慧, 혜의 중국어 발음표기)라고 불렀다. 그 무렵 나는 회사에 대한 불만과 짝꿍을 "잃은" 외로움으로 말수도 적어지고(중국어가 서툴러서 말을 별로 하지 않았는데 짝꿍이 떠난 후 좀 더 과묵해졌다) 조금은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짝꿍을 잘라 낸 장본인인 이대리가 툭하면 자재과로 내려와 여직원과 희희닥거리고 있으니, 나는 더욱 울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상무님이나 한국직원들도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고 자재과 직원들도 나를 어려워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나는 안경 낀 여직원 후이가 가끔씩 나를 힐끔 거리고 있는 걸 느꼈다. 나는 내가 무서워서 눈치를 살피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애써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다.
어느 날, 후이가 또 나를 힐끔 거리기 시작하자 나는 좀 성가셔져서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황급히 눈을 깔았고 부끄러운지 얼굴이 빨개졌다. 찬찬히 보니, 안경 너머로 엄청 긴 속눈썹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가짜 속눈썹을 붙었나 하고 의심했지만 그때 중국은 모조 속눈썹 같은 게 흔치 않은 때었고 또 진짜 속눈썹이라고 하기엔 너무 과장되게 길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대체로 속눈썹이 긴 여자를 좋아했던 것 같았다. 대학교 1학년때 다칭에서 만났던 리설이도 속눈썹이 긴 편이었다.)
내가 자기를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그녀가 얼굴을 들고 수줍게 웃었다. 그렇게 미인은 아니지만 나름 꽤 괜찮은 얼굴이었다.
"후이, 너 그 속눈썹 진짜야?" 나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네?" 그녀가 처음엔 무슨 뜻인지 이해 못 하다가 이내 깨닫고 대답했다. "네. 진짜예요." 그리고는 곱게 눈을 흘겼다.
뭐지? 나한테 호감이 있는 건가? 나는 잠깐이나마 마음이 설렜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 이 회사를 언제 그만둘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었고, 연애나 취미생활 같은 걸 생각해 볼 마음의 여지가 없었다.
10월 중순의 어느 일요일, 늦은 가을이지만 강남 도시 소주는 여전히 여름처럼 따뜻한 날씨 었다. 공장 앞의 논밭은 벼가 노랗게 익어가고 있었고 파란 하늘에는 잠자리 떼가 무리 지어 날아다니고 있었다. 가까운 읍내 풍경만 빼면 영락없는 9월의 내 고향마을의 가을 풍경이다. 갑자기 떠오른 고향 생각에 마음이 울적해져서 담배를 꺼내 피워 물고 있는데 후이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미스터 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고향 생각" 나는 그녀를 돌아보며 짧게 대답했다. 그녀는 색이 조금 바랜 노란색 긴팔 티를 입고 있었고 손에는 빨간 플라스틱 보온병이 들려 있었다. 중국 어딜 가나 흔히 볼 수 있는 "국민" 보온병이다. 일 년 내내 찬물만 마시는 조선족들과는 다르게 중국사람들은 여름이든 겨울이든 끓인 물만 마신다. 수질이 좋지 않아서 끓여 마시지 않으면 배탈이 나고 심할 경우 학질 같은 질병에 걸려 죽을 수도 있었다.
"미스터 안 고향은 어디세요?"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흑룡강성" 이번에도 단마디 대답이다.
"하얼빈?"
"목단강."
"아, 지리교과서에서 봤어요, 목단강. 먼 데서 오셨네요." 그녀는 오늘 기분이 좋아 보었다.
"넌 고향이 어딘데?"
"화이안이라는 곳이에요. 들어 본 적 있으세요?"
"알지, 화이안, 주은래총리 생가가 있잖아?"
주은래총리는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총리이고 1976년 사망할 때까지 27년간 총리를 지냈는데 중국 국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맞아요. 저도 몇 번 가보았어요, 주은래총리 생가... 그런데 미스터 안 오늘 뭐 하세요?" 그녀가 갑자기 내 스케줄을 물었다.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어린 통역 친구들과 낮술을 하거나 책이나 읽거나 둘 중 하나다. 짝꿍도 떠나고 없고 이 망할 놈의 시골동네에서 내가 대체 뭘 할 수 있단말인가?
"아무것도 안 해. 왜?"
"저랑 같이 읍내 놀러 가지 않겠어요?" 그녀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뭐지? 데이트 신청? 참 당돌한 여자네, 하고 잠깐 머뭇거리자 그녀가 쐐기를 박았다. "가요, 우리. 조금만 기다리세요. 옷 갈아입고 나올게요." 그러고는 내가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재빨리 공장 건물 안으로 달려갔다. 일반 직원 기숙사는 공장동 4층에 있다.
5분쯤 지나서 그녀가 노란 긴팔 티 위에 아이보리 자켓을 걸치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블랙 스커트 차림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신발은 어떤 걸 신었던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데이트" 생각으로 신난 그녀를 실망시키기도 그렇고, 또 딱히 할 일도 없는지라 나는 못 이기는 척 그녀를 따라나섰다.
읍내는 그리 멀지 않았다. 새로 난 포장도로를 따라 노랗게 물든 논밭 풍경을 보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30분 정도 걸으니, 어느새 읍내에 도착하고 있었다. 길에서 그녀는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는 4남매 중 둘째이고 언니랑 여동생 그리고 남동생이 있었다. 그녀의 고향은 남존여비 사상이 유독 심해서 다들 아들 낳을 때까지 계속 아기를 낳는다고 한다. 자기네 집도 위로 딸이 셋이고 막내가 아들이라고 한다. 그 때문에 공산당원인 아버지는 좌천까지 당하는 처벌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동네는 중국에서 인구수가 가장 많은 현이라고 했다. 현은 한국의 군 같은 행정구역이고, 한 개 성(省)에 수 십 개 현이 있다. 후이네 고향은 인구가 200만 명이라고 했다. 한 개 현의 인구가 한국의 광역시 정도 규모라는 얘기다. 다른 현들의 인구는 일반적으로 50만 명 정도 었고, 내 고향인 동녕현은 20만 명도 안된다.
그녀는 그해에 대학입시를 봤는데 대학교에 붙지 못했다고 한다. 초등학교부터 줄곧 반장, 학생회장직을 놓치지 않았던 그녀는 공부도 잘해서 경쟁이 치열한 중점고등학교까지 무난히 입학하였고 이번 대학입시에서 중국 일류대학 중 하나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학입시에서 너무도 긴장한 나머지 죄다 망쳐서 일반 지방대에도 붙지 못했다고 한다. 부모님과 선생님들 보기가 너무 미안하고 부끄러웠고, 자신도 너무 괴로워서 한시라도 빨리 집을 떠나고 싶었다고 한다. 마침 이 한국공장에서 그곳으로 직원 모집하러 갔었고 그녀는 고등학교 동창생과 함께 지원해서 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며칠 전에 함께 온 동창생은 재수를 하겠다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본인도 부모님들이나 선생님들이 다시 재수하기를 바라는데 어쩐지 다시 공부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고 했다. (함께 왔다가 다시 재수한 동창은 그다음 해에 사범대학에 붙었고 지금은 자신이 공부했던 중점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지내고 있다고 한다.)
여기엔 고향에서 온 근로자들이 수 십 명이나 되지만 알고 지내는 친구는 한 명도 없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원들도 별로 없다고 했다. 하긴 그때 중국은 고등학교 학력이 결코 저학력은 아니었다. 유일한 친구도 재수하겠다고 떠나갔고 지금은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어서 외롭다고 했다.
순간 나는 또 다른 나를 보는 것 같아서 동정심이 일었다. 그녀가 나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 해서 나는 내 고향, 가족 그리고 내가 공부한 연변대학교에 대해 간략하게 얘기해 주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쫓겨난 짝꿍에 대해서도 얘기해 주었다. 그녀는 내 짝꿍 얘기를 직원들로부터 들었다고 했다. 생산라인에서 이대리랑 여러 번 "맞짱" 뜨는 걸 보고 적지 않은 직원들이 미스터 정을 "자본가에 맞서는 영웅" 쯤으로 존경한다고 했다. 실제로 미스터 정이 회사를 떠나는 날, 생산라인 수 백 명 직원들이 2층 창가에 붙어 서서 떠나가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읍내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유일한 메인 도로 양측으로 2층 혹은 3층 민가들이 늘어섰고 1층은 대부분 여러 가지 점포들이 문을 열고 영업하고 있었다. 그해 발표된 "샤오팡(小芳)"이라는 노래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촌스런 옷가지들을 파는 옷가게도 더러 있어서 그녀가 원단도 만져보고 몸에다 두르고 거울에 비추어 보기도 했다. 그렇게 몇 개 점포들을 돌아보다가 처음 들어갔던 점포에 다시 들어가 두꺼운 원단의 재킷을 하나 구매했다. 어떠냐고 나한테 물어봤지만 죄다 촌스런 스타일이어서 내 마음에 드는 옷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냥 다 괜찮다고 대충 둘러댔다.
점심시간도 가까워지고 해서 나는 그녀를 데리고 자그마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이 식당에서도 카세트로 "샤오팡(小芳)"이라는 노래를 틀어주고 있었다. 뭘 먹겠냐고 하니 갈비찜국수를 먹겠다고 해서 두 그릇을 시켰다. 다른 요리도 시키라고 했더니 국수 한 그릇이면 된다고 했다. 변변한 메뉴판도 없는 식당이었고 맛있을 것 같지도 않아서 요리 주문은 포기했다.
일요일인데도 식당엔 손님이 별로 없었고 주인장은 파리채를 들고 여기저기 파리들을 탁탁 때려잡고 있었다. 몇 분 후에 우리가 주문한 국수가 나왔다. 큰 사발에 금방 삶아 낸 국수를 넣고 그 위에 간장 육수 같은 국물을 부어주고, 그리고 지저분한 테이블에 놓여 있는 큰 대야 안에서 이미 졸여놓은 갈비를 한 대씩 집어서 국수 위에 얹었다. 마지막에 다진 쪽파와 고수를 뿌려서 내왔다. 그녀가 자기 그릇의 갈비를 집어서 내 그릇에 넣어 주었다.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갈비를 먹어보니 이미 식어 있었는데 그래도 맛은 있었다. 국수 두 그릇은 6위안(그 시절 환율로 한화로 600원 정도) 었고 내가 계산했다. 그녀는 고맙다고 했다.
그 후 우리는 제법 친해졌다. 퇴근 후, 우리는 자재과 사무실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나눴고 나는 내 꿈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서툰 중국어였지만 그녀는 모두 알아 들었다. 나는 지금 무역회사를 찾고 있고 곧 이 회사를 그만둘 거라고 했더니 그녀는 많이 낙담해했다. 그녀가 나에게 마음을 두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때까지 한족(중국사람)과의 통혼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조선족 동포들은 거개가 조선족 배우자를 만난다. 한족 남편을 둔 큰 이모때문에 우리 가족은 한족들한테 별로 거부감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한족과의 연애나 결혼을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후이의 호감을 확인한 후에도 나는 선뜻 그녀한테 다가가지 못했다. 한족과의 연애도 부담스러웠지만 어차피 곧 이 회사를 그만둘 건데 내가 마음을 주고 떠나면 그녀는 어떻게 하지? 그런 생각에 나는 더 이상 선을 넘지 않기로 했다. 그냥 좋은 친구로 좋은 기억을 가지고 떠나면 된다.
10월 말의 어느 일요일, 어린 통역사들한테 나는 곧 이 회사를 그만둘 거라고 했더니 애들이 엄청 서운해했다. 정형(내 짝꿍)이 떠난 후 나도 떠날까 봐 꽤 걱정이었는데 결국 이렇게 되네요, 하고 한 아이가 말했다. 좋은데 있으면 자기들도 데리고 가 달라고 했다. 두 달 정도밖에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한 숙소에서 같이 자고 먹고 지내다 보니 그사이 정이 많이 들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날 마지막으로 애들한테 밥이나 사주려고 그들을 데리고 읍내로 나갔다. 후이도 불러서 같이 갔다. 그녀와도 마지막 식사가 될 것 같았다.
그날 우리는 거나하게 마셨다. 하마터면 어린 통역 친구들과 의형제까지 맺을 번했다. 그동안 모르고 있었는데 읍내에 허술한 가라오케도 하나 있어서 우리는 2차까지 가서 마시고 놀았다. 새벽 늦게 회사로 돌아간 나와 후이는, 어린 통역 친구들을 숙소로 올려보내고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자재과 사무실로 들어갔다. 둘 다 술김이었는지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불도 켜지 않고 서로 부둥켜안고 입술을 찾았다.
10월 31일 오후, 재무과에 들러서 월급을 정산받은 나는 옷 몇 벌과 책들을 캐리어에 주어 담고 공장 정문을 나섰다. 어린 통역들과 후이는 한창 일하는 시간이라 배웅 나오지 못했다. 대신 총무과 이 과장이 나를 정문까지 배웅해 주면서 아쉬운 듯 말했다.
"미스터 안은 여기서 오래 있을 줄 알았는데... 우리가 그동안 좀 서운하게 대한게 있더라도 이해해주시오. 우리도 중국은 처음이라 아직 많이 서툴어요. "라고 말했다. 진심이 느껴졌다.
그러고는 이렇게 덧 붙었다. "어떤 회사를 다니든 적어도 1년은 해봐야 합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그래요. 그래야 내 적성에 맞는지 아닌지 제대로 판단할 수 있어요. 암튼 그동안 수고 많았고요, 인연이 있다면 언젠가는 또 만날 수 있겠죠. 그럼 잘 가세요."라고 하면서 나와 악수하고 헤어졌다. 내가 본 이 회사 한국직원들 가운데서 가장 합리적이고 인간성이 바른 사람이었다. 상무님 포함해서 다른 직원들 이름은 잊은 지 오래됐지만, 이정식 과장 이분은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소주공장을 그만두고 나는 곧바로 짝꿍 미스터 정을 찾아갔다. 그는 이미 쿤산에 있는 한국공장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소주공장에 있을 때보다 훨씬 여유가 있어 보여서 나는 적잖이 마음이 놓였다. 그 친구가 나더러 여기 남아서 같이 일하자고 했지만 나는 사실 산동성 웨이하이로 가던 길에 들른 것이었다. 웨이하이에 이미 "터줏대감"으로 자리를 잡은 고등학교 불알친구(대학교 때 김사장을 모시고 연변대로 나를 찾아온 친구)가 나더러 자기한테로 오라고 했다.
웨이하이는 그해(1993년) 2월에 이미 한번 가보았던 곳이다. 밀산 큰 이모부 소개로 국영기업인 웨이하이시수출입무역회사에 취직하려고 미리 가서 면접을 봤었다. 무역회사 장동사장은 큰 이모부 전우였고, 한-중 수교 이후 한국무역업무가 급증하고 있어서 한국어 가능한 직원이 많이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국영기업이다 보니 일반 채용으로는 어렵고 반드시 국가시스템을 통해서 입사해야 한다고 했다. 즉 흑룡강성 인사국에서 나를 산동성 인사국에 "양보" 해야 하고, 졸업 시 내 당안(档案,학교의 성적생활기록부)을 웨이하이시수출입무역회사에 제출해 줘야 된다고 했다. 국가기관 취직은 인맥을 동원하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인데 나는 그게 불가능했다. 그래서 결국 그 국영 수출입회사에 취직 못했다.
고등학교 불알친구는 그때 이미 웨이하이시에서 잘 나가고 있었다. 현지 중국회사 사장도 이 친구를 동생처럼 잘 대해준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중국사장은 내 친구를 통해서 한국자동차를 밀수하고 있었는데 그 규모가 상당했다. 이들은 한국자동차 판매회사와 결탁해서 공해상에서 현금으로 거래했는데 한 번에 적게는 수십 대, 많게는 100대 넘게 밀수했다.
어느 날, 친구가 나를 웨이하이 교외에 있는 초등학교로 데리고 갔는데 나는 운동장에 빼곡하게 세워 둔 소나타 III를 보고 깜짝 놀랐다. 열을 맞추어 세워 두었는데 얼핏 봐도 200대는 넘었다. 밀수로 들여온 자동차를 저렇게 백주대낮에 초등학교 운동장에 가득 세워 두고 구매자가 와서 가져가기를 기다린다고 하니 나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세관이나 공안에서 조사하지 않냐고 물으니, 그런 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밀수하겠냐며 대수로워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 차들 대부분 공안이나 군대에서 가져가."라고 나직이 들려주었다.
암튼, 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는 대학교를 졸업한 나보다 훨씬 더 잘 나가고 있었고 나한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쿤산에서 미스터 정과 잠깐 만난 나는 곧바로 웨이하이로 출발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고속철도 없었고 대부분 지역은 고속도로도 없어서 교통이 열악했다. 쿤산에서 웨이하이까지 가려면 적어도 시외버스를 서너 번 갈아타고 가야 했는데, 길에서 강도를 만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사연은 이랬다.
오후 늦은 시간에 연운항시를 출발한 버스는 밤 9시경 산동성 어느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다. 나는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느라 많이 피곤한 상태라 꾸벅꾸벅 졸고 있었는데 버스가 갑자기 멈춰 섰다. 나는 또 손님을 주어 싣는가 보다 하고 별생각을 안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버스 앞쪽이 소란스러워졌다. 머리를 들고 보니 험상궂게 생긴 녀석들 서너 명이 버스에 올라왔는데 손에는 단도를 들고 있었다. 한 놈은 버스 문을 막아서고 있었고 두 놈이 칼을 빙글빙글 돌리며 버스 뒤쪽으로 다가오면서 소리쳤다.
"돈지갑 다 내놔! 오늘은 피 보고 싶지 않아!"
나를 포함해서 다들 잠자코 있으니 강도들은 또 한 번 꽥 소리 질렀다.
겁에 질인 승객들이 하나둘씩 부산을 떨며 지갑이며 손수건으로 감싼 돈을 꺼내 주었다. 놈들은 지갑에서 돈만 빼내고는 지갑은 휙 하고 다시 승객에게 던져 주었다. 그리고 나에게로 다가오더니 칼을 내 눈앞에 대고 흔들어 보었다. 나머지 놈도 가세했다. 수적으로 열세인 데다가 그놈들은 흉기도 들고 있었다. 섣뿔리 대들었다간 큰코다칠 수 있었다. 다른 방법이 없는지라 나도 지갑에서 돈을 꺼내 건네주었다. 그리고 빈 지갑을 보여 주면서 50위안이라도 돌려줄 수 없겠냐고 "애원"했다. 집에 돌아갈 차비는 있어야지 않겠냐고 했더니 그놈들은 피씩 웃고는 칼을 흔들며 휘파람을 휘휘 불면서 승리자 포즈로 버스에서 내렸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것 같았다.
버스 기사가 출발하자 승객들은 빨리 공안국(경찰서)으로 가서 신고하자고 했다. 버스 기사가 말했다. "신고해도 되지만 저놈들은 못 잡아요. 벌써 다른 도시로 도망가고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공안국에 가면 진술서를 쓰느라고 밤을 새울 겁니다. 오늘 밤 웨이하이에 도착 못해도 괜찮겠어요?"
손님들은 잠시 뭐라고 중구난방으로 떠들더니 금세 조용해졌다. 나는 그냥 잠자코 있었다. 다들 아무 말 없자 기사는 "그냥 액땜했다고 치세요" 그러고는 액셀을 힘껏 밟았다. 나는 어쩐지 기사도 그놈들과 한패거리 같았다. 그래도 속으로는 살짝 안도했다. 왜냐하면 팬티 주머니에 넣은 500위안은 지켰으니 말이다. 그 무렵 중국은 법제도 낙후하고 치안상황도 좋지 않아서 우리는 먼 곳으로 이동할 때에는 반드시 주머니 달린 팬티를 입고 대부분 돈은 거기에 숨겨 둔다. 그리고 나는 이 이야기를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 쪽팔려서...
잘 나가는 불알친구랑 웨이하이에서 한 달 넘게 술만 퍼먹다가 그 친구 소개로 나는 다시 롄윈강(连云港)에 있는 한국식품회사로 취직했다. 주요 제품이 고구마전분 당면이었고 "손오공"이라는 중국브랜드를 만들어 라면제품도 막 출시하고 있을 때었다. 월급도 적었고 동네도 낙후해서 처음엔 갈 생각이 없었는데 여자친구도 동반입사가 가능하다고 해서 나는 후이랑 같이 가기로 했다. 이 회사는 후이 고향에서도 멀지 않아서 후이도 마음에 들어 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나를 그리워했고 나랑 같이 있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 었다.
내가 먼저 한국식품회사에 도착했고, 그 이튿날 후이도 아버지랑 함께 왔다. 남자친구를 사귀었다고 하니 아마 궁금하셨던 모양이다. 중국어는 잘 못했지만 대학교를 졸업했고 내 부모님도 엘리트들인지라 후이 아버님은 많이 안도하는 기색이셨다. 후이를 잘 부탁한다고 여러 번이나 부탁하고는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셨다.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서로를 꼭 껴안았다. 10월 말 내가 소주를 떠나면서 헤어진 지 한 달 만에 우리는 또 다른 한국기업에서 다시 만났다. 나는 그동안 그녀가 많이 그리웠다. 나도 내가 그녀를 이 정도로 마음에 둘 줄은 생각 못했다. "샤오팡(小芳)"이라는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녀가 그리워서 고독감과 외로움에 마음이 슬펐다. 그즈음, "샤오팡(小芳)"노래는 웨이하이시 모든 골목에서 하루종일 울러 펴졌다.
한국식품회사에서 후이는 품질검사부서에서 일했고 나는 상무님 통역으로 일했는데 딱히 할 일은 없었다. 상무님이 거래처 손님을 만나거나 회사의 중국인 관리자들과 미팅할 때 통역을 해주는 일이었고, 그런 미팅은 그리 많지 않아서 나는 매일 빈둥거렸다. 공장은 어느 시골 마을에 자리 잡고 있어서 공장 주변은 온통 밀밭이었고 까마귀와 까치가 많이 찾아왔다. 상무님이 어디서 구했는지 공기총을 한 자루 갖고 계셨는데 까마귀가 많이 내리는 날이면 나를 데리고 까마귀 사냥을 나갔다. 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 후 아예 공기총을 나한테 맡겼다. 나는 상무님이 회사에 계시지 않으면 의례 사냥총을 들고 까마귀 사냥을 나갔다.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서 발사해야 승산이 있는데 까마귀는 생각보다 너무 총명했다. 좀처럼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해 겨울 내내 까마귀 사냥을 나갔는데 까마귀는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연지탄만 몇 박스 낭비했다.
상무님이 나를 좀 이뻐해서 나보다 훨씬 먼저 이 회사에 들어온 조선족 교포 직원들이 나를 시기했다. 식당에서 자기들끼리 얘기하다가도 내가 들어가면 조용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친구들은 주간 야간 교대조로 생산라인에서 전분가루 뒤집어쓰고 힘들게 고생하는데 나는 툭하면 공기총 들고 까마귀 사냥이나 하면서 월급도 그들보다는 더 많이 받으니 왜 그렇지 않겠는가? 그런 어색한 분위기는 내가 두 달 만에 그 회사를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연변대학교 학생처에 막내 외삼촌이랑 가까운 분이 계셨다. 나는 그분을 형이라 불렀고 회사에 입사할 때마다 연락을 해서 내 상황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나는 무역회사에 다니고 싶다고 노래처럼 말했다.
어느 날, 그분이 나한테 전화를 해서 북경에 조선족 교포가 운영하는 무역회사가 있는데 자리가 있다고 하면서 나보고 갈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한국식품회사에 취직한 지 두 달쯤 되었을 때다. 무역회사라니 마음이 동했지만 조선족 교포가 운영하는 무역회사는 좀 낯설었다. 북한과 남한 무역 모두 하는 회사라고 해서 일단 가보기로 했다.
문제는 후이었다. 소주회사에서 여기 한국식품회사로 불러들인 지 두 달도 안 됐는데 또 떠나야 한다고 하면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되었다. 그리고 북경무역회사에는 후이 자리는 없었다. 하지만 무역사업 하나만 생각하고 국가에서 주는 직장도 마다하고 한국기업에 취직한 나인지라 이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후이한테 사실대로 털어놨더니 내가 뭘 하든 자기는 따르겠다고 했다. 다만 부모님께는 알려 드려야 한다고 했다. 마침 그해 구정도 얼마 남지 않아서 우리는 일단 한국식품회사를 그만두고 후이 고향으로 가서 구정을 보낸 후 함께 북경으로 가기로 했다.
구정 휴가 전날, 나는 상무님께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상무님이 깜짝 놀라서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냐고 했다.
"북경무역회사에 취직할 생각입니다." 나는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상무님은 어이가 없는지 한참 생각하더니 이렇게 물었다. "그동안 내가 자네한테 섭섭하게 한 적 있었나?"
"없습니다. 상무님은 저한테 과분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진심이었다.
"난 자네가 여기에 마음 없다는 걸 처음부터 알았어. 그래서 되도록이면 훈계 같은 걸 안 하려고 했어. 그리고 내 기억엔 자네를 훈계한 적 한 번도 없는 것 같아. 그렇지 않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무님은 나를 만류하려고 했다. "그래도 난 자네가 이렇게 빨리 그만두려고 할 줄은 몰랐네. 자네도 알겠지만 난 회장님의 조카야. 이 공장 오래지 않아 내가 맡게 될 거야. 그러면 자네한테도 더 좋은 기회가 될 거야. 난 지금 딱 한 번만 자네를 붙잡겠네. 내일부터 구정연휴니까 연휴 끝나고 자네가 다시 출근하면 이번 일은 없던 걸로 하고, 자네가 다시 출근 안 하면 우리 인연도 여기서 끝나는 거겠지..."
나는 다시 생각해 보겠노라 대답하고 상무님 방을 나왔다. 어쩐지 대단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한국식품회사에서 후이 고향집까지는 버스로 2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고속도로가 발달한 지금은 아마 1시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먼저 시외버스로 읍내에 도착한 다음 세발오토바이 택시로 10분 정도 더 가야 했다. 날씨는 포근한데 전날 눈이 많이 와서 길이 엄청 질척거렸다. 후이가 남자친구를 데리고 집에 왔다는 소문이 금방 퍼져서 나를 보러 온 친척들과 이웃들로 후이네 집 마당은 잔치집처럼 북적거렸다. 중국 옛날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남루한 옷차림의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 사람들이 신은 신발이 더 신기했다. 신발 모양의 나무판에 솜을 누벼서 만든 두꺼운 천을 버선 모양으로 만들어 붙었고, 나무판 밑에는 앞뒤로 나무 조각 두 개를 덧 붙었는데 꼭 일본 게다(나막신) 같았다. 사람들은 그런 신발을 신고 딸깍딸깍 소리를 내며 걸어 다녔다. 나중에 나도 한번 신어 보았는데 발바닥이 너무 아프고 발이 시려서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이 동네는 중국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현이다. 인구가 200만 명을 넘고, 사고방식이 낙후해서 남존여비 사상이 여전히 심각하다고 한다. 아들을 보겠다고 애들을 자꾸 낳는 바람에 식솔이 많은 집은 일곱여덟 명씩 된다고 했다. 사람은 많고 경작지는 적고 일할 수 있는 공장들도 적다 보니 중국에서도 가장 빈곤한 지역의 하나라고 했다.
후이는 이런 동네를 빨리 벗어나고 싶어 했다. 원래는 대학교 입학을 통해 인생을 바꾸고 싶었는데 수능을 망치는 바람에 그 희망도 수포로 돌아갔고, 지금은 나랑 함께라면 어디든 가고 싶어 했다. 이 동네만 아니면 되었다. 중국어가 서툰 데다가 이 동네 사투리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수준이라 후이네 집에 머무는 동안 후이가 "통역"을 해주었다. 한국회사에서는 내가 통역이었는데 여기서는 후이가 "통역"이다. 특히 후이 어머님과는 후이 "통역" 없이는 전혀 대화가 되지 않을 정도 었고, 그나마 여동생과 남동생은 학교에서 표준어를 배웠기에 어느 정도 소통이 되었다. 키(187cm)가 큰 남동생은 나한테 꽤 호감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남동생과 한방을 썼는데 내가 심심해할까 봐 자주 말을 걸어 주었다. 이 동네 사람들은 중국에 조선족이라는 소수민족이 있는 것도 잘 몰랐고 조선족을 만난 것도 아마 내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구정연휴 내내 후이는 나랑 함께 북경으로 간다는 얘기를 일절 꺼내지 않았다. 다들 구정이 끝나면 우리는 또다시 한국식품회사가 있는 롄윈강(连云港)으로 가는 줄 알았다. 북경에 간다고 하면 부모님들이 동의하지 않으실까 봐 원래는 얘기하지 않고 몰래 북경으로 출발할 생각이었는데, 어느 식사자리에서 술을 조금 마신 내가 참지 못하고 실토하는 바람에 이 집안은 삽시간에 태풍의 소용돌이 속에 떨어졌다.
후이가 지금이라도 재수를 해서 대학교 가기를 희망했던 부모님들은 지척에 있는 회사를 마다하고 멀리 북경으로 후이를 데리고 가겠다고 하니 펄쩍 뛰셨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후이가 나를 별채에 있는 남동생 방으로 들여보냈고 먹다 만 저녁식사는 후이와 내 문제를 둘러싼 가족회의로 급변했다. 별채에서 집안 동정을 살펴보니, 후이 혼자서 온 가족의 화살을 맞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몇 번이나 방문을 뛰쳐나가 후이 편을 들어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참았다. 분위기를 봐서는 이 사태를 잘 처리하지 못하면 나는 후이를 다시 못 볼 수도 있었다.
가족회의는 이튿날에도 계속되었고, 후이도 너무 지쳐서 버티기가 힘든 것 같았다. 내가 슬쩍 물어보니 북경에 갈 거면 나랑 헤어지는 게 낫다고 한단다. 말도 통하지 않고 생활습관도 많이 다른 소수민족이랑 연애하는 것도 모자라, 결혼도 하지 않는 처녀 몸으로 외간 남자를 따라 멀리 타향으로 간다는 자체가 너무 황당하다는 얘기 었다. 가족들의 질타를 견디다 못해 후이는 내 앞에서 눈물까지 보이며 "우리 그만 헤어질까요?"라고 했다. 그러는 후이가 안쓰러워 나도 잠깐 북경무역회사를 포기해야 하나, 하고 동요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담판을 지어야 했다.
나는 가족회의 긴급소집을 요청했다. 거실에 온 가족이 모었다. 심지어 큰 아버지 내외와 작은 아버지 내외도 후이 아버님 요청으로 참석했다. 나와 후이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차대한 순간이라 나는 적잖이 긴장했다. 다들 나를 쳐다보는 가운데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여러 어르신들, 저는 후이를 진짜로 사랑합니다. 장난으로 만나는 게 아닙니다. 제 얘기를 들어보시고 저랑 후이를 지지할지 아니면 뜯어 놓을지를 결정해 주세요."
나는 내 부모님에 대해 소개했고, 내 동생들을 소개했고, 내 고향과 조선족에 대해 소개했고, 한국에 대해서도 소개했다. 나는 교육을 받은 사람이고, 꿈을 좇아 여기까지 왔다고 설명했다. 나도 내가 한국회사에서 후이를 만나서 서로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후이를 너무 사랑하고 헤어지면 못 살 것 같다. 그렇지만 사업도 내게는 중요하다. 내가 어떻게 해드려야 후이와 내가 함께 북경으로 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냐, 고 물었다.
내가 하도 진지하게 설명하니 후이 부모님도 그렇고 큰아버지 내외와 작은 아버지 내외도 한동안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사투리로 자기들끼리 잠시 뭐라고 쑥떡쑥떡 의논하더니 후이 아버님이 결심하신 듯 나한테 말씀하셨다.
"샤오 안(小安, 중국사람들은 젊은이를 부를 때는 성 앞에 작을소, "샤오"를 붙여서 친근함을 표시한다), 우리도 자네가 정직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네. 그런데 후이는 이제 스무 살 밖에 안된 처녀아이라네. 롄윈강(连云港)에 있는 한국회사에 함께 다닌다면 우린 별로 걱정 안 하겠네. 가까이 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바로 달려갈 수 있으니까. 그런데 처녀 몸으로 남자친구를 따라 멀리 북경으로 간다는 건 성격이 다르다네. 마을사람이 알면 손가락질할 걸세.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나?" 구구절절 맞는 말씀이시다.
내가 잠자코 있으니 후이 아버님이 계속 말씀을 이으셨다.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나? 이건 후이 큰아버지 생각인데 후이가 아직 어리기는 하지만 성인이고, 꼭 자네를 따라 북경으로 가겠다고 한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네. 결혼하고 데리고 가게." 후이 아버님이 폭발적인 제안을 해 왔다.
"결혼이요?" 나는 깜짝 놀랐다. 그것까진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다. 난 아직 제대로 된 직장도 없고 집도 없고 저축도 없고 그리고 아직 나이도 어리다. 결혼은 아득히 먼 훗날의 얘기 었다.
"그래, 결혼해야 후이를 데리고 갈 수 있네." 후이 아버님이 쐐기를 박았다. 후이 어머님도 동조하는 표정이시다. 후이 보다 2살 많은 언니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고 동생들은 멀뚱멀뚱 어른들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좋습니다. 정 그 방법밖에 없다면 그렇게 해야죠. 하지만 저희 부모님께도 여쭤봐야 할 것 같습니다." 결혼은 중대사다. 아무리 개명하신 부모님이라고 해도 대학을 금방 졸업한 내가 갑자기 결혼한다고 하면, 그것도 중국남방의 한족여자랑 타지에서 결혼하겠다고 하면 무슨 사고라고 치지 않았나 걱정부터 하실게 뻔했다.
"결혼식 하려면 얼마가 필요하세요?" 아무리 시골동네 결혼식이라 하지만 혼수니 뭐니 돈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이 동네 습관을 전혀 모른다.
"돈은 많이 필요하지 않네. 우리는 딸을 팔려고 하는 게 아니네. 그냥 친척들과 동네사람들을 초대해서 인사하고 식사하면 되네." 후이 아버님이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허락이라도 받는 듯 후이 어머님을 쳐다보았다.
후이 어머님도 그렇다고 머리를 끄떡이셨다. 그리고는 그래도 너무 초라하게 할 수는 없으니 결혼식날 입을 전통 의상이나 기념선물 같은 건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얼마 정도 드냐고 물었더니, 큰 숙모와 작은 숙모 그리고 큰 딸이랑과 잠깐 의논하더니, 3000위안이면 된다고 하셨다. 내 어머니 2년 치 월급이다.
그 길로 나는 바로 읍내에 가서 전화기를 빌려주는 점포에서 아버지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마침 아버지가 사무실에 계셨고 나는 내 상황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드렸다. 황당하셨는지 아버지는 전화기 너머에서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으셨다. 그러고는 딱 두마디만 물어보셨다. "결혼식 날자 잡았어? 얼마가 필요해?"
그때는 금융시스템이 낙후해서 신용카드는 고사하고 예금카드도 없을 때인지라 송금도 우체국에서 전보로 보내고 받고 했는데, 나는 다음날 아버지가 보내주신 3000위안을 받았고 그 돈을 모두 후이 어머님께 드렸다. 결혼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3일 후 우리는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사진사도 불러서 결혼식 사진도 몇 장 찍었다. 나는 대학교 때 입었던 정장에 김사장이 선물한 DAKS 넥타이를 오랜만에 했고 후이는 파란색 두꺼운 원피스를 입고 가슴 쪽에 금술이 달린 빨간 조화를 꽂았다. 당연히 메이크업도 없었고 얼굴엔 크림만 바르고 입술에 립스틱만 살짝 바른 정도 었지만 스무 살의 어린 신부는 그래도 환하게 웃었다.
웃기는 건 그다음이었다. 현지 풍속에 따르면 결혼식이 끝나면 신부는 신랑을 따라 신랑집으로 가야 하는데, 우리 집은 몇 천리 밖 흑룡강성 대오사구 마을에 있어서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풍속을 어기면서 신부집에 계속 머무를 수는 없고 해서 우리는 1km 밖에 있는 읍내 허술한 여관을 찾아들었다. 거기서 잠깐 쉬고 옷도 갈아입고 다시 롄윈강(连云港)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북경으로 갈 계획이었다. 작은 여관방엔 삐그덕거리는 2인용 침대(더블침대라는 고급단어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누추한 나무침대)가 있었고, 불결한 냄새가 풍기는 더러운 이불이 두 장 덮여 있었다. 구석엔 역시 낡아빠진 작은 테이블에 흑백티브이인지 컬러티브이인지 알아볼 수 없는 구닥다리 티브이 한대가 놓여 있었다.
나는 한시라도 빨리 퀴퀴한 곰팽이 냄새가 진동하는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잠시 후에 여관으로 후이 여동생과 남동생이 찾아왔다. 지금 헤어지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18살 여동생은 언니를 껴안고 낮은 소리로 서럽게 흐느꼈고 16살 키 큰 남동생은 한편에 울적하게 서서 그런 누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매들은 한참이나 사투리로 얘기를 나누더니 우리 캐리어랑 배낭을 하나씩 들고 여관방을 나섰다. 그때는 몰랐었다. 그렇게 이별한 이들 남매가 6년이나 지난 2000년 1월에야 다시 만나게 될 줄은. 그 사이 후이 언니랑 여동생도 결혼 소식을 그리고 조카들 출생 소식들을 차례로 전해왔다.
그리고 그날, 우리는 "첫날밤"을 북경으로 가는 완행열차에서 보냈다. 아침 일찍부터 결혼식에 친지들 식사대접에 바삐 보낸 후이는 기차가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 품에 몸을 맡기고 어린 아이처럼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길다란 속눈썹엔 작은 눈물방울이 살짝 맺혀 있었는데 나는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측은하기도 해서 마음이 아팠다. 나는 속으로 결심했다. 꼭 성공해서 이 여자를 행복하게 해주겠노라고. 하지만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 않았고, 우리는 직장 다니느라 아기 키우느라 정신없이 살다보니 아들애가 다섯 살이 돼서야 후이 친정집을 다시 찾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우리 결혼식 날 멀리 대오사구 고향마을에서도 신랑 신부가 없는 마을잔치가 소박하게 열렸다고 한다. 큰 아들이 외지 타향에서 결혼식을 올리는데 일 때문에 집에 돌아올 수 없어서 부모님이 마을 어르신들 초대해서 식사대접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아버지는 술을 엄청 마시고 또 엄청 우셨다고 한다. 멀리 타향에서 부모도 없이 혼자서 결혼식을 올리는 아들이 너무 불쌍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