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적인 창작물의 발표를 약속한 예술가들이 있다. 음악으로는 <월간 윤종신>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고, 글로는 <일간 이슬아>가 있다는 것을 얼마 전에 알게 되었다.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시작했다는 <일간 이슬아>는 구독자에게 구독료를 선불로 받고 하루에 한 편씩 매일(주말은 쉰다) 자신이 쓴 글을 메일로 발송하는 프로젝트다. 그녀는 이 셀프 연재를 자그마치 6개월이나 지속했고 그 글들을 모아 책으로 출간했다.
작가들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라는 원고 마감을 매일매일 감당해내겠다고 자기 무덤을 판, 대책 없이 무모할 정도로 용감한 그녀가 써낸 글들이 궁금했다.
픽션이냐 아니면 논픽션이냐에 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나와 내 주변과 내 시선에 관한 글을 쓴다고 해서 그게 논픽션인지는 의문이다. 같은 일을 함께 겪은 사람들도 나와는 다르게 쓰고 가공할 것이다. 누구나 각자의 픽션으로 이야기를 완성할 것이다. p.165
그녀의 글에는 그녀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애인 하마와 그녀의 가족, 그리고 친구들이 등장하는 모든 글에는 소중한 사람을 바라보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느껴진다. 특히 그녀의 아버지 웅이와 복희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때면 작가 이슬아의 글이 왜 이리 사랑스러운지, 매일 연재라는 미션을 기어코 해내고야 마는 투철한 책임감이 어디에서 솟아난 것인지를 알 것 같았다.
누군가 말했다. 자신의 삶을 글로 쓰는 일에는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하다고. 나의 글이 독자들에게 내 뜻과 다르게 이해되고, 심지어 나의 글감이 되었던 소중한 사람들마저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위험부담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노브라와 성생활에 대한 내용을 자연스러운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는 독자가 있는가 하면, 흥미를 유발하는 자극적인 소재로 인식하며 픽션인지 논픽션인지를 궁금해하는 독자도 있을 수 있다. 그녀도 이미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글을 쓰는 것보다 자신의 글을 읽어 주는 많은 독자들과의 부대낌을 통해 자신이 성장해 나가리라는 것을.
브런치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잘 풀어낸 에세이를 읽을 때마다 부러웠다. 마음에 조그만 생채기라도 날까 두려워 한문장 한문장 전전긍긍하며 끄적거리다 그만두기만을 반복했던 내가 도달하지 못한 결승점에 그들이 있었으니까. 넘어질까봐 겁나서 아예 발을 떼지도 않는 아이같은 내게 이슬아의 말갛고 따뜻한 글들은 용기를 준다. '시작도 중간도 마지막도 그냥 다 겁나게 어렵다'는 글쓰기를 계속 하며,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그녀의 젊은 기운 약간을 선물받은 기분이다. 그녀 자신의 말처럼 아무래도 그녀는 '쓰고 싶게 하기'에 재능이 있는 것같다. 왠지 그녀의 이름을 주문처럼 외치면 내게도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몽글몽글 생겨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