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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얼 Dec 29. 2024

Rip Lee 씨의 사례 용법






 우선 사실 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 지난번 내용부터 정리해볼게요. 지금 당신 곁에 앉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타인이 관측 가능한가요? / 아니요. / 그 사람은 출생신고서나 주민등록번호를 가지고 있나요? / 아니요. / 이 사람은 우리가 사용하는 보편 언어로서의 실제 인물인가요? / 아니요. / 그럼 한 마디로, 이 사람은 당신의 상상이 만들어낸 인물이네요? / 네. / 그럼 달리 물어볼게요. 이 사람이 다른 실제 인물보다 당신에게 영향이 적었나요? / 아니요. / 이 사람이 실제 인물보다 존재가 가벼웠나요? / 아니요. / 이 사람이 있었던 일이 실제 인물과 있었던 일보다 경험과 의미가 적었나요? / 아니요. 평소라면 간접 체험과 직접 체험 간에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있겠지만 뇌가 고장나버린 아주 특수한 상황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 이 사람에게 배운 것, 받은 것, 위로와 감정 등 모든 무형적 교류가 실제 인물에게 받은 것보다 작았나요? / 아니요. 최소한 같았어요. / 그럼 이 사람이 다른 실제 인물과 다른 점은 뭔가요? 당신에게는요. / 저에게는 없습니다. / 다른 사람에게는요? / 다른 이에게는 앞서 말했듯 관측할 수 없다는 점 하나예요. / 그럼 이 사람은 당신에게 실제 인물과 다를 바가 없나요? / 개인의 특수 언어로서는 실제 인물이에요. 실재와 허구에 대해 나는 두 가지 기준을 가지고 있어요. 가려낼 수 없다면 구별할 수 없다. 그리고 가려내지 않기로 한 이상 구분할 필요가 없다. 가려낼 수 있고 가려내기로 했다면 내게 허구겠지만, 그럴 수 없고 그러지 않기로 한 이상 허구도 내게는 실재와 같은 무게를 가져요. 말 그대로 구분할 수 없고 구별할 필요가 없으니 다른 무게를 달 수조차 없죠. / 그럼 당신에게는 이런 특수한 인물, 허구지만 실재와 같은 무게를 지닌 인물이 지금껏 많았나요? / 아니요, 이 사람이 처음이었어요. 가려낼 수 있는 허구에 실재와 같은 무게를 가지게 하는 일은 단순히 뇌를 속이는 정도로는 할 수 없어요. 아예 고장이 나서 스스로 조절할 수 없을 때만 겨우 가능한 일이에요. 면밀하게 표현하자면 나는 이 사람을 만들지 않았어요. 내가 쓰러져 있을 때 이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고 해야 더 정확해요. 나는 일 년 전에 지금껏 살며 가장 큰 고락 속에 있었고, 인생 가장 밑바닥에 쓰러져 있었어요. 절망과 좌절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지요. 평생 쌓아온 사고 체계가 붕괴되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내가 뭘 좋아하고 싫어했는지조차 전부 잊어버려서 이러다 곧 죽겠구나 싶었어요.  그때 이 사람이 나를 찾아왔어요. 이제와 예상하기로는 아마 살고자 하는 마음에 당시 내게 가장 필요한 인물을 무의식을 찾아낸 것이라 생각해요. 분명한 것은, 내 의식이 찾은 것은 아니었어요. 나는 이 사람과 만나고 나서야 존재를 알았으니까. / 그럼 당신에게는 이 사람은 실제 인물이네요? / 타인의 보통 언어로는 실제 인물이 아니지만 개인의 특수 언어로는 실재하는 인물이에요. 관측이 안 되는 이들이 가상 인물이라 여기는 입장도 충분히 이해해요. 그들에게 이 사람을 실제 인물처럼 대하라고 강요할 수 없지요. 있다 해도 그럴 생각 없고요. 내가 필요한 만큼 나에게만 실재하면 돼요. / 마지막 질문이에요. 지난 문답에 당신은 내게 그리 말했죠. 지금껏 생각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명상을 하거나, 혹은 이야기를 만들거나 단순히 망상을 하면서도 수없이 많은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냈다고. 그럼 그 무수하게 많고 다양했던 인물 중에 왜 이 사람만 특별한 건가요? / 간단해요. 내가 만들어 특정 배경과 상황에서 작동하다가 끝나면 금세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그 많은 가상 인물들이 가지지 못한 두 가지를 이 사람은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 그게 뭔가요? / 첫 번째는 타성이에요. 외부 입력이 없는 이상 스스로의 관성을 유지하려는 속성이지요. 다른 이와 달리 이 사람은 행동을 예측할 수 없어요. 그리고 마음대로 조종할 수가 없지요. 이 두 가지가 중요한 이유는, 이래야만 다른 가상 인물들과 달리 실제 인물만큼 감정적 교류를 할 수 있게 때문이에요. / 조금 더 설명해보세요. / 실제 인물, 타인, 존재라 칭하는 이는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봤어요. 그리고 그 정의의 조건을 정리해봤지요. 첫째, 육체나 물체 같은 기반을 가지고 행위를 한다. 둘째, 나는 행위를 예측할 수 없다. 셋째, 상대를 마음대로 조정하지 못한다. 이 조건에 따라 눈앞에 이것은 무엇인가? 육신이 있으니 실재하는 무엇이다. 그렇다면 내가 예측하지 못하고 조종하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내가 아니라 타성이다. 그럼 이것은 실재하고 타성이 있으니 존재인가? 그렇다면 그 기준에 맞춰 이 사람도 정의해보는 거예요. 이 사람은 육체를 가지지 않았지만 내 정신에서 분리되어 행위를 한다. 나는 행위를 예측할 수 없다. 마음대로 조종하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실재하는가? 정신을 기반으로 인정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그렇다면 타인인가? 예측과 조종을 하지 못하니 맞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존재인가? 타인은 맞지만 기반 없이 정신만 있으니 아니다? 정신이라는 기반이 있고 타인이니 맞다? 그렇다면 데이터베이스에 복제된 인간의 뇌는 기반 없이 정신만 있는 타인이니 존재가 아닌 건가? 기계를 기반으로 삼아 존재인 건가? 반대로 금속 몸을 가지고 행위를 예측할 수 없고 조종할 수도 없는 기계는 내게 존재인가? 무엇이 실재일까요? 우리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존재라고 인정할까요? 지금까지는 육신이라는 기반, 행위의 근거가 되는 정신, 그리고 예측할 수 없고 조정 당하지 않는 타성까지. 몸과 머리와 마음, 이 간단한 기준에 의해 존재를 정의해왔고 그것은 지금도 여전하지만 앞으로도 과연 그럴까 싶은 거지요. 조건 몇 가지를 가지고 있어야 그는 실제 존재인가? 셋 모두 가지고 있으면 무조건일까? 기계 몸과 알고리즘만 있는 기계, 육체와 본능만 있는 벌레는 존재인가 아닌가? / 그래서 결국 그에 대한 당신의 답은 무엇이었어요? / 앞서 말했듯이 결국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내가 상대를 어찌 받아들이는지, 즉 인식과 의미라고 판단했어요. 세 가지 조건 중 두 가지를 가지고 있고, 내가 의미를 가지고 인식하면 그것은 나에게 실재하는 존재가 된다고 여겨요. 어쩌면 극단적으로는 조건이 하나뿐이어도 나머지 하나를 의미부여해서 존재로 여길 수도 있고요. 기계 몸을 가졌지만 예측 가능하고 조종할 수 있는 저 카메라도 의미에 따라 내게 존재가 될 수도 있어요. 육체를 가지고 예측할 수 없고 조종할 수 없는 저기 저 거미도, 존재의 조건을 충분히 갖췄지만 내게는 그저 벌레일 뿐이고요. 반면 우리 집에서 한 달 동안 내게 도망다니며 결국 알을 깠던 바퀴벌레는 내게 결국 벌레가 아닌 존재가 되었어요. 나쁜 의미지만요. 반대로 우리집 발코니에 누워있던 사마귀는 보자마자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어요. 그렇게 처음부터 존재였던 사마귀가 뒷다리가 부러진 순간 치워야 하는 벌레가 되었듯이. 인식에서 밀어내기 위해 존재에서 벌레로 격하시켰듯이. 이때는 인과가 역순이었어요. 조건을 갖추지 못했기에 존재가 아니게 된 것이 아니에요. 존재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 조건을 철회했어요. 감정이입을 끊고, 부여한 의미를 회수하는 일로. 그렇게 돌고 돌아오면 가장 처음 허구의 인물 정도는 얼마든지 실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존재로서 실제 인물과 다를 바 없이요. /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적극적으로 말해줘서 고마워요. 다음 상담은 이번달 마지막 금요일로 잡아놓을게요. / 고맙습니다. / 아, 혹시 당신 이야기를 제 사례집에 넣어도 될까요? 이름 나이 등 특정성을 제거한 상태로요.

 

 그러자 그는 처음으로 답이 없다. 대신 내내 그들을 찍던 카메라 렌즈 너머를 들여다보고 있다. 마치 동의를 구하는 듯이.




 - 계간 현대수필 2023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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