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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얼 Jun 30. 2023

범재의 물레

 

 

 

 

 

 ‘단어’는 재밌다. 평생 써온 한글에 한국어지만 있는지도 몰랐던 것이 이렇게나 많다. 본디 이런 뜻이었구나, 하고 제대로 아는 경우도 많다. 이런 뜻도 있었구나, 하고 새롭게 알게 될 때도 많다. 보고 있으면 글이 쓰고 싶어지는 이 자음과 모음의 조합은 지극히 특수한 목적으로 만든 수제 도자기 같다. 비슷할 수 있어도 완전히 똑같을 수 없는, 하나하나가 유일한 형태와 부피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담아야 하는 대상이 제각각 정해져 있다. 보고 있노라면 머릿속에 안개처럼 모호하게 떠있던 생각이 넓적한 잔을 찾는다. 마음에 진흙처럼 질척하게 붙어있던 감정도 기다란 병을 만난다. 서로 짝이 되는 그릇에 담으면 생각은 사상으로, 감정은 감성으로 선명하게 드러난다. 감성을 사상에 붓고, 찰랑이는 내용물을 술인 듯 차인 듯 마시는 일. 그렇게 단어는 글이 된다. 속을 채운 그릇이 늘어날수록 나는 다양한 맛을 깨닫는다. 정갈한 그릇이 선반을 채울수록 나는 보다 깊은 맛을 이해한다. 그릇이 모자르다고 생각할 수 없거나 느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표현에 궁색해지고 쌓아올림에 인색해질 뿐이다. 몇 개의 그릇만으로 문제없이 살아오다가 일상에 홍수가 난 상황에서는 살려달라 외치지 못했다. 미간까지 차오른 수면 위로 숨구멍을 내밀지 못해 밭은 방울만 토해내던 지난날이었다.

 

 ‘단 어’는 쉬우면서 재밌다. 여러 장점 중에 몸을 씻을 때와 달리 기록물을 들 수 있어서 특히 좋다. 발을 놀리는 만큼 풍경이 흘러간다는 점도 좋다. 익숙한 노선을 찬찬히 밟아 나가는 것도, 갈림길에서 가보지 않은 골목으로 선뜻 들어서는 것도 좋다. 주변에 떠밀려 본의 아니게 빨라지는 삶을 원하는 속도와 박자로 재조정하는 과정이어서 좋다. 목적을 위해 나설 때는 스트레스인 차와 사람, 얼른 바뀌지 않는 신호등까지도 이때는 어느 하나 자극이지 않아서 좋다. 차와 사람은 적막하지 않은 풍경이 되고, 신호등은 잠시 멈춰 주변을 둘러보고 바람을 느끼는 막간이 된다. 목적 없이 걷다 보면 나는 점차 느슨해진다. 과열된 뇌가 속도를 늦추고, 예민하던 촉이 부드럽게 뭉그러지고, 호흡의 높이와 온도에 집중하게 된다. 결국 나설 때보다 훨씬 여유 있는 사람이 되어서 돌아온다. 그래서 집 근처에 강이나 산, 못해도 천이나 언덕을 선호한다. 가장 좋아하는 것은 호수와 들판이지만 수도권에서는 어림없으니까. 도심에서 살 때는 항상 스트레스를 받으며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인프라와 편의를 조금 포기하더라도 지방으로 도는 이유도 그렇다. 잦은 나섬이 자연스러운 삶. 애써 시간을 들여 멀리 가지 않아도 자연의 만듦새만 가득한 풍경을 천천히 걷는 일. 산책은 시간과 노선을 강요하지 않아서 좋다. 와중에 단어가 글이 되기도 하고, 글이 다시 단어로 돌아오기도 해서 재밌다. 이전 단어와 돌아온 단어가 서로 다를 때가 있어서 특히 재밌다.

 

 ‘ㄷㅏㄴㅇㅓ’는 어렵지만 재밌다. 재밌기는 가장이다. 어려워서 문제지. 재능 없이 그저 싸지르는 행위는 단순히 재미만 느낄 수 있어서 좋다. 종종, 어쩌면 그보다 자주 나에게는 그런 과정도 필요하다. 다만 나는 풍선이 부풀어 오르듯 소우주를 가득 채우는 무엇을 외우주로 내보내기 위해 이 일을 시작했다. 단지 내보냄이 목적이었으면 그저 싸지르면 될 일인데 궁금증이 문제였다. 나를 괴롭히고 폐를 짓누르며 잠식하는 원인이 무엇인지. 그래서 되도록 손실과 변질 없이 꺼내고 싶었다. 눈에 보이게 꺼내서 살펴보고 싶었다. 어떻게 생겨났는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왜 생겨났는지. 관찰하며 종래에는 알고 싶었다. 나를 괴롭히는 원본이 이렇게나 작았구나. 나는 이런 부분이 약하고, 저런 부분에 강하구나. 지금 이쯤에 발목 잡혀 있구나. 이렇게 작동하는 인간이구나. 내가 궁금했다. 알고 싶었다. 나를 움직이는 주체가 상황이나 본능이 아닌 나 자신이고 싶었다. 단지 개흙을 뒹굴며 괴로움에 울고 소리치는 인간이 아니라 목까지 잠겼어도 버둥거리지 않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인지와 인식. 그래서 어려웠다. 꾸준히 오래 써도 여전히 어려웠다. 그러다가 어느덧, 직감적으로 깨닫게 되는 순간이 왔다. 오히려 어중간했다면 몰랐을 텐데 어느 지점을 지나고 나니, 나는 내용물을 기대만큼 꺼내지 못함을 깨달았다. 이 잔에 저 술을 부어 봐도, 저 잔에 이 차를 담아 봐도, 꾸준히 늘린 그릇을 아무리 뒤섞어도, 오히려 건드리지 않아도, 소우주에서 선명한 붉은빛을 사방으로 뿌리는 장미는 외우주로 나오는 순간 빛을 잃었다. 어떻게 해도 누렇게 시들 뿐이었다.

 

 아, 나는 글쓰기에 재능이 없구나.

 

 창작자로서 반드시 필요한 세 가지 재능 중에 최소한 하나는 분명하게 없구나. 나머지 두 개는 노력으로 기를 수 있지만 이것만큼은 가진 채 태어나야 하는데. 마치 키처럼, 전두엽의 부피처럼, 탄력 있는 근육처럼, 노력을 얹을 수 있는 최소한의 기반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부족하구나. 시든 장미라도 활용할 방법은 많다. 다만 아쉬웠다. 목숨이 끝나는 날까지 탁자 위 꽃병에 싱싱한 꽃다발은 담지 못할 것 같아서. 언젠가 가능할 거라는 기대를 원동력 삼을 수야 있겠지만 나는 안다. 내가 선명한 붉은 장미를 거침없이 꺼낼 수 있는 천재가 아님을. 그럼에도 살며 손으로 만진 모든 행위 중에 이보다 나를 들뜨게 했던 일도 달리 없었다. 나를 북돋고, 달래고, 행복하게 하고, 지금 순간을 온전히 만끽하게 하는 일은 또 없었다. 그러는 동안 깨달았다. 이 일은 내게 직업이 될 수 없겠구나. 다른 직업을 가지든 아니든, 이쪽으로 먹고 살든 아니든, 나는 평생 글을 쓰며 살겠지만 직업이라 여기지는 않겠구나.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할 수 없겠구나. 오히려 재능이 없기에, 잘해서 좋아하는 일이 아닌 잘하지 못해도 좋아하는 일이기에 이렇게 기쁠 수도 있구나. 천재가 재능으로 즐기는 방법이 있듯 범재에게도 재능 없이 즐기는 방식이 있겠지. 결과물은 퍽 다르겠지만 싱싱한 꽃다발을 꽃병에 담는 그도, 시든 잎을 그릇의 무늬로 삼는 나도 탁자 앞에 앉은 마음은 다르지 않을 테니.

 

 그래서 글쓰기는 재밌다. ‘영혼의 동반자’는 아직 만나지 못했지만 ‘영혼의 행위’는 이른 나이에 찾을 수 있어서 기쁘고 다행이다. 그에 할 수 있는 일이 물레를 돌리는 것뿐이라면 더는 즐겁지 않을 때까지 빚으면 될 일이다.

 

 


 - 좋은 수필 2023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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