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러 그러는 거예요?”
“뭐가요?”
“왜 사람들이 오해하도록 말을 애매하게 해요?”
“아, 그 말이구나. 음... 난 거짓말은 안 했어요. 그저 말을 안 하거나, 호도하듯 말하거나, 적극적으로 해명하지 않았을 뿐이죠.”
“그거나 그거나. 그러니 다들 쉽게 오해를 하잖아요.”
“그러라고 그러는 거예요. 안 그래주면 섭섭하지.”
“나 참, 왜?”
“시선과 시야가 모든 받아들임의 시작이니까?”
“끝이 왜 물음표야?”
“이것도 같은 맥락.”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
“그 의외라는 눈이 참 실례네.”
“...아무튼,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 다음.”
“속상하다고.”
“뭐가?”
“도령 오해 받는 거.”
“'괜찮아요, 어차피 내가 받는 건데'라고 해봤자 전혀 소용없겠지?”
“무슨 뜻인지, 의도나 상황, 마음 다 아는데. 그래도 속상해.”
“나는 조금 난잡한 사람이라. 시선과 시야를 되돌려서 ‘왜?’라고 물어봐도 알기 어려운 사람이니까. 그조차 하지 않아서 받아들임 자체를 차단한 사람들까지 포용하고 설득할 시간이 없고 심력도 부족해요. 그 시간에 다른 오해를 하고 있을지도 모를 내 주변 사람들을 신경 쓰기도 바쁘거든. 그래서 내게 이 ‘적극적 해명 없는 오해성 발언’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호도성 진실’은 어쩔 수 없는 기회비용인데.”
“......”
“곁에서 보는 당신은 그게 참 속상하겠다. 그러겠네. 미안해요.”
“사과하지 마요. 도령이 사과할 일도 아니고, 내 기분 때문에 상대에게 어쩔 수 없는 일 가지고 사과시키는 이기적인 애 같아지니까.”
“그렇게 생각 안 해. 이건 그냥. 그거랑 상관없이, 그냥 미안하다고 하고 싶었어. 미안해요.”
“......”
“대신 우리 같이, 다른 좋은 거 더 많이 보자. 예쁘고 따듯한 부분들 더 챙겨서 보자.”
2015.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