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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얼 Dec 30. 2024

[그데담 058] 자상함과 다정함






 “도령. 다정함이랑.......”


 “컷하고 끼어들기.”


 “응?”


 “나는 도령이라는 단어의 울림이 참 좋은 것 같아.”


 “응?”


 “누군가 나한테 나긋한 목소리로 ‘도령’하고 불러주면, 뭘 하고 있든 그 순간 기분이 엄청 좋아진다?”


 “......”


 “왜?”


 “또 오해성 발언.”


 “엥? 방금 어디가?”


 “오해는 아닌데, 사람이 굳이 안 해도 되는 상상을 하게 만드는... 어휴, 아무튼 뭐 그런 게 있어요. 표현하기 애매한.”


 “아. 짐작도 못했다.”


 “근데 이건 도령 잘못은 아니야. 그냥 내가 잠깐 다른 생각 들어서 그래요.”


 “스무 살 초반의 안 좋은 버릇이 남았나.”


 “도령이 잘못한 건 아니라니까.”


 “근데 어떻게 개선...이라는 단어가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음. 아무튼 방법을 모르겠네.”


 “괜히 투정 부려놓고 염치없이 한 마디 덧붙이면, 다른 여자들은 모르겠지만 나 같은 경우에 방금 같은 상황에선 ‘당신이 그렇게 불러줘서 참 좋다’라는 말이 더 좋았을 거야. ‘누군가 그리 불러주면 좋아지더라’라는 말은 옛날 경험을 말하는 것 같아. 실제 그렇게 불렀던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까 괜히 이 생각 저 생각 들고 기분이 좀... 아니, 아니다. 욕심이 많네, 내가.”


 “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나 이런 게 문제였구나.”


 “왜? 들어본 말이야?”


 “응. 항상. 아, 예전 이야기 잠깐 꺼낼게요. 이건 내용에 필요해서. 옛날부터 여자 친구들에게 항상 뭔가 뜨뜻미지근한 불만을 받아온 게 있는데, 이게 뭔지 정확하게 설명해주지 않는 거야. 그리고 아마 그때는 내가 들어도 제대로 못 알아듣고, 안 알아들으려고 하고 막 그랬을 거야. 그래서 방금 느낀 거랑 비슷한 애매함을 계속 느끼고 살았거든. 근데 그게 뭐였는지 오늘 확실히 알았어. 그게 이거였구나.”


 “저기요 아저씨, 그걸 이제야 알았다는 게 더 신기하거든요.”


 “항상 뭔가 불만인 티는 나는데 제대로 말을 안 해줬거든. 나도 끝까지 물어보거나 고민 안 하고 그냥 넘겼고. 찝찝한데 잠깐씩만 드러나서 그냥 까먹고 계속 지나간 거야. 아무튼 말해줘서 진짜 고마워요. 묘한 어감 차이라서, 자칫 속 좁은 여자처럼 비쳐질까봐 쉽게 말 못할 내용인데.”


 “응, 방금 말하면서도 좀 그랬어. 괜한 걸로 꼬투리 잡는 속 좁은 여자 되는 것 같고.”


 “아니야, 잘 말해줬어요. 고마워. 음....... 이런 표현이 맞을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조심할게.”


 “아, 몰라. 이러고 나면 진짜 할 말이 궁색해진단 말이야.”


 “다시. 당신이 ‘도령’이라고 불러주면 나는 참 기분이 좋더라. 어떤 상황에서든 그 울림이 참 부드러워. 이건 진짜.”


 “아무튼 좋게 들어줘서 고마워요. 받아들여주려고 노력한 것도. 나도 이렇게 말하는 게 맞겠지?”


 “아무렴 어때, 불만을 불만이라 말한 건데. 물론 그렇게 말해주면 더할 나위 없고. 아무튼 아까 말 자른 건 미안. 방금 듣는데, 순간 이 말 꼭 해주고 싶어서 치고 들어왔어. 하려던 말 다시 해줘요.”


 “...뭔 얘기였는지 까먹었다.”


 “아까 다정함 뭐라 그랬는데. 그럼 생각나면 말해요.”


 “아! 도령한테 다정한 거랑 자상한 거랑 달라요?”


 “뭐야, 글 보고 있었어?”


 “응.”


 “아버지 관련된 글이죠?”


 “네.”


 “다르죠. 정확히는 나는 다르게 써요.”


 “어떻게 달라요?”


 “거기 아마 그렇게 적혀있죠. 우리 아버지는 자상하긴 했지만 다정하진 않았다고.”


 “응, 근데 무슨 차이인지 잘 모르겠어서.”


 “보통 두 단어는 비슷한 의미로 쓰니까. 나는 약간 차이를 둬서 구별을 해요.”


 “어떻게?”


 “제반 설명이 먼저 필요하겠다. 아버지 자랑 좀 할게요.”


 “얼마든지! 아버지 자랑은 처음 들어보네.”


 “우리 아버지는... 뭐랄까. 훌륭한 분이에요. 소위 말해서 ‘짱짱맨’이셔. 사회적으로 성공하셨고, 남자로서도 멋있어. 똑똑하고 강인하고 유머도 있는데 능력도 있고. 가장으로서 책임감이 있고 노력도 많이 하셨어요. 괜찮은 남편이었고 훌륭한 아버지셨죠. 그래서 내게는 자상한 아버지였어요. 여기서 자상하다는 말은 나와의 관계, 즉 아들을 대하는 아버지로서 부족함이 없었다는 거예요. 아버지로서 의무, 책임, 권리 등을 충분히 소화하고 영위하셨죠. 아직도 가장 존경스럽고 대단하고, 내게는 최고로 멋진 아버지예요. 나는 그런 부분을, 이런 관계에서는, '자상하다'고 표현해요. 버릇없는 표현이지만 의미 전달을 위해서 덧붙인다면, 한 마디로 자신의 ‘할 도리’를 다 하면 그 사람은 그 도리를 다 한 사람에게 자상한 거예요. 만약 내가 당신에게 할 도리를 다 하고 있으면, 나 역시 당신에게 자상한 사람인 거야.”


 “어머, 자상한 남자.”


 “귀여워. ㅋㅋ 아무튼 아버지도 그러셨어요. 부족함 없이 자신과 가족에게 자상한 사람이었죠. 남자로서, 아들로서, 친구로서, 사회인으로서, 직장인으로서, 교수로서, 사장으로서 자상한 사람이었어요.”


 “이건 도령의 그... 단어의 개인적 용법이네요.”


 “맞아요. 그것도 유추로 알 수 있는 보통 단어가 아니라 설명을 듣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든 특수 단어 쪽이죠.”


 “응, 자상한 거에 대해서는 이해됐어요.”


 “근데 아버지는 내게 다정하진 않았어요. 내가 방금 말했던 모든 것들과 그 모든 과정들이 부드럽거나, 융통적이었거나, 상대를 배려하거나, 따듯하진 않았죠. 지극히 옛날 분이시고, 보수적에 가부장적이시고, 나와 완전히 다른 세대에 태어나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사셨던 분이시죠. 그래서 자상함을 항시 당신의 방식으로만 관철하셨어요. 그래서 이성적으로는 부족함 없이 자상한 분이셨지만, 감성적으로는 그다지 다정하게 느껴지지 않았죠.”


 “음.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요. 이해도 되고 납득도 되는데, 뭔가 가슴에 확 와 닿지는 않는다. 내가 남자가 아니라서 그런가, 아니면 도령이 아니라서 그런가.”


 “둘 다인 것 같아. 모녀, 모자, 부녀, 부자는 각각 독특한 느낌의 관계가 형성되니까. 내가 모녀와 부녀의 관계를 세세한 물결까지 파악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런 비슷한 게 아닐까 싶어. 게다가 이건 뭐랄까, 내 개인적인 부분도 있다고 보고. 물론 많은 부자들이 우리 같은 부분이 있어요. 우리 부자도 흔한 부자 같은 모습이 있지. 하지만 비슷하다고 모두 같은 그림이 아니듯이, 우리만의 그 독특한 뉘앙스는 따로 있잖아. 이건... 내가 우리 아버지와 지난 삼십 년 동안 부대끼면서 느끼고 배우고 때론 감동하고 종종 좌절했던 그 모든 감정과 역사들을 한데 뭉쳐서 단어 두 개로 정리해놓은 거거든. 그게 나한테는 자상함과 다정함이야. 내게는 무엇보다 다른 느낌의 단어지만, 보통은 비슷하게 쓰이는 단어지. 그래서 이 차이를 남에게 제대로 전하기 힘들 수도 있다고 봐요.”


 “도령이 말하던 그... 추상 전달의 한계가 이건가 싶어. 왜, <그데담 1번>에 나왔던 말 있잖아. 대차대조표에서 찾아서 규정해야 추상을 정의할 수 있다고 적어놨었잖아요. 근데 내 표에는 ‘부자’라는 목록 자체가 없으니까 전달이 제대로 안 되는 건가봐.”


 “완전 정확해. 글 올리는 보람이 있네. 정확히 그런 경우예요. 근데 이건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그냥 개인적인 단어 차이일 뿐이야. 대부분의 부자는 이런 멀면서 가까운 그 오묘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지.”


 “...요즘은 아버지랑 관계가 괜찮죠?”


 “음.... 뭐라 표현이... 애매하네. 확실히 옛날만큼 분명하게 좋지 않고 따끔거리는 관계는 아니에요. 그렇다고 이제는 마냥 좋다, 괜찮다, 그렇게 말하기도 좀 그렇고. 이건 관계가 아니라... 뭐랄까, 이제 내게 아버지는 마냥 감사하고 마냥 죄스러운, 부르면 눈물 나는 그런 사랑이자 마음의 한...이죠.”


 “...응.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다르게는 표현 못하겠다. 관계가 아니라 그냥 그런 느낌인 것 같아. 나이를 먹고 나서는 더욱, 부모님을 생각하면 눈물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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