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내가 또 손꼽히는 ‘북리스’지. 살면서 읽어본 책을 꼽으면 A4 한 페이지에 다 적을 수 있을걸.”
“그러면서 글 쓰는 거 보면 신기해. 원래 다 되는 거예요, 아님 도령만 되는 거야?”
“그래서 글도 잘 못쓰잖아. 기간에 비하면 아직도 가나다라 하는 수준이지. 그리고 정확히 말하면 읽은 건 많아요. 평균적인 또래보다는 훨씬 많을 걸. 살면서 거의 늘 뭔가를 읽으면서 지냈으니까. 더 정확히는 책 플러스 글이지만.”
“처음 듣는 소린데.”
“읽은 것에 비중에 만화책이나 장르 소설, 사설, 번역본, 전문서적, 정보지, 논설이나 산문 등에 압도적으로 쏠려있는 거지. 세계명작, 고전명작, 국내명작 등을 위시한 순수소설이나 시집, 자기개발서 등은 거의 읽지 않았거든요. 소위 서점에 가면 가판에 진열된 그런 것들. 보통 ‘책을 읽는다’라고 하면 이런 거잖아요. 그래서 책 많이 읽는 사람들이랑 대화가 잘 안 돼요. 나는 안 읽어서 모르니까. 그래서 보통 그냥 책 잘 안 읽는다고 말하는 편이에요.”
“뭐야, 그런 거였어요?”
“내 글 보면 스타일이라고 해야 하나, 문체? 그런 게 좀 명확하잖아요. 약간 사설 스타일의 산문이잖아. 그리고 묘하게 번역본 냄새가 나고.”
“맞네, 그러고 보니.”
“그리고 소설을 많이 안 읽었으니 소설도 더럽게 못 쓰고.”
“난 재밌게 봤는데.”
“당신은 다행히 코드가 맞았던 거지, 대중성은 없잖아.”
“다른 대중성이야 난 모르지. 내게 있어서 대중성의 기준은 나니까.”
“맞아. 이 여자 이런 스타일이었지. 아무튼 그래요.”
“그럼 아까 말한 A4에 들어가는 책들은 일반소설이나 자기개발서, 저런 것들?”
“주로 그렇지. 어쩌다 보니 고전과 신작을 망라하고 유명하다 싶은 것은 죄다 안 봤어. 물론 안 유명한 것도 안 봤고, 숨겨진 것도 안 봤지.”
“왜? 지난번에 말한 그것 때문에?”
“어. 옛날에는 그 페이지 사이에 숨겨진 칼날이 너무 무서웠거든.”
“사설이나 논설 같은 것도 마찬가지 아닌가? 오히려 남 생각이 더 많고 강하지 않아요?”
“맞아요. 그래서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는 책이면 가리지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는데, 스물 초반쯤에 덜컥 겁이 나더라고. 대학생이 되고 도서관에 다니면서 소설이나 사설을 주로 읽었는데 당신 말대로 내가 엄청 휘둘리는 거야. 그래서 그때부터는 남의 생각이 들어간 건 잘 안 읽게 되었어요. 주로 사실을 단순 기술한 전문서적 정보지 위주로 봤던 것 같아. 그것도 어쩌다 보니 번역된 걸로만 접하게 됐어.”
“그것도 어쨌든 서른까지라고 하지 않았어요? 지금은 상관없잖아.”
“맞아요, 서른 즈음 되니 이제는 어느 정도 괜찮겠다 싶었어. 완전히 영향을 배제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니, 이 정도면 타인의 사상에 무분별하게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어요.”
“근데 지금은 왜 안 읽어요? 그 뭐냐, 유명한 책에 대한 거부감 같은 게 있어요?”
“그런 건 전혀 없어요. 지금 책을 잘 안 읽는 것은 그냥 습관이에요. 그동안 안 읽던 습관. 고쳐야 할 것이죠.”
“예전에도 얼핏 들었지만 뭔가 신기한 기준이다. 일단 주류 책과 비주류 책을 나누는 것 자체가 신기해. 나한테는 그냥 다 같은 책이라서.”
“이건 남에게 설명하기 좀 어려운 문제예요. 설명할 방법이 없는 게 아니라, 너무 개인적인 기준으로 작용하는 거라 공감이나 이해를 바라는 건 당연하고, 납득조차 시키기 어려운 거니까.”
“그럼 도령이 보기에 보통 남들이 보는 그런 책들은 몇 권이나 읽었어요?”
“글쎄. 대중적으로 널리 읽히는, 아까 말한 것처럼 서점에 가면 베스트셀러 코너에 올라갈 법한 책들이라면....... 글쎄, 백여 권 정도 읽지 않았을까?”
“많은 건지 적은 건지 감이 안 오네.”
“사람이 평생 읽은 책 치고는 엄청 적은 거죠. 거의 안 읽은 거지. 글 쓰는 사람에게는 뭐 개미 눈곱 같은 수준이고.”
“그 책만 읽은 건 아니라면서요?”
“그건 그렇죠.”
“모든 책으로 따지면?”
“글쎄. 산출이 가당치도 않겠지만, 글 빼고 책만 따지면 그래도 몇 천권 정도 되지 않을까?”
“뭐가 그렇게 갑자기 뛰어요?”
“학생 때 대여점 턴 것만 서너 개는 되니까. 버젓이 있는 도서관도 그때의 내게는 없는 셈이었거든. 인식과 개념이 닿지 않을 때였어. 그러다 보니 자연히 접하게 되는 책들은 보통 집에 있는 것들과 그 무렵 한창 성행하던 대여점이었어. 그러다 보니 청소년기에는 주로 만화책과 장르 소설을 많이 읽게 되었어.”
“음. 좀.......”
“그래. 그런 표정 지을 만해. 생각나는 순서대로 말했더니 이야기가 좀 뒤죽박죽 꼬인 감이 있네.”
“그치?”
“서사적으로 다시 말해볼게. 나는 어렸을 때부터 뭔가 읽는 것을 좋아했어요. 집에 위인전이랑 동화책 세트가 백 권 가까이 있었는데,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에 걔들을 헤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나요.”
“국민학교. 맞다, 국민학교 세대지?”
“당신은 아니었나?”
“나는 국민학생이었던 적이 없던 것 같은데.”
“내가 5학년 때 바뀌었으니까, 그러네. 당신 입학하는 해네.”
“응, 아무튼.”
“아무튼 그러다가 학교에 들어가면서 중학교까지는 또 한참 책을 안 읽었어. 책을 접할 만한 환경도 많지 않았고, 그때는 또 운동에 미쳐서 하루 종일 뛰어다니기 바빴거든. 그러니 책이라고는 부모님이 동네 서점을 하셨던 친구가 가져오는 책이나, 이발관 만화책이 전부였지.”
“이발관 만화책은 뭐야?”
“그때 우리 동네에는 상가 3층에 이발관이 하나 있었어요. 미용실도 있었을 때인데 내가 굳이 거기로 머리를 자르러 간 이유는, 거기 벽에 온통 만화책들이 꽂혀있었거든. 어린 내게는 말 그대로 보물섬 같은 장소였어.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거기서 머리를 자르고, 그 후에 어머니께서 내 귀를 잡아 집으로 끌고 갈 때까지 몇 시간 동안 만화책을 봤었어. 그러네, 그런 기억이 있네.”
“뭐야, 이야기만 들어보면 70년 대 느낌이 물씬 풍기는데.”
“90년도 중반이니, 고작 이십 년 전 이야기야. 아이스크림이 일이백 원이고 비싼 과자가 오백 원 하던 시절.”
“행복한 시절이네.”
“그치. 천원 들고 상가 일층 분식점에 가면 떡볶이 오백 원과 맛탕 오백 원을 시켜서 배가 터질 때까지 먹을 수 있었던 시절이었으니까. 구슬 두 개가 십 원 하던 그럴 때죠.”
“어우, 몇 살 차이 안 나는데 세대 차이 엄청 나.”
“그때는 시대가 휙휙 바뀌던 시절이었으니까. 286 컴퓨터나 똘기가 알바트로스 타고 광선검 휘두르던 만화 같은 거 모르잖아.”
“무슨 말인지는 못 알아듣겠지만, 이 주제 되게 재밌다.”
“어쩌다 보니 유소년기까지 나오기 시작했네. 아무튼 그래서 책 없이 뛰놀기만 하며 살다가 중학생 때 처음 아파트 단지 상가에 있는 책 대여점이라는 곳을 갔어. 그 전부터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그 무렵 처음 간 것 같아. 여기서 두 번째 쇼크였던 거야. 벽에 붙박인 책장도 모자라서 이중 삼중으로 된 책장에 온갖 책이 꽂혀있는 모습은 중학생인 나한테 엄청 충격이었어. 그래서 그때부터 정말 미친 듯이, 말 그대로 미친 듯이 보기 시작한 것 같아. 만화책부터 시작해서 한 대여점에 있는 모든 만화책을 다 봤을 무렵, 그 옆에 장르 소설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더라고. 그래서 그것들을 읽기 시작했고, 그 무렵 처음으로 ‘글을 쓰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 그래서 장난삼아 끼적이고 반 친구들과 돌려보기도 하고 그랬어.”
“그거 아직도 가지고 있어요?”
“있지만 절대 안 보여줄 거니까 꿈도 꾸지 마요.”
“내가 꼭 보고 만다. 분명 엄청난 흑역사일 거야.”
“아무튼 그래서 그때는 내 하루가 온통 운동과 책뿐이었어.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으니 검도랑 싸이클이 끝나면 오락실에 달려가서 발판 밟는 게임을 몇 시간 동안 하다가 집에 오는 길에 책을 빌려서 밤새 책을 읽는 생활의 반복이었지.”
“그 게임은 뭔지 나도 알겠다.”
“그거 하다가 내가 1년 만에 17kg가 빠지고 13cm가 자랐잖아. 좀 통통하고 보통 키였는데 갑자기 살 빠지고 키 크느라 무릎 다 트고 막 그랬어.”
“그러네. 나도 좀 열심히 할 걸.”
“그 무렵에는 베프랑 하도 그 게임을 많이 해서 오락실 가면 주인아저씨가 오백 원짜리를 한 무더기씩 쥐어주기도 했어. 지금 생각해보면 소위 말하는 바람잡이 같은 거였던 것 같아. 손님 끌라고.”
“무보수 알바 하셨네요.”
“나도 즐겼으니까, 뭐. 아무튼 그 사이클은 그대로 쭉 갔어. 중학생은 고등학생이 되고, 검도와 싸이클이 유도랑 축구로 바뀌었을 뿐이지, 나는 계속 하교를 하면 나머지 하루를 절반으로 나눠서 운동이랑 책만 보면서 살았어. 한 대여점에 있는 모든 책을 다 보면 다른 대여점을 넘어가고, 거기서도 다 보면 또 새로운 대여점으로 넘어가고. 마침 이사도 가면서 여러 군데를 전전했지. 그때는 우리나라 출판 시장도 참 왕성할 때라서, 특히 만화가 그랬지. 가짓수도 주옥같은 작품들도 참 많았던 것 같아. 장르 소설도 그랬지. 그래서 그 생활을 고2때까지 했었어. 하교하고 친구들과 피씨방에 가서 게임 한두 시간을 하고 도장에 가서 운동을 한 후에 학원에 갔지. 학원이 끝나면 10시나 11시 무렵이었는데 그때부터 친구들과 한강에 가서 1시나 2시까지 공을 찼어. 그리고 집에 와서 씻고 책 좀 보다가 자는 거야. 중2부터 고2까지 내 4년 정도는 방금 말한 게 전부야. 그거 외는 아무것도 없었어.”
“근데 왜 고2까지야?”
“그때 첫 연애를 시작했거든. 그러면서 다시 끊듯이 책을 안 봤어.”
“아. 그 다음 해가 첫 번째 시대 시작 해잖아.”
“그렇지. 그래서 다시 몇 년 간은 책에 손도 안 댔던 것 같아. 그러다가 대학교를 갔지. 그리고 자연스럽게 도서관으로 발길이 갔어. 그리고 세 번째 충격이었지. 이발관 사면 책장도 아니고, 대여점 삼중 책장도 아니고,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곳에 책이 가득 찬 풍경은, 응, 이건 풍경이라고 표현을 해야 해. 그 풍경은 정말 충격이었어. 게다가 지금까지 환경 상 접하지 못했던 소설이나 전문서적, 사설 등이 가득한 거야. 사실 첫 번째 시대가 시작되면서 부쩍 소설이나 심리학, 천문학 서적 같은 다른 책들에 더 눈이 갈 때였거든. 그러니 거기 있는 책이 금화로 보였어. 그래서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하루종일 도서관에 처박혀서 책을 봤던 것 같아.”
“어렸을 때부터 대학생 때까지, 어른들 눈에 모범생은 아니었겠다.”
“그렇지. 이때는 운동도 안 했어. 책장과 책장 사이 어느 구석에 찌그러져서 계속 혼자 뭐라 중얼중얼 거릴 때였으니까. 아마 살면서 읽었던 대부분의 소설이나 전문서적은 이 무렵에 읽었던 것 같아. 근데 당신도 이미 들었다시피 그때 나는 참 불안정한 시절이었거든. 반쯤 제정신도 아니었고 좀 미쳐있을 때지. 어렸으니 타인의 사상을 거르는 요령도 몰랐고 자아를 지킬 외부격벽도 단단하지 않았었으니까. 힘든 상황에서 소설이나 에세이 등을 읽으면 위로가 되면서 좋기도 한데, 한편으로는 내가 정말 너무 휩쓸리는 거야. 어떤 책을 읽는지에 따라 마치 조울증처럼 그날 내 상태와 기분이 과하게 왔다 갔다 했어. 일상생활이 안 되어서 괴로울 정도로. 그래서 그 무렵에 막연히, 내가 괜찮아질 때까지 타인의 사상을 되도록 배제하려는 성향이 생긴 거야. 그게 서른이라고 정한 것은 한참 후이지만, 아무튼 그렇게 정한 다음부터 도서관도 잘 가지 않게 되었지. 그러니 읽을 책이 없는 거야. 나는 평생 활자를 읽으며 살아왔었는데. 그래서 그냥 정보지나 번역본, 그리고 내 글처럼, 책이 아니라 글을 보기 시작한 거야.”
“대여점은? 만화는 장르 소설은 영향이 좀 덜하지 않아?”
“대여점은 스무 살 넘고는 안 가기 시작했거든.”
“왜요?”
“대학생 이전의 내 독서에 대한 의식체계는 엄청 간단해. ‘책이다! 읽자! 재밌다!’로 끝. 한 마디로 철저하게 독자의 입장이었던 거야. 그러다가 19살부터 본격적으로 매일매일 글을 쓰기 시작하고, 대학교에 들어가서 도서관에서 이런저런 책을 보기 시작하면서 그 의식체계가 확장되었나봐. 독자뿐만 아니라 작가, 청자뿐만 아니라 화자, 이런 식으로 생각이 상대방에까지 미치는 거야. 그러니 자연히 어떤 의문이 들더라고. ‘대여점 이거 괜찮은 건가?’라고.”
“왜?”
“읽을 책이 없어서 대여점에 가서 꽂힌 책들을 쭉 둘러보고 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대여점은 점주가 책을 사서 그것을 여러 명에게 빌려주면서 그 대여료로 이익을 보는 시스템이잖아. 실제로는 연체료가 알짜배기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그렇지.”
“근데 그때 문득, ‘그 대여이익이 글쓴이에게 돌아갈까?’라는 생각이 드는 거야.”
“안 돌아가겠지.”
“그렇지. 근데 생각해보니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대학 도서관이나 구립 도서관처럼 비영리적인 대여 활동이나 아니면 책을 사서 혼자 보거나 주변과 돌려보는 거야 괜찮겠지. 근데 상업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거잖아. 게다가 그걸로 이익을 독점하는 것은 더더욱 말이 안 되고. 책의 저작권과 판권이 작가와 출판사에게 있다면, 그 책을 이용해서 상업적 이익을 본 것도 저 둘의 것이 아닌가. 대여점주가 출판사와 정식으로 계약을 맺지 않는 이상 이건 이상한 거지.”
“......듣고 보니 그러네. 왜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지?”
“나는 지금도 그것에 대한 확실한 법적 지식은 없으니 무엇이 맞는 건지는 정확히 모르겠어. 다만 대여점이 그만큼 성행했고 지금까지 있는 거 보니 우리나라 법상 문제가 없거나, 혹은 제지할 현행법이 없어서 어쩔 수 없거나 뭐 그렇지 않을까 싶어. 어찌되었든 위법은 아닌가 봐. 근데 내 생각은 그래요. 대여점의 시스템 자체가 어찌 보면 저작권과 판권 침해라고. 물론 생각하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해석인 것 같아. 예를 들어, 착유 기계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기름 짜는 기계를 사와서 방앗간에서 그걸로 사람들에게 기름을 짜주면서 돈을 받잖아. 그렇게 생각해보면 대여점도 문제가 없을 것도 같아. 근데 내 생각은 이건 좀 이상하다 싶은 거야. 그러니 이런 거지. 그 공장이 착유기만 팔고, 그에 아무 조건도 달지 않았으면 그걸로 사와서 기름을 짜서 파는 건 괜찮을 수도 있어. 근데 공장에서 가정용 착유기를 팔면서 상업적 이용을 금지하고, 동시에 가지고 있는 곡물로 기름을 짜서 파는 일과 고객이 가져온 곡물로 기름을 짜주는 일, 이 두 가지 일도 함께 한다면, 개인이 공장의 가정용 착유기를 사서 상업적 이용을 하면 안 되는 게 아닐까. 그럴 거면 처음부터 제한 없는 상업용 착유기를 사야지. 요즘 많이 있는 e-북 대여처럼.”
“좀 헷갈리네.”
“앞서 말했듯 법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그때 난 그랬어. 사실 지금도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고. 물론 대여점으로 떼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이제는 그보다 더 악질인 불법 다운로드 때문에 대여점들도 대부분 망해버렸지만, 그때는 꽤나 성행하고 있었거든. 근데 아무 생각 없이 손쉽게 빌려보다가 어느 날 이건 좀 이상하다 싶더라고.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안 갔어. 찾다보니 책 말고도 읽을거리가 참 많기도 했고.”
“아까 말한 정보지 번역본이나 학술서적 같은 거?”
“그것도 있지만, 그때부터 제일 많이 본 건 역시 내 글이야. 벌써 몇 년 정도 매일 써서 꽤 많은 양이 쌓이기도 했고, 써놓은 것을 보고 또 보고 아주 닳을 때까지 봤으니까. 아까 말했듯 그전까지의 내 인생은 대부분 ‘무엇을 읽는 시간’과 ‘뛰어다니는 시간’이었어. 정靜과 동動이 꽤나 절묘하게 균형 잡혀있었지. 근데 첫 번째 시대가 열리고 나서부터 그 균형이 한쪽으로 확 쏠려버린 거야. 하루 종일 무엇을 읽고 쓰기만 했어. 그리고 ‘무엇을 읽는 시간’중에 대부분은 내 글을 읽는 시간이었지. 지금껏 모든 ‘읽을거리’ 중에 사분의 삼은 넘을 걸. 그게 삶을 차지하는 압도적인 리딩 타임에도 불구하고 본 책이 얼마 없는 이유로 가장 커. 내 글은 책이 아니니까.”
“쓴 글을 다시 보는 일이 그렇게나 많아?”
“완전 많지. 글이라는 게 그렇잖아. 몇 번을 봤어도 다시 보면 또 달라지니까. 게다가 난 또 엄청 토해놓는 사람이고. 써놓은 게 워낙 많아서 무작위로 골라도 같은 것을 자주 뽑지 않으니까, 볼 때마다 새롭지.”
“글을 오래 쓰고 양이 많다는 건 그런 의미로는 좋은 거구나.”
“그냥 좋은 게 아니라 축복 같은 거지.”
“그럼 얼마나 많이 봐요?”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자면, 하루에 컴퓨터를 붙잡고 있는 시간 동안 반절은 글을 보고, 반절은 글을 써요.”
“생각보다 엄청 많네?”
“예를 들어 내가 카페에 앉아서 네 시간 동안 컴퓨터를 붙들고 있으면 두 시간은 써놓은 지난 글을 보고, 두 시간은 새로운 글을 쓰는 거야. 여섯 시간이면 세 시간씩, 여덟 시간이면 네 시간씩이에요. 물론 글을 쓰다보면 그날그날 집중력의 농도나 주제에 따른 탄력도가 다르니까 하루 종일 글만 쓸 때도 있어. 근데 반대로 하나도 안 쓰고 종일 글만 볼 때도 있어요. 그런 걸 전부 합쳐서 평균을 내보면 결국 반반이야. 십년 넘게 글을 써오면서 어느새 그런 식으로 내 프로세스를 설계해놓은 거죠.”
“그 정도면 분명 그러는 이유가 있겠네요?”
“나는 좀 과장되게 말해보면 삶의 깨달음이나 배움의 90%는 내 글에서 얻어요. 이건 남의 도움 없이 나 혼자의 힘으로 자랐다는 말이 아니에요. 내 글은 나에게 있어, 마치 작고 정교한 무늬가 새겨져 있는 엄청나게 큰 오벨리스크 같은 거예요. 내 마음 중심에 떡 하니 박혀서 내 존재를 유지하고, 내 캐릭터를 형성하고, 내 성향을 잡아줘요. 타인과 관계 맺거나 타인의 글을 보면서 가져온 것을 비춰보는 거울이기도 하고, 서로 부딪혀서 상쇄하거나 조합할 근간이 되는 기초물질이기도 해요. 즉, 한 마디로 정리하면 메인 프로세스예요. 밖에서 가져와서 내 안으로 녹여내는 과정 속에서 내 글은 하드웨어가 되고, 모든 것을 관리하는 프로그램이 되고, 그 프로세서를 시작하는 시동키가 되기도 하죠. 글이 생각의 길이자, 흡수의 과정이자, 사유의 방식이자, 사상의 틀이에요. 그리고 결과물 역시 글이죠. 저 모든 것을 결국 글로 남겨놓으니까. 그래서 글을 쓰는 방식도 마찬가지예요. 나라는 주머니가 있으면 입구를 살짝 열어서 오늘 하루를 살면서 새로 얻을 걸 집어넣어. 그리고 흔들고 주무르면서 내용물을 으깨고 섞지. 그 후에 바닥에 확 쏟아내는 거야. 그리고 사진을 찍지. 그 사진이 오늘의 글이야. 그리고 주머니에 다시 다 넣어. 내일이 되면 다시 입구를 열고 새로 얻을 걸 넣어서, 어제까지의 나와 또 섞은 뒤에 쏟아내. 그걸 사진 찍으면 그날의 글이 되는 거야. 계속 이래. 십 년 넘게 하루도 빠짐없이 이 반복이지.”
“뭔가 굉장히 일반적이면서도.......”
“맞아, 일반론이자 동시에 매우 특수성을 가진 개인론인 거야.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그렇게 하는 일반적인 방식이지만, 같은 과정은 하나도 없는 개별적 방법이기도 하죠. 그래서 내게 있어서 내가 써놓은 글은 그 무엇보다 중요해요. 내가 살아온 과정이자 나란 사람이자 내 삶 그 자체거든. 예전에 내가 글을 쓰는 행위가 창작이 아닌 생명유지장치라고 말한 거 기억해요?”
“네.”
“이런 뜻이었어요. 나는 글을 써야 해요. 왜냐하면 나는 내가 써놓은 글을 보면서 나를 알고, 나를 설계하고, 나를 짜 맞추고, 내가 외부와 동조할 수 있도록 조율하고, 외부에서 유입되는 것을 분해하여 버리거나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거니까. 모두가 그런 방식으로 사용하여 살아가고 나 역시 그렇지만, 나는 단지 그 방식이 글일 뿐이에요.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진행하는 데에 있어서, 예전에 써놓은 글을 다시 읽는 것이 절대 빠질 수 없는 매우 중요한 과정인 거지. 근데 문제는 읽을 글이 얼마 없을 때야. 무엇을 읽고 나면 그것을 소화하는데 시간이 필요한데, 그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그 글을 다시 보게 되면 거기에 더 배울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써놓은 것을 한참 뒤에 다시 읽는다는 건 쓸 당시는 몰랐던 것, 감춰져있던 것, 외면했던 것, 새로 깨닫게 되는 것들을 새로 배우고, 그 배움으로 외부입력도 해석하는 과정이잖아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소화가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만 지나가길 기다릴 수도 없죠. 그러니 그것은 그것대로 소화되라고 놔두고 나는 또 다른 글을 읽는 거예요. 오늘은 A, 내일은 B, 그 다음 날은 C, 이런 식으로 읽다 보면 시간이 지나 순차적으로 소화가 되는 거야. 그래서 A가 소화되었을 때쯤에 나는 J, K 정도를 읽고 있겠지. 그렇게 계속 굴러가다 보면 언젠가 이미 소화가 끝난 A를 다시 읽게 돼. 그럼 첫 번째 과정에서 얻지 못했던 것을 두 번째 과정에서 새롭게 얻게 되는 거지. 내가 내 글에서 세상과 삶을 배운다는 것 이런 과정이에요. 근데 내가 써놓은 글이 충분하지 않다면 나는 읽은 것을 충분히 소화시키기도 전에 더 읽을 게 없어져버리는 거야. 그러면 이전에 읽은 게 채 소화가 되기도 전에 또 같은 글을 읽게 되거나, 혹은 아무것도 읽지 못하고 시간을 보내야 되지. 쓰고 읽고 배우고 소화하는 일련의 과정에 공백이 생기는 거야. 그럼 그 공백은 지금껏 짜임새 있게 굴러오던 로테이션 시스템을 흔들어 놓고, 심하면 결국 모든 공정마저 멈춰버리게 해요.”
“이거... 다른 책을 읽을 수 있는 보통 사람에게는 문제가 아닌데. 당시 도령에게만 생기는 문제였구나.”
“맞아. 그때 내가 마음 편히 읽을 수 있는 글이라고는 내 글뿐이었으니까. 그렇기 때문이라도 나는 아주 많은 글이 있어야 해요. 하나씩 읽기 시작해서 내가 자랄 만큼 긴 공백 동안 처음 봤던 그 글을 보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아주 많은 글이. 더구나 어떤 것들은 더 이상 깨달음을 얻을 수 없게 되는 글도 있죠. 물론 깨달음을 얻지 못할 글은 없어요. 정확히 표현하면 다음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주기가 어마어마하게 길어진 글들이 생겨. 첫 번째나 두 번째 다시 봤을 때는 거기서 깨달음을 얻는데 금방이었다면, 세 번째는 아주 먼 시간, 나이를 먹고 세월이 쌓일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나야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글들이 점점 생겨나는 거야. 나 혼자서 한정된 시간 안에 너무 많은 글을 쏟아내기에 벌어지는 부작용 같은 일이에요. 엄밀히 말하면 부작용이 아닌 자연스러운 일인데, 뭐든 그렇듯 과하면 뒤틀어지는 게 있잖아. 그래서 이 자연스러운 것이 부작용이라고 할 만큼 부풀어 오르는 거야. 어쨌든 그런 누락까지 염두에 둬야 하니까, 그래서 나는 어쩌면 꽤 강박적인 자세로 매일 매일 쫓기듯이 글을 쓰는 부분도 있어요.”
“...듣다 보니 평소 궁금했던 것들이 하나둘 씩 맞춰져간다. 맞아, 도령 글 쓰는 거 보면 약간의 강박증 같은 느낌도 느꼈어요. 물론 좋아하고 즐겨서 글을 쓰는 것은 맞지만, 한편으로는 초조하게 쫓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거든.”
“맞아요, 방금 말한 게 그 이유지. 정리하자면 내 삶의 방식도, 과정도, 그 기록마저도 글로 맞춰져있어요. 내 거의 모든 프로세스는 글을 통해서이고, 내가 자라는 방법은 내 글과 타인의 무엇을 비교하면서 얻게 되는 것을 소화하는 식이고, 그 방법의 시동키는 예전 글을 다시 읽는 것이고. 그렇기에 나는 내가 쓴 글이 아주 많이 필요하고, 그래서 늘 아등바등 글을 쓰죠. 한 독립개체의 인격형성에 가장 중요한 십대 후반부터 삼십대 초반까지, 그것도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들을 나는 늘 글을 쓰면서 살았어. 매일 같이 하루에 몇 시간씩 글을 쓰고 써놓은 것을 보다 보니, 이 나이쯤 되어서 새삼 나를 돌아봤을 때 나는 이미 그런 사람이 되어있더라. 그러니 사람이 사는 이유가 하나가 아니듯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역시 하나는 아닌 거야. 물론 의부감이나 강박감만으로는 하지 못해요. 다행히 그런 것보다 당신이 말한 즐겁고 기꺼운 마음이 더 크니까, 압박이 있어도 무마하며 계속 글을 쓸 수 있는 거지.”
“......”
“왜요?”
“참 아등바등 살았구나, 도령.”
“누구나 그래요. 이만큼 아등바등 살지 않는 사람은 한 번도 못 봤어.”
“나도 그럴까?”
“당연한 소리 아닌가.”
“맞아. 내가 생각해도 나 역시 그리 순탄하게 살아오지는 못했어. 내 나름대로 아등바등....... 맞아, 그렇게 살아왔지. 근데.”
“근데?”
“그래서 나는 어떤 식으로 살아왔냐고 누가 물으면, 도령처럼 대답할 자신이 없다. 도령 말대로 나 역시 도령만큼, 남들만큼 열심히 아등바등 살아왔을 텐데. 스스로 물으면 나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싶어. 도령이 지금 여기서 눈을 반짝이면서 ‘나는 글을 통해 이렇게 살았어요’라고 말하는데,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하지. 분명 열심히 살아왔지만, ‘열심히 살아왔다’라는 말 말고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거면 충분하지 않나. 열심히 살아왔다고 스스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면.”
“그렇겠지. 근데 어떻게 열심히 살아왔는지, 나의 방식은 아직 찾지 못한 것 같아. 그게 아쉬워.”
“......”
“내가 도령 나이가 되면 그럴까요? 지금 도령처럼, 나는 이런 사람이고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열심히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게 될까요?”
“그럴 수 있어요. 굳이 몇 년 뒤가 아닌 지금이라도.”
“그렇게 말할 것 같았어. 근데 솔직히 나는 자신이 없어. 지금도 그리고 그때도 나는, ‘열심히’ 말고는 아무 말도 못할 것 같아.”
“아이고, 내가 우울하게 만들었나. 생각이 자꾸 부정적으로 쏠려가는 것 같네.”
“...그냥. 그때 할 수 있으면 지금도 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도령은 분명 지금 내 나이에도 방금처럼 말할 수 있었을 걸.”
“그건 맞아. 근데 지금 당신이 잘하고 있는 많은 것들을 그때 나는 못했지.”
“......”
“......어, 음.”
“나 리필.......”
“응?”
“나 지금 우울해졌으니까 휘핑 잔뜩 올라간 카페 모카로 리필.......”
“리필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리필로 모카를 주진 않을 것 같은데.”
“도령 쿠폰으로 리필.......”
“여기 처음 왔는데 쿠폰이 어디 있어.”
“여기 쿠폰 말고 도령 쿠폰.......”
“알았어, 알았어요. 생크림 산처럼 올린 모카 대령할 테니 그 이상한 표정 좀 치워요. 웃겨 죽겠네.”
“와....... 대따 신난다.......”
“아 그만하라고. 고장난 인공지능 보는 것 같으니까. ㅋㅋ”
<별첨>
“난 그게 참 신기하면서 좋았어.”
“뭐가?”
“책 한 권 들고, 서로 한 페이지씩 번갈아 읽어주는 거.”
“아.”
“당신한테 처음 배웠거든. 어려운 것도 아닌데 나는 지금껏 한 번도 그래봐야겠다는 발상도 못했어. 또 그때 내게는 그런 행위가 엄청 위안이 되었고.”
“난 처음 그거 제의할 때 좀 떨었는데.”
“왜? 내 목소리가 너무 중후하고 멋있어서?”
“뭐래. 그냥 이상한 애라고 생각할까봐.”
“난 너무 좋았는데.”
“좋아했으니 다행이지, 취향 안 맞는 사람이면 ‘뭐야? 이 여자’ 그러지 않았을까.”
“당신 같은 여우가 그 정도 견적도 미리 안 내고 말했을까.”
“야! 맞는 말이지만 열 받는다!”
“어쨌든 평소에는 안 그런데, 당신 책 읽는 목소리 들으면 그렇게 졸린다. 그래서 당신 읽는 거 들으면서 어느새 반쯤 졸고 있으면, 당신은 또 용케 알고 페이지 넘겨서 그대로 쭉 읽어줘. 그러면 까무룩 하는 와중에도 그 관심이랑 애정이 너무 고마운 거야. 누가 날 관심 있게 지켜봐주는구나. 지금도 누군가에게 애정을 받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 나 마음 놓고 되게 안심하면서 잠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