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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한얼 Dec 30. 2024

[그데담 064] 무표정이 가진 표정

 [3/4]






 “음.”


 “왜? 뭐?”


 “음!”


 “닦아달라고?”


 “음음! 음음음!”


 “펭귄도 아니고, 알았어. 아, 좀. 가만히 있어야 닦아주지.”


 “악!”


 “버둥거리니까 코에 묻었잖아!”


 “그러니까 한 번에 멋있게 슥 하고 닦아줘야지!”


 “물티슈가 가방 맨 밑에 있었어.”


 “손가락 뒀다 뭐 하냐, 이 아저씨야.”


 “나 참, 무슨 저질 드라마를 보고 온 거야.”


 “아무튼 멋대가리 없기는. 근데 왜 쳐다봤어요?”


 “응?”


 “아까. 뭔가 할 말 있었던 거 아니에요?”


 “미안한데, 지금 무슨 말인지 전혀 못 알아듣고 있어요.”


 “아까 나 책 볼 때, 나 한참 쳐다봤잖아. 그러다 책 얘기 하게 됐고.”


 “아. 그걸 또 보고 있었어?”


 “응. 그 와중에 또 보고 있었어. 뭐 할 말 있었던 거 아니에요?”


 “그건 아니에요.”


 “그럼?”


 “...그냥?”


 “대답이 뭐 이래.”


 “...알다시피 내가 잘 웃고 다니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뭔가 이야기가 길어질 느낌이다!”


 “오, 일 년쯤 보니까 이제 감이 좋아졌는데.”


 “나 촉 완전 좋아.”


 “길진 않을 것 같은데, 하지 말까요?”


 “왜 이래요, 궁금한 거 못 참는 거 알면서. 아무튼 도령이 잘 안 웃나?”


 “웃기야 웃지만 내 표정은 무표정이나 무심한 표정이 주를 이루니까.”


 “...그렇긴 하지.”


 “그래서 나는 환하고 밝게 잘 웃는 사람이 좋더라고. 웃으면 반짝반짝하고 빛이 나는 것 같은 사람 있잖아.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가봐. 그래서 나랑 비슷한 사람을 보면 좀 불편해. 상대가 뚱한 표정이거나 뭔가 불만인 얼굴이 주를 이루는 사람이면 그만큼 부담스러워.”


 “...내 생각엔, 도령은 참 당연한 소리를 안 당연한 것처럼 잘해.”


 “응?”


 “보편적인 요소를 개인적인 부분으로 둔갑하거나 포장을 잘 한다는 말이에요. 도령 버릇 중 하나야. 아니, 누구나 환하고 밝게 잘 웃는 사람 좋아해요. 도령만 그런 게 아니라.”


 “...아?”


 “남자고 여자고 예쁘게 웃는 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러네. 맞아, 내가 좀 그런 게 있어. 나도 비주류이고 싶은 주류인가 봐.”


 “그것까지는 모르겠는데. 그리고 도령부터 무표정이 많은데 무표정이 많은 사람을 싫어하면 안 되지 않아? 도령 말대로 상대에게 원하는 것이 있으면 스스로 먼저 행한다며? 그럼 도령이 못하는 것을 상대에게 바랄 수도 없잖아. 환한 사람을 원하면 도령도 환하게 웃어야지.”


 “......”


 “아니야?”


 “...외통수네. 내 평소 지론과 모순인 건 맞아요. 근데 머리는 알아도 마음의 호불호를 조율하는 게 쉽지가....... 아니다, 이건 취소.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을 내가 하고 있었네. 맞아요, 인정. 이건 내가 틀린 부분이다.”


 “아니까 다행이네.”


 “와. 간만에 찰지게 까였네. 근데 대꾸할 말이 전혀 없으니까 웃음밖에 안 나온다.”


 “내가 사람을 볼 때 가장 호감이 드는 순간이 언제인지 알아요?”


 “언젠데?”


 “변명 안 하고 그냥 딱 인정할 때야. 나도 실수 많이 하니까 변명하고 싶은 마음 왜 몰라. 억울할 때도 있고, 남이나 상황 탓도 하고 싶지. 그래도 오해가 아닌 이상 되도록 인정하고 사과하려고 노력하는데, 사실 잘 안 돼.”


 “맞아, 그런 거 알면서도 하기 참 어렵지.”


 “예전에는 진짜 못했어. 나는 반대로 오해거나 억울할 때마저도 참는 일이 많았거든. 처음에는 그냥 내가 참고 욕 좀 먹으면 다 원만하게 돌아갈 줄 알았어. 나 억울한 것도 나중에는 전부 알아서 밝혀질 줄 알았고. 물론 당황하면 머리가 하얘지고 말문이 막히는 탓도 있고, 쉽게 포기하는 버릇 탓도 있었을 거야. 그래서 그때는 참....... 지금 생각해보면 안 그래도 되는 일까지 당하면서 살았어. 그러다 도령 만나면서부터 하도 훈련을 해서 그런지 요즘에는 훨씬 나아졌지만, 또 중간이 참 어렵잖아. 이제는 그냥 말끔하게 인정하는 게 잘 안 되더라. 그래서 내용만 달라졌을 뿐, 난 여전히 잘 못해. 변명하지 않으면서 오해도 받지 않는 중간이 참 어려워. 그래서 이거 못 하는 사람 진짜 많아. 또 사회생활 하다보면 오해를 받아도 참는 사람보다 실수에 변명을 하는 사람이 월등히 많고. 이미 누가 봐도 딱 견적 나오는데 어떻게든 피해가려고 요리조리 빼고, 버둥거리면서 핑계 대는 꼴을 보면 진짜 밥맛이야.”


 “잘한 건 아니지만 잘못한 것도 아니라는, 뭐 그런 식?”


 “그건 밥맛이 아니라 그냥 역겨운 거고. 이런 건 정말 나이와 상관없는 거 같아. 안 그러는 애들은 어려도 안 그러고, 그러는 사람들은 나이 먹고도 그래. 가정교육의 문제일까?”


 “글쎄, 뭐 하나로 딱 잘라서 말할 수는 없겠지.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버거운 상황을 피하고 싶은 마음과, 스스로 합리화하는 것으로 도망가려는 본능. 이 두 가지를 자신의 의지로 얼마나 억누를 수 있는 지라고 생각해.”


 “그렇겠지? 교육을 받으며 자랐어도 나도 아직 잘 못하니까. 근데 도령은 이 부분이 진짜 칼이야. 그건 진짜 멋있어요.”


 “글에도 적었지만, 이건 멋있는 게 아니라 당연한 거죠.”


 “아무튼, 내 마음이에요. 그리고 방금 도령이 틀린 부분이라 그랬는데 내 생각은 좀 달라.”


 “음? 이 부분은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거 같은데?”


 “그 추론과정이 아니라 그 전의 전제 자체가 틀렸어. 난 도령 무표정하다고 생각 안 하는데. 물론 하루 중에 무표정하게 있을 때가 가장 많긴 하지. 근데 그러지 말아야할 때 그러는 경우는 거의 없잖아. 내가 보는 도령은 잘 웃고, 말도 잘 하고, 대꾸도 잘 하고, 분위기도 잘 맞추고, 배려도 잘 하고 그래. 다른 사람 만나는 건 거의 못 봤지만 그때도 비슷하겠지. 물론 가끔 욱하는 거랑, 한 번 하면 끝장을 보려는 거랑, 장난기 심한 거랑, 자주 우울해지는 거랑, 집요할 정도로 논리와 합리에 집착하는 거랑, 생각이 다르면 절대 양보 안 하는 거랑, 여자고 나발이고 성질나면 씹어 먹으려고 하는 거랑.......”


 “저기요, 칭찬할 건지 깔 건지 색깔 확실히 해요.”


 “뭐....... 그런 것들만 빼면 대인관계에서 별로 흠 잡을 때가 없어요.”


 “그거 다 빼면 대인관계에 뭐가 남아, 이 여자야!”


 “어쩌겠어, 도령이 그런 사람인데. 그래도 난 한 번도 도령 무표정이 싫은 적은 없었어.”


 “방금 아주 철썩 같이 찰떡처럼 까더니, 뭐야. 이젠 약이야? 못난 놈 떡 하나 더 주는 거야?”


 “약도 아니고 떡도 아니고 그냥 내 생각이에요. 도령은 그냥 무표정 자체가 싫은 거야? 아무 이유 없이 그냥 그 표정 자체가 싫어?”


 “...아니, 그건 아닌데.”


 “그렇지? 방금 도령 말은 때와 장소 안 가리고 무표정하게 반응 없거나 뚱하게 대꾸 하거나 그런 걸 말한 거잖아. 무표정 자체가 싫은 게 아니라, 상황에 맞지 않은 표정이 불러오는 감정들을 싫어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겠지?”


 “거봐. 그런 거잖아. 사람이 혼자 가만히 있으면 보통 무표정하지. 그게 문제가 아니라 안 그래야할 상황에서도 그러니 그게 싫은 거지.”


 “...그렇지.”


 “그래. 근데 도령 안 그렇다고. 무표정이면 실례인 상황에서는 그렇게 안 해. 전제부터 틀렸으니 당연히 결론도 틀린 거지. 그러니 도령은 밝고 뽀얀 사람 좋아해도 돼요.”


 “...듣다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일단 내 칭찬 같으니 덮어두고 긍정하고 싶기도 하고, 막 그러네.”


 “그러니 꽃처럼 화사하게 웃는 나를 만나고 있는 거지. 다른 건 됐고 욱하는 성격만 좀 고쳐요. 스트레스 거르는 거랑. 이상이 너무 높으면 스스로만 피곤하잖아. 물론 옆에 붙어있는 나도 피곤하고.”


 “꽃처럼 화사만 빼고 다 인정.”


 “이 아저씨가 이 와중에 깨알 같이 도발하네.”


 “알았어, 다 인정.”


 “그리고 모든 것을 조목조목 나누고 따지고 하는 버릇도 좀. 어지간하면 도령 말이 맞고, 정석인 방법인 건 알아요. 아는데, 그래도 여자는 가끔 그냥 덮어주고 모른 척 적당히 넘어가주길 원할 때가 있단 말이야. 아, 하긴. 이건 여자 남자 상관없이 누구나 그렇구나.”


 “음.”


 “아무튼. 근데 도령은 모든 것을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하고, 이치와 합리에 맞춰 딱딱 해석하고 나누고, 그렇게 나온 결론을 모두 정리해서 서로 합의하려고 하잖아. 그게 옳은 거고 장기적으로 봐서 좋은 방법인 것을 알아도 가끔은 버겁단 말이야. 원리원칙이 지상과제인 기계인간 같을 때가 있어.”


 “...미안해요.”


 “그리고.......”


 “......”


 “표정 봐. ㅋㅋ 진짜 웃겨. 순간 부장한테 까일 때 내 모습인줄 알았네.”


 “실은 성토대회였던 거지? 오늘이 미뤄놨던 불만 보따리를 작정하고 풀 타이밍이었던 거 맞지?”


 “뭐야, 언제는 담아두지 말고 바로바로 말하라면서요?”


 “맞아요, 그랬었죠. 제가 제 무덤을 파고 누웠네요. 거기 흙으로 된 이불 좀 덮어주시겠어요?”


 “아, 하다 보니 재밌네. ㅋㅋ 그래도 뭐, 오늘은 이 정도만 할까. 어쨌든 난 남들보다 포용력이 아주 넓은 여자니까. 도령이 가진 정순환 정도는 감당할 수 있는 여자이기도 하고. 그러니 미안한 건 아니에요.”


 “이보세요. 성토 보따리를 풀든, 자화자찬 하든, 날 까든 셋 중 하나만 하세요. 오늘따라 체제 변환이 엄청 빠르네.”


 “근데 이거 되게 재밌네. 중독되겠어.”


 “평소 당신의 기분을 이렇게라도 알게 해줘서 참 고마운 역지사지네요.”


 “웃어요, 웃어. 지금은 웃을 타이밍이야.”


 “당신도 알겠지만 난 서른이 넘어도 아직도 웃는 게 어색해.”


 “맞아, 도령 웃을 땐 입 꼬리 양쪽이 어설픈 비대칭으로 올라가. 그게 또 그렇게 웃긴다.”


 “그래, 털어라. 탈탈 털어라. 아까는 내가 털었으니 이제는 당신 차례지.”


 “자리 옮기길 잘했네. 이 자리에선 누구라도 차지게 깔 수 있을 것 같아.”


 “아이고, 간만에 까였더니 급격히 배가 고프다.”


 “배고픈 게 아니라 속이 쓰린 거겠지. ㅋㅋ”


 “그냥 넘어가시죠. 근데 슬슬 밥 먹을 때도 됐어. 배 안 고파요?”


 “나도 슬슬 밥 생각나긴 하네.”


 “근처에서 먹고 갈까?”


 “그냥 서울 가서 먹을래. 근처에서 먹으면 다시 이리로 오고 싶을 것 같아.”


 “그래요, 그럼. 먼저 나가 있어요.”


 “여긴 내가. 시동 걸어놔요.”








 “해지니 꽤 쌀쌀하네. 저녁 뭐 먹지?”


 “......”


 “왜 그렇게 봐요?”


 “당신은 잘 안 웃어도 돼.”


 “왜?”


 “남들이 말이나 표정으로 하는 거, 도령은 전부 눈으로 하고 있거든.”


 “...내가 스킨십을 좋아해서 그런가.”


 “아, 맞아. 아이컨텍이 유일한 비접촉 스킨십이라고 그랬지? 도령 말고 다른 사람한테 들은 줄 알았네.”


 “남자?”


 “여기서 노코멘트 하면 본격적으로 열 받겠지?”


 “나 이미 본격적인데.”


 “나 참. 다른 남자랑 말도 못하나.”


 “그래서 다른 남자렷다? 누군데?”


 “아니거든! 눈 맞춤이 스킨십이네 아니네, 누가 그런 걸 따져. 어떤 멍충이 아저씨 말고는 그런 사람 없네요.”


 “누가 뭐래. 그런 말 하는 사람 있으면 친해지고 싶어서 물어본 거지. 아쉽게 됐네.”


 “눈앞에 있었으면 씹어 먹을 기세로 퍽이나.”


 “...아무튼 내 눈에 티가 많이 나는 편이야?”


 “어지간한 건 다 눈빛으로 나와. 이쯤 되니 이제 눈만 보면 도령이 무슨 상태인지 알겠더라고.”


 “내가 원래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이 더 많긴 해. 언어는 주로 구색이나 보조 역할로 쓰고.”


 “그래서 오히려 초반에는 말이나 표정 때문에 많이 속았지. 아무튼 겁만 많아 가지고. ‘이제 그만 가면 안 돼요? 내 옆에서’ 이런 소리나 하고 있고. ㅋㅋ”


 “거, 흑역사는 건들지 맙시다. 서로 이불킥은 노터치 해줘야지.”


 “ㅋㅋㅋㅋ ‘미안해서 같이 못 있겠어요’ 이것도 있었지. 참나, 중학생이냐고.”


 “으악! 진짜! 이 여자 아주 재미 붙였네.”


 “아, 그만 놀려야지. 또 도망갈라.”


 “차문 안 열어주고 싶다.”


 “쫄보라서 두고 가는 척도 못하면서.”


 “위험하니까 그런 거지!”


 “그래야 돼. 난 시늉이라도 두고 가는 척하면 엄청 상처 받으니까.”


 “얼른 타. 오늘 당신 입은 먹을 걸 넣어줘야 잠잠해지겠어.”


 “아!”


 “또 왜?”


 “근데 갑자기 표정 얘기는 왜 나온 거예요?”


 “몰라. 말해주기 싫어졌어.”


 “가면서 성토대회 다시 열까?”


 “아니, 아니!”


 “그럼 빨리 말해.”


 “그냥.”


 “서두 빼고.”


 “...문득 다 다르구나 싶어서.”


 “뭐가?”


 “같은 무표정이라도 여러 무표정이 있잖아요. 그냥 무표정이 있고, 참 미워 보이는 무표정도 있고, 그리고 참 예뻐 보이는 무표정도 있고.”


 “그렇지. 근데?”


 “...뭐, 그냥 그렇다고.”


 “뭔 소리래. 왜 말을 하다 말아?”


 “몰라. 벨트나 매요.”


 “그게 끝이에요? 앞의 말이랑 연결이 안 되는데.”


 “아, 몰라!”


 “뭐야, 갑자기 왜 화를 내요?”


 “당신이 멍청해서 화가 난다.”


 “...지금 싸우자는 거지? 그치?”


 “내 정순환이야. 감당해.”












 <별첨>


 “아니 언제 그런 말을 들어봤어야 짐작이라도 하지.”


 “그래, 그래.”


 “아니 저런 서두면 평소처럼 뒤에 뭔가 말이 길게 나올 줄 알고 팝콘 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다 마니까 중간에 끊은 줄 안 거지. 내가 멍청해서 못 알아들은 게 아니라니까.”


 “그럼, 그럼.”


 “한 번만 대답해. 아니, 대답도 하지 마.”


 “괜찮아, ‘왼손만 추워요’라고 해도 못 알아듣는 사람 많아.”


 “......뭔 소린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 욕인 건 알겠다.”


 “아니야, 우리 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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