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올 때마다 나는 늘 같은 자리를 찾아가 조용히 짐을 푼다신기하게도 내가 오는 날엔 그 자리가 항상 비어 있었다마치 오랫동안 나를 기다려온 듯, 내가 오면 반가운 마음에 자리가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어서 와"라며 손짓하는 것 같은 편안함마저 느꼈다
사람이 편안함을 느끼면 자연스레 그에게 끌리고 더 친해지고 싶어 지듯, 이 공간 역시 나에게 그런 느낌을 주었다 매번 이곳에 앉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익숙한 공간이 주는 안정감 덕분에, 이 자리에 앉으면 다른 불편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곳에 가면 나는 무의식적으로 가방에서 짐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아이 간식, 손수건, 공책, 세면도구, 병원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하나하나 꺼내 책상 위에 정갈하게 정리해 두었다 마치 이곳이 내 일상처럼 편안하고 익숙한 공간인 것처럼 편안함을 마음껏 누렸다
병원에 올 때마다 반복적으로 이뤄지던 일인데 이젠 거의 무의식에 가깝게 진행되는 일이 되었다 돌아보니, 지난 5년 이 병원에서의 삶은 매번 똑같아 보였지만 사실 매번 새로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지루하고 의미 없는 삶일 수도, 반대로 새로운 선물 혹은 곧 일어날 기적을 만나기 위한 예행연습과도 같은 날이었다
꽤 긴 시간 동안 이곳에 머무는 의미를 찾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예행연습을 해온 것 같다 물론 나보다는 아내와 기쁨 이에게 더욱 해당되는 말이겠지만, 이곳에 있는 동안 하루를 어떤 의미로 보낼지에 대해 매번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병원은 아이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라는 사실을 항시 염두하고 살았다 동시에 이 일을 위해 모두가 숭고한 일을 하는 공간으로서 병원 관계자 모두에게 의식적으로 감사하려 했다 그렇게 의식하고 생각할 때마다 더욱 분명한 감사 가운데 병원 생활을 진행해 나갈 수 있었다 의사, 치료사 선생님, 의료 시설과 장비 모두가 그 일을 위해 하나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을 실제적인 삶의 경험으로 배우게 되었다
이렇게 좋은 여건 가운데 치료받을 수 있는 의료체계가 수립되어 있는 나라에 사는 것도 감사했다 이 숭고한 일에 헌신한 선생님들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았다 때로는 입술로 직접 감사를 표현하고 어느 날에는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감사의 마음을 밝은 미소로 바꿔 표현하기도 했다 그 모든 시간 가운데 감사한 순간이 참 많았다
치료가 더뎌 아무리 보아도 무의미해 보이는 시간일지언정, 반복적으로 치료 시간에 충실히 임하다 보면 결국 긍정적인 변화가 찾아올 수 있다는 걸 실제 경험으로 배웠다 기쁨 이는 걷지도 못하고 제대로 볼 수도 없을 수 있다 했는데 결국 느리고 더딘 치료 과정을 견딘 덕분에 기적과 같은 삶을 지금 살아가고 있다
곁에 있는 수십 명에 달하는 아이들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아무리 더디고 오래 걸려도 지금 보다는 내일이 더 희망적일 거라 믿는 부모님들의 기대가 하나씩 현실로 이뤄질 거라 믿는다 그 아이들 모두가 치료실에서 각자의 선생님들과 함께 꾸준히 치료받고 돌봄 받는 모습을 지켜보는 시간에 나는 아이들을 위해 자그마한 소리로 기도를 드린다 기쁨 이에게 나타나고 있는 기적이 우리 친구들에게도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며..
다들 그간 어떤 사정들이 있었을까? 아이마다 아픈 곳이 모두 다르고, 심한 정도도 다 다르다 걸을 수 있는 아이, 걷지만 말을 할 수 없는 아이, 말을 하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 아이, 걷지도 심지어 앉지도 못하는 아이,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있어야 하는 아이, 어떤 아이는 누워 있는 것에 더해 산소호흡기 마저 평생 끼고 살아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
다들 너무 아픈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그들 모두 저마다 괴로운 시간을 모두 힘들게 통과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럼에도 자기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 개별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모두가 힘든하루를 같이 이겨내는 모습도 보인다 서로가 서로에게 덕담을 건네고 이제 곧 좋아질 거야 따뜻한 격려 한마디를 나누는 모습은 참 정겹고 아름답다 정이 많은 할머님들, 그 모습을 곁에서 보고 배우며 세상 살아가는 지혜를 여전히 얻고 있는 어머님들, 그 사랑 아래 오늘도 열심히 재활 치료를 받고 있는 아이들 모두가 너무나 소중하고 하나같이 아름다워 보인다
곁에 가서 인사하고 덕담 한마디 건네고 싶지만 자연스럽게 그런 따뜻한 말들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조용히 기다린다 아픈 아이들과 부모님들이 이 지난한 시간 가운데 빠른 회복을 경험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기도하는 것으로 지금 전하고 싶은 따뜻한 마음을 대신한다 그리고 이렇게 나마 글로 그 마음을 표현한다
아이 치료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책상 위에 잠시 엎드려 있는 어머님이 보인다 그 옆에는 치료 중간 쉬는 시간에 아이에게 먹일 간식을 챙기느라 이곳저곳을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는 어머님도 있다 아이가 치료를 받는 짤막한 30분 사이에 마트 장을 보고 오는 부지런한 어머니도 계시고 매달 수백만 원에 달하는 병원비를 해결하기 위해 병원에 와서도 짬짬이 일 하는 부모님도 보인다
다양한 상황 속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어려움을 극복해 가는 훌륭한 부모님들 면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깨달음과 배움을 얻고 매번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기쁨이>
그 가운데 모든 치료 순서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기쁨이 모습을 본다 통증이 따라오는 물리치료를 하고 싶지 않지만 그럼에도 기쁨 이는 병원에 와야 하는 이유를 정확히 알고 물리치료를 받는다 이곳에서 받는 치료가 자기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칭얼거리지만 순순히 그 치료를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인다
그는 어느새 병원에 오면 친한 이모들, 선생님들 사이에 들어가 거침없이 자신의 친근한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아이가 되었다 이모 형 동생 여럿이 함께 모여 있는 방 한복판으로 들어가, 자신이 좋아하는 이모 앞에서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이것저것 질문하는 아이를 잠자코 보고 있노라면 곧 이런 소리가 들려온다 "이모 이건 뭐예요? 이건 왜 그렇게 해야 하는 거예요? 왜 그런 거예요? 이렇게 해도 되잖아요? "
자기 생각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이 세상에 모든 역사, 문화, 예술은 모두 표현하는 행위를 통해 세상에 자기 존재를 드러내왔다 문명을 발전시킨 동인은 무엇이든 표현하고 싶은 욕구에서 출발했다 기쁨 이가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아이가 되어 자신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사회와 국가, 인류를 사랑하는 어른으로 성장하길 바란다 혹여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으면 어떡하나 라는 걱정하지 않고 스스럼없이 자기 생각을 자신 있게 표현하는 용기를 가진 어른으로 자라가길 바란다
표현되지 않는 사람 마음을 알 길은 없다 드러나지 않는 속마음은 애초에 추적조차 불가능하다 내 마음이 아프면 아프다 말하고 내 마음이 기쁘면 기쁘다 말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재활 병원 치료를 받고 있는 30만 명에 달하는 아이들이 모두 좋은 환경 속에서 치료를 받고, 최대한 건강을 회복하여 자기 자신의 꿈과 희망을 위해 도전하고 회복되는 미래가 속히 오면 좋겠다 더불어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 이웃들에 관심을 가지고 각자가 할 수 있는 행동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서로가 기도이고 꽃이다 라는 사실을 가슴에 품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