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봄의 시작을 알리는 아지랑이가 사방에 하얗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차가운 밤이 지나가고 새 아침이 환하게 밝아지려던 순간이었다 세상은 겨우내 얼어붙어있던 차가움을 깨고 이미 파다하게 퍼진 복사꽃 향내로 여기저기 은은한 향기를 피어내고 있었다. 이따금 뒷동산을 함께 거니는 어린아이들은 달콤하고 은은한 향내를 흠뻑 마신 듯 한껏 부풀어 올라 서로의 얼굴을 보며 깔깔대기 바빴다. 마치 먼 미래의 기쁨 이처럼 아이들은 순진무구한 얼굴빛으로 그렇게 서로를 보며 환한 미소를 아낌없이 주고받았다. 그 안에는 정이 들어가 있었다. 서로를 향한 따뜻한 정이 물 흐르듯 오가는 모습이었다.
모두의 마음에 좋은 계절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있었다. 봄의 기운은 그렇게 거대한 대지를 환하게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날 봄은 유난히 따사로웠다. 완연한 봄내음이 바람을 타고 이곳저곳으로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는 통에 다들 꽃구경 가고 싶은 기대감에 온몸이 들썩거렸다. 가정마다 꽃구경을 가야 한다며 다들 여행 계획을 세우기 바빴다. 며칠 전 식목일을 지난 전국 각지에는 어린순같이 조그마한 아기 나무가 곳곳에 자기 모습을 보란 듯 내비쳤다.
까마득한 지구 위에서 내려다본 대한민국은 푸르고 푸른 계절을 초록색으로 담아내고 있었다. 제주에서 올라온 바람을 타고 그 생명의 숨결이 가로수길을 채우고, 덕수궁 돌담길을 지났다. 그렇게 그 바람은 다시 북쪽으로 내달렸다. 긴 겨울을 보낸 대지는 마침내 기지개를 쫘악 켜며 비밀로 간직하던 하나의 기쁜 소식을 세상 가운데 보낼 준비를 이내 마쳤다.
그 순간 이제 곧 맛의 향연이 펼쳐진다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모두의 군침을 돋우는 부드럽게 녹은 마시멜로우와 물같이 흐르는 초콜릿의 웅장한 연합이 콧등을 스쳤다. 처음 들어보는 신기한 맛의 파이 하나가 이제 세상에 막 나온다는 소식이 어디선가 다시 들려왔다.
50년 전 패키지 원형
따르르릉~ 따르르릉
동양제과(현 오리온) 홍보팀 담당자의 두 손이 더욱 분주해지고 있었다. 여러 신문사에서 전화가 물밀듯이 밀려 들어오고 있던 찰나였기 때문이었다. 손때 묻은 노란 전화 번호부 낱장을 침 묻힌 손끝으로 부지런히 넘기며 이제 곧 시장에 나오게 될 제품 하나하나를 매스컴 한 곳에라도 더 소개할 준비를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예상 보다 사전 반응이 뜨거웠다. 곧이어 방금 전 첫 매장 첫 매대에 초코파이가 진열되기 시작했다는 영업팀의 쪽지가 책상 한 켠에 놓였다. 처음이지만 흘러가는 분위기가 무척 반갑게 느껴졌다. 그렇게 시장에서는 밝은 미래를 알리는 청신호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고 초코파이는 세상 가운데 그 달달한 얼굴을 비로소 내밀었다. 맞다 그야말로 빅히트였다!
눈을 지그시 감으면 곧이어 들려오는 그윽한 소리에 우리는 추억을 좇아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이 음악을 들으며 기쁨이가 제 곁에서 발레 비슷한 춤을 추고 있습니다 아빠는 글을 쓰고 아들은 춤을 추고 있네요 모든 순간에 감사합니다 (사진: 오리온 담철곤 회장,출처 유투브 )
초코파이가 시장에 나온 후 빠른 속도로 입소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광고는 나올 때마다 공전의 히트를 쳤고 아이들은 모이면 초코파이를 빙둘러앉아 먹기 바빴다. 이윽고 군내에도 초코파이가 보급되기 시작한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눈물 없이 먹을 수 없는 초코파이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랬다 시장에 첫선을 보인 제품이 소비자의 감춰진 속마음을 일깨워, 자신도 모르던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금세 깨달았다. 언제나 이러한 혁신이 발현될 때마다 시장 전체의 판도는 순식간에 뒤집힌다는 사실은 여전히 유효했다. 초코파이는 불티나게 팔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에 뒤질세라 78년 롯데제과, 86년 해태제과, 89년 크라운제과가 각각 초코파이를 잇달아 생산하기 시작했다. 1974년 출시 당시 초코파이는 50원이었다. 전언에 따르면 당시 짜장면 가격이 150원이었다고 하니, 굉장히 비싼 가격에 팔렸던 셈이다.
1974년 출시년도에 매출 10억을 달성하고, 출시 2년 만에 세계 시장으로 팔려 나가기 시작했다. 1987년 월 20억, 1990년도에는 월 30억, 1996년에는 월 53억을 달성하면서 국내 제과 업계 최초로 단일 제품 매출 최초 월 50억, 년간 600억을 팔아치우기 시작했다. 마케팅과 영업 조직이 활발하게 가동되면서 초코파이는 국경을 넘어서 만리장성을 통과해 지나가기 시작했다. 1997년 중국 현지에 첫 공장을 설립하면서 글로벌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베트남, 러시아, 인도로 공장 현지화가 지속 진행되었고 한국에 있는 주재원들은 여러 나라로 계속 파견되었다.
둘이 모여 있으니 더욱 정겹죠
내가 오리온을 입사했을 때는 글로벌 매출이 활황기에 접어들기 시작한 지 이미 몇 년 지난 때였다. 1970년대 중반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은 맛의 혁신은 우리네 입맛을 금방 길들였고 그 맛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실크로드를 타고 전 세계 글로벌 마켓으로 빠르게 흘러 들어갔다. 처음 맛을 본 사람들은 저마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초코파이 맛을 예찬하느라 바빴다. 베트남에서는 제사상에 초코파이가 올라간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려왔다.어디서 이런 맛의 제품이 나왔는지 다들 놀라는 반응 일색이었다. 그 가운데는 오리온의 현지화 전략이 주효했다. 매우 치밀하고도 오랜 기간에 걸쳐 수립된 전략 덕에 현지화는 제대로 먹혀들었다. 가는 현지 시장마다 커다란 히트를 쳤다.
물론 그 성공의 이면에는 각고의 노력이 뒷받침되었다. 맛을 다변화하기 위한 다양한 연구 개발 노력과 현지 시장의 입맛을 파악하기 위한 철저하고도 오랜 분석이 이어졌다. 서른 여종의 다른 맛의 초코파이가 전 세계적으로 생산되고 있다는 게 그 일례다. 초코파이는 시장을 파고 들어간 각 나라 파이 피라미드 최상단에 위치하기 시작했다.
이와 별개로 오리온의 현지화 전략을 간단히 소개하면 중국에서는 토마토 맛 스낵을 출시해서 대히트를 쳤고 인도에서는 우뭇가사리를 이용, 비건을 위한 초코파이 개발에도 성공했다. 베트남에서는 현지 감자 사용 비율 확대화를 꾀해 2023년 기준 30%의 현지 감자 사용량을 보였다. 감자는 그 토양에 따라 맛이 미묘하게 다르다고 한다. 감자 사용처를 바꾸는 것 역시 맛의 측면에 있어서는 매우 세밀한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부분이었다. 반 세기 동안 각고의 노력을 통해 2024년 초 기준 전 세계 60여 개국에서 년간 35억 개가 넘는 초코파이가 팔렸다.
아프리카에서의 짧은 직장 생활을 마치고 오리온에 다시 입사했다. 그때는 '라테'라는 단어가 아직 나오기도 전이었지만 누구나 라테 이야기를 흔하게 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회사의 업무 강도는 굉장히 셌다. 오전 8시 반 출근 후 매일 밤 10시 반이 넘어야 퇴근길에 나서는 상사분들과 1년 넘는 세월을 함께 살았다. 그때는 일을 배워야 하는 시기이기도 했고, 일 양이 워낙 많기도 했다. 모든 팀의 상황이 다 그렇지는 않았다. 내가 속했던 팀은 24시간으로 돌아가는 공장과 가장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던 생산 관련 부서였기 때문에 중앙 집중적인 이슈가 모여들었고 소수의 인원이 매우 다양한 일을 처리하며 빠르게 일을 처리해 나가야 했다.
긴 세월이 지나 그때를 돌아보니 참 쉽지 않은 신입 시절을 보냈다. 마치 미생의 장그래처럼 때마다 고비고비를 넘어야 했다. 매월 마감 시즌이 되면 자정이 넘어 새벽 택시를 타고 집에 가며 잠깐 눈을 붙이고 다음 날 다시 출근하기를 반복했다. 이십 대의 패기가 있었던 시절이었지만, 또 그래야 하는 줄만 알고 몸이 닳도록 일을 했다. 그 때부터 시작된 곤함이 쌓여 지금 많이 약해져있다. 그러나 다시 극복할 것이고 보이지 않는 나의 노력은 언젠가 빛을 발할꺼라 믿는다. 오랜 날 반복하며 밤 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조용히 눈감고 기도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나는 기도에 목말라 있었고, 주어진 일에 성실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모자라면 채워질 때까지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입사 후 세 해가 지난 어느 날 초코파이 공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공장은 밤낮이 따로 없었다. 스물네 시간 동안 라인은 멈추지 않고 돌고 있었고, 나는 초코파이 원재료 담당자로서 새 업무를 도맡았다. 모든 원재료는 내 손을 거쳐 라인에 투입 됐다. 어느 날은 후레쉬베리 라인에 들어갈 원료 하나가 부족해 긴급하게 주말에 서울에서 원료를 수혈했던 날도 있었다. 스낵, 파이, 비스켓, 초코바, 껌, 캔디 모든 종류를 생산하던 청주 공장에서의 삶은 내 삶 속에 매우 색다른 색깔이었다. 년간 천억이 넘는 재료비를 내 손으로 관리하고 있었으니 매일 매일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하늘색 약간 두터운 작업복을 입고 출퇴근하던 나의 얼굴을 날마다 거울로 바라 보며, 나는 매번 살아 있음을 느꼈다. 공장 라인이 쉬지 않고 돌아가는 내내 내 마음도 그것과 함께 돌아가고 있었다. 새벽이든, 주말이든, 라인을 지켜내야 했다. 그게 당연한 일이었고 그 일은 생각보다 다이내믹했다.
새벽에 출근하고 늦은 저녁이 되어 퇴근하는 삶은 여기서도 일상이 되었다. 그곳에 발령을 받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나란히 붙어 있는 두 공장(스낵, 파이)의 합병 결정 소식이 본사로부터 전해져 내려왔다. 그때부터 원래 예상보다 더한 강행군이 다시 시작되었다. 새벽 6시 반이면 세 명이 함께 모여 공장으로 차를 출발시켰다. 그렇게 함께 한 1년 가까운 세월이 빠르게 흘러갔다. 모두가 책임감 강한 사내들이었고, 우리는 우리의 젊음을 그렇게 불살랐다.
길고 긴 사계절이 지나고 마침내 공장 간 합병은 무사히 마무리되었고 우리의 할 일도 마침내 끝을 맺었다. 그제야 가슴 한가운데로 뜨거운 감동이 밀려왔다. 오리온 청주 공장의 가장 중요한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순간에 내가 그곳에 내가 함께 하고 있다는 어떤 말못할 뜨거운 감정이었다. 오리온 청주공장, 나의 젊음 2년을 바친 소중한 공간으로 언제까지나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남아 있을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십 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곳은 내 마음에 고스란히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청주에 있는 동안 아내의 탯속에는 우리 기쁨 이가 자라고 있었다. 이년 내내 워낙 바쁘게 돌아가는 공장이었기에 마음과 같지 않게 태교를 오래 같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내는 그 시간을 오롯이 혼자서 기도와 말씀 가운데 잘 버텨주었다. 결혼 3년 만에 매우 어렵게 가진 기쁨이를 오직 기뻐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다렸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눈빛만 보아도 알아 그냥 바라보면 마음속에 있다는 걸, 그것은 바로 그녀의 사랑이었다. 그것은 바로 기쁨 그 자체였다! 그녀를 향한 나의 사랑이었다. 지금까지 14년 동안 다투지 않고 지낼만큼 지극한 사랑의 씨앗을 그 때부터 소중히 배양했다.
동시에 뱃속 기쁨이를 향한 아빠의 사랑이 늘 함께 했다. 언제나 집에서 외로이 나를 기다리던 아내를 만나러 집에 들어가면 곤히 잠들어 있는 아내 얼굴을 자주 봤다. 기다림 가운데 먼저 잠에 든 아내의 고운 얼굴을 보며 나는 기쁨이를 위해 간절히 두 손 모아 조용히 기도하곤 했다. 바로 기쁨이 그 아이를 향한 사랑이었다. 3년을 기다린 기쁨이와 이제는 오래 함께 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그를 만날 기대감에 서울로 자리를 옮길 생각을 했다. 그의 태어남과 동시에 서울로 때맞춰 이직을 해 올 수 있었다. 기쁨이와 함께 살아갈 날을 꿈꾸며 전혀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시작할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1917년 문파이(moon pie)라는 이름으로 미국 테네시주의 Chattanooga Bakery에서 태어난 비슷한 모양의 파이를 초코파이의 모형이라고 본다. 당시 동양제과의 개발 팀장은 그 맛과 모양을 보고 돌아와 초코파이라는 완전히 다른 특성을 지닌 새로운 개념의 파이로 혁신시켰다. 파괴적인 혁신, 바로 비즈니스 디스럽션(business diruption)이라고 불리는 혁신을 이룬 끝에 2024년 초코파이의 판매 실적은 여전히 놀라운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2023년 말 기준 글로벌 누적 매출액은 7조 원을 돌파했으며, 판매량은 지구를 130바퀴나 돌 수 있는 460억 개에 달한다. 이는 초코파이가 단순한 과자를 넘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했음을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데이터이며, 그 일원으로서 나의 젊은 오 년을 그곳에 바쳤다는 것을 지금도 가장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여전히 그곳에는 나와 함께 젊은 시절을 보낸 소중한 형제, 자매들이 남아 있으며, 나는 여전히 오리온을 사랑하는 소비자로 서 있다.
CM송의 가사를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떠올린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눈빛만 보아도 알아 그냥 바라보면 마음속에 있다는 걸
그것은 바로 정이었다. 나의 젊음을 향한 애정, 나의 가장 소중한 30대 초중반을 바친 회사를 향한 정, 나와 함께 근무하던 동료들과 선후배들을 향한 정이었다. 강산이 변할 만큼 세월이 오래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나의 의사로 그 당시 처음 만난 팀장님께 안부를 여쭌다. 여전히 당시 애정하던 소수의 선후배들과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내가 직접 만들었던 초코파이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축복하며 가끔씩 먹는다. 정이라는 개념이 이 사회에서 마르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심정으로, 브런치 작가가 되었고, 최대한 많은 사람의 마음에 정으로 자리매김하고 싶다. 마지막 숨을 다하는 날까지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으로 내가 직접 만들었던 그 초코파이를 감사한 마음에 담아 한 입 베어문다.
이 글을 제가 사랑했던 오리온과 그 시절을 함께 했던 모든 임직원 분들께 바칩니다. 고급스러운 표현으로 헌정합니다. 이 글이 모기업 오리온 매출 증가에 도움이 되겠지요 그러길 바래봅니다 쿠팡에 오리온 초코파이가 많이 있답니다
무엇보다 기쁨이를 태에 안고 있을 때 말없이 신랑의 뒷모습을 안쓰러워해주던 사랑하는 아내와 저를 지금까지 잘 세워주시고 격려해주신 양가 부모님들께 바칩니다 (기쁨이 너도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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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다가 쓰러져 배꼽잡고 웃고 있는 제 아들 근황이에요 기적이라고 밖엔 못하겠어요 하나님이 주신 기쁨일 수 밖에 없어요 그 힘든 아픈 시절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모습이라서요
궁금해 하시는 분들을 위해 별도로 남겨드립니다
P.S 아직 천식, 턱통증, 목, 눈 통증등 아직 복합적인 육체적인 어려움의 시절을 지나고 있어요 온전한 체력회복이 이뤄지도록 많은 기도와 격려 부탁드립니다 답글을 너무 소중히 여기니 남기고 싶은 분들은 남겨주시고 다만 몸상태에 따라 감사함을 담아 천천히 드릴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