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공녀>, 미소가 예쁜 미소
서른을 바로 목전에 두고 보니, 얼레벌레 세월에 얼을 타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 꼭 나 하나뿐인 것 같다.
입던 교복을 나란히 벗어놓고 어른이 된 것은 똑같은데, 이제와 다시 보니 친구들은 나만 빼고 저들끼리만 꼭 그럴듯한 뭔가가 되어있다. 벌써 애를 셋이나 낳은 엄마, 무리 없이 승진해 이제 제법 방귀 좀 뀌는 커리어 우먼, 제법 만난 애인과 행복한 결혼 준비에 여념이 없는 예비 신부, 꼭 하고 싶은 일에 뛰어들어 이제 좀 안정을 찾아가는 어설픈 프리랜서 등등.
이건 비밀인데, 사실 나는 누군가의 소소한 성공과 축하할 일들 앞에서 자주 마음이 찝찝해진다. 그리고 꼭 자기 전, 누운 자리에서 나에게 묻는다.
나는 도대체가 자라서 뭐가 될까? 하고.
하지만, 비단 이 자문이 칠흑처럼 캄캄한 미래 앞에서 겁먹은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다들 바쁘니 괜히 조급 해지는 법이다. 누구는 토익 준비에, 인적성 시험에, 자기소개서에, 면접 준비에 눈 코 뗄 새 없이 바쁘다는데, 도통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지도 모르는 데다,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감도 잡지 못 할 때가 있다.
그런 우리에게 아주 근사한 위로가 되어 줄 사람이 하나 있다. 바로 영화 <소공녀>에는 특별히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괜찮은 미소가 등장한다.
-거꾸로 매기는 우선순위
하루 일당 4만 5천 원을 받고 일하는 가사도우미 미소는, 그저 남자 친구와 담배와 위스키만 있으면 된다. 특별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되고 싶은 것도 없다. 담배와 위스키는 꼬박 돈 주고 사서 태우고 마시지만, 밥은 과자와 방울토마토 같은 것으로 대충 때우거나, 쌀은 친구에게 빌려서 먹는다. 너무 추운 미소의 골방에서는 몸이 꽁꽁 얼어 섹스도 할 수 없다. 남자 친구와 미소는 다음 섹스를 따뜻한 봄에 하기로 기약한다.
담배값이 오른다. 것도 2000원 씩이나. 미소는 원래 피우는 담배 대신 500원 저렴한 담배로 갈아탄다. 그런 와중, 월세를 5만 원이나 올리겠다는 집주인의 얘기는 청천벽력과도 같을 수밖에. 미소의 고정지출은 월세와 약값, 담배값과 술값이다. 돈통을 골똘히 들여다보던 미소는 기꺼이 집을 포기하고, 노숙을 선택한다.
보따리 보따리 짐을 싼 미소는 대학시절 활동했던 밴드부의 친구들에게 도움을 구하러 떠난다. 미소는 자신의 행위를 '여행'이라 정의 내리지만, 우리는 그 여행이 마냥 순탄하고 낭만적이지만은 않을 거란 사실을 진즉 눈치챈다. 계란 한 판을 숙박비로 지불해가면서, 집 없는 미소는 집 있는 옛 친구들을 만난다. 각자의 인생이 너무도 피곤하고 억울한, 평범한 사람들 말이다.
초지일관 미소는 그들을 웃는 얼굴로 위로하고 보듬는다. 비록 집도 절도 없지만!
-사람답게 사는 사람들의 고충
사람답게 사는 사람들은 늘 고단하다. 갚아야 할 빚이 산더미고, 실연을 당해 슬프고, 소질도 없는 집안일을 해야 해 짜증 나고, 또 어떤 사람은 결혼을 하지 못 한 채로 늙는 것이 부모님께 마음의 짐으로 남아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주변에 너무도 진부하고 만연하게 널려있는 보통의 걱정들이다.
미소는 그들의 투정과 한탄을 묵묵히 듣는다. 아무리 봐도 당장 오늘 잘 곳이 없어 큰일이 난 사람은 미소인 것 같은데, 모두 제 걱정과 신세한탄에만 몰두한다. 집 없이 떠도는 미소의 사정에 대해 차마 캐묻지 못하는 것이다.
미소는 친구들의 어질러진 집을 청소하고, 밑반찬을 하고, 이불을 개어주고, 사진과 함께 짧은 편지를 남긴다. 사진 속의 어린 친구들은 모두 환하게 웃고 있다. 지금 떠안고 있는 걱정 같은 것은 없는 사람들처럼. 덧붙인 편지의 내용은 무척이나 시시하다. 밥 챙겨 먹어라, 고맙다. 대강 이런 입에 발린 내용들이다.
미소는 사람답게 사는 보통 사람들에게 더 얹혀 지내지 못한다. 정상 궤도에서 벗어난 이탈자가 사회에 쉽게 구성원으로 인정받고 융화되지 못하는 것처럼, 집 대신 술 담배를 택한 미소는 집 있는 사람들에 섞이지 못하는 것이다. 여행이라 주장했던 미소의 여행은 자연스럽게 노숙이 된다.
웹툰 작가 지망생이었던 미소의 애인은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사우디 아라비아의 공장으로 자원을 한다. 월급을 모으고, 빚을 갚고, 앞으로의 미래를 걱정하는 보통의 사람들에게 편입되고 싶은 것이다. 이제 미소는 진짜 혼자다. 하지만 미소는 사람다움을 추구하는 그를 배척하지 않는다. 원망하거나 힐난하지도 않는다. 여전히 애인의 꿈을 응원한다. 꿈을 놓지는 말라고.
일당 4만 5천 원짜리 일도 잘리고, 애인도 떠나고, 그 사이에 위스키 값도 2천 원이나 오른다. 그럼에도 미소의 우선순위에는 변화가 없다. 휴대폰도 포기하고, 꼬박 챙겨 먹던 약도 포기한 미소는 백발이 되었다. 장례식장에서 모처럼 모인 친구들은 하룻밤 잠깐 들렀던 미소를 추억한다.
자신들이 목격한 미소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는 사람들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린다.
보통 주인공에 이입해 영화를 감상하다 보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결말을 기도하기 마련이다. 집을 포기한 미소가 내 집 마련에 뜬금없이 성공하는 것이 인간적인 바람이겠지만, 웃기게도 나는 미소의 노숙이 좀 더 길어지기를 바랐다.
그래서인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특히나 내게는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기다랗게 기른 머리가 하얗게 새고, 늘 들고 다니던 가방 속에는 먼지떨이가 꽂혀있다. 차들이 쌩쌩 내달리는 다리를 느리게 걷는 미소의 등 뒤로 뽀얀 담배연기가 아지랑이 핀다. 미소는 여전히 집을 포기했다.
미소는 행복할까?
알 수 없다. 영화 말미에는 미소의 표정을 비추어주질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미소가 그다지 억울한 것 없이, 조금 고단하지만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믿는다. 미소는 유일한 안식처라고 믿는 술과 담배를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미소가 내게 반문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꼭 무언가가 되어야만 할까?
위스키 잔을 내려놓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도 이미 충분한 대답이 됐다. 우리는 반드시 거창한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만끽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극 중, "집이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어."라는 미소의 대사가 있다.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것은 단순히 돌아갈 집이나 안정적인 직장이 아닌, 견고하고 단단한 마음 하나뿐이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는 것만으로도, 걱정의 무게는 얼마든지 덜 수 있다.
그 사실을 이미 미소는 알고 있다. 어쩌면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버려서, 미소는 백발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