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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화 Mar 10. 2021

내 연상의 동거녀

우리는 서로의흰머리를보았고,어느새서로에게 너그러워졌다.

 연상의 동거녀가 있다. 그 여자가 빨래를 잘못해서, 내가 가진 모든 팬티를 보라색으로 만들었다(검은색 팬티만 제외하고). 나는 매일 수영장에 가서 남들 앞에서 팬티를 벗어야 하는데, 어떤 팬티는 정말 요상한 모양새가 되어서 썩 난감하다. 범인인 여자는 너무도 당당하게 팬티와 바지를 한꺼번에 벗으라고 조언해줬다. 웃기고 그럴듯해서, 그 방법을 매일 쓰고 있다.


 그런 김에 여자에 대해 쓴다.


 여자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나를 낳았다. 가끔씩 나는 이 여자가 그 나이에 나를 낳아 키울 생각을 대체 어떻게 한 것인지 대견하다. 평생을 함께 하자는 남자 친구의 허풍과도 같은 말을 믿었다니. 정말이지 놀랍다. 여자가 나를 임신했을 나이에 나는 커서 무얼 해야 할지 몰라 클럽에 춤이나 추러 다녔으니, 더 소름 끼치는 일이다.


 어릴 때를 더듬어 여자를 기억하자면, 여자는 내게 참 매정하고 무서웠다. 


 나는 항상 여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노력하는 어린이였다. 90점짜리 받아쓰기 시험지를 100점짜리로 위조할 정도로 말이다. 이건 여덟 살 때의 일이지만, 열여덟이 되어서는 공부에 특기도 흥미도 없었다. 더 이상 여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 지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다. 공부 같은 것 하지 않아도 내게 호의적이고, 친절하며, 나를 사랑해주는 친구들이 있었으니까.


 바깥으로 나가 내 편이 되어주는 타인들을 사귀면서, 여자와 나는 많이 다투게 됐다. 여자의 콧대는 너무나도 높았고, 나는 여자를 온전히 충족시켜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후부터 나는 여자를 만족시키려 노력하지 않았고, 여자에게 반항했고, 또 어떤 때는 여자를 미워했다.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상처 주는 말들을 하고, 울고, 각자의 방문을 세게 닫았다.


 여자와 내 사이가 다시 좋아지게 된 계기는 잘 모르겠다. 인지하지 못하는 동안 우리는 꽤 죽이 잘 맞는 사이가 됐다. 또 어떤 순간부터 나는 여자를 항상 그리워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가족이라는 명료한 이유만으로 충분히 설명이 가능한 감정인데, 이전까지 나는 왜 여자가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사춘기가 그렇지 않은가. 종잡을 수 없고, 이유 같은 것을 갖다 붙일 수 없으면서 또 아무 이유나 다 갖다 붙일 수도 있는 이상한 시절 말이다. 아무튼 난 그 시절을 핑계로 여자를 참 힘들게 했던 것도 같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여자에게 상처 줬는지는 하나도 기억 안 나지만, 막연히 그때의 시간이 통째로 여자에게 미안하다. 그것도 이제 와서.


 요즘 여자는 여기저기가 다 아프다.


 엄지손가락 마디도 좀 아픈 것 같고, 어떤 날에는 허리가 쿡쿡 쑤셔서 일어날 수 없고, 또 어떤 때에는 피부가 우리우리하게(여자의 표현을 빌려 설명하자면) 아프단다. 나는 그럴 때마다 여자에게 큰일이 난 것 같아서 엄청 불안해한다. 그러면 여자는 여자의 친구들 상태가 더 하다는 말로 나를 진정시킨다.


 희야 이모는 상화야, 귀도 위잉 하면서 이명이 들리고, 피부도 알러지가 나서 이래 빨갛게 다 올라왔단다. 목이 아파서 고개를 돌릴 수가 없고, 또 어깨가 결려서 팔을 들 수가 없다 카드라.


 여자의 고등학교 동창 계모임 이름은 '오돌또기'인데, 나는 그 모임의 이름을 이제 '요양병원'이나 '실버타운'으로 바꿔야겠다고 말했다. 여자는 재밌다는 듯 꺄르르 웃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사실 나는 그 농담이 좀 슬펐다.


 여자는 당뇨에 대비하기 위해서 여주 즙을 마시고, 기력이 딸리면 홍삼을 먹고, 아침 식사 후에는 유산균과 비타민D를 챙겨 먹고, 피부를 위해 자기 전에는 콜라겐 한 알을 삼키고, 또 관절에 좋다는 어떤 영양제도 먹는다. 또 새싹보리 분말도 물에 꼬박 타마시고, 위가 좋지 않으니 매운 음식은 피하고, 양배추를 꼭 삶아 먹는다.


 여자는 자주 염색약을 내게 건네고 여자의 머리를 내게 맡긴다. 이제 염색약을 바르지 않으면, 머지않아 여자의 머리는 백발이 될 정도가 됐다. 처음에는 염색약을 발라주는 게 몹시 서툴러서, 내 옷도 염색하고, 집 장판도 염색하고, 여자의 귀도 염색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염색약을 바를 줄 알게 됐다. 할머니가 되는 여자의 모습을 평소에는 잘 상상하기 어렵지만, 여자의 머리를 염색할 때는 할머니가 되어가는 여자를 실감한다.


 여자가 나를 낳았을 나이에 나 역시 아이를 낳았더라면, 여자는 진짜 할머니가 됐을 거다.


 내 또래의 자녀를 가진 여자의 친구들은, 여자에게 자주 청첩장을 보낸다. 그럴 때마다 여자는 나한테 청첩장을 받았다는 얘길 꼭 한다. 의중이 어땠든 난감한 일이다. 여자는 어떤 날에는 나더러 능력만 있으면 시집가지 말고 혼자 살라고 했다가, 또 어떤 날에는 결혼을 하라고 말하니, 당최가 어느 장단에 맞추어야 할지 모르겠다.


 사실 나는 여자가 나를 조금 더 키워줬으면 좋겠다. 무려 30년이나 키웠지만, 조금만 더. 너무 철이 없는 소리라서 여기까지 쓰고 좀 멈칫했다. 그렇지만, 여자는 주에 한 번 흰머리 염색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 또 술을 좋아하는 여자의 남편 뒷담화를 같이 할 사람도 있어야 할 것이다. 여자는 도무지 물건을 사고 나서 설명서를 읽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여자가 멀쩡한 새 물건을 부수기 전에 누군가가 대신 설명서를 읽어 줘야 한다. 여자의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 날에, 여자의 기분을 알아차리고 초밥을 사줄 사람도 필요하다.


 재밌게 본 <디어 마이 프렌즈>라는 드라마에서 '우리 세상 모든 자식들은 눈물을 흘릴 자격도 없다. 우리 다 너무나 염치없으므로.'라는 대사가 있다. 나는 얼마나 더 염치없으려고 이러나.


 예전에 여자에게 버버리 스카프를 사줬는데, 요즘 여자가 가짜 구찌 스카프를 매고 다닌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러는 이유가 있는 것 같지만 여자는 계속 아무 뜻 없다고 우긴다. 곧 여자의 생일이 있다. 몰염치에서 잠시나마 한 걸음 멀어질 수 있는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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