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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피플 Jan 02. 2021

상식이 통하지 않는 숲

제주도에서 경찰서를 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렌터카를 빌리기 위해서 필요한 운전면허증이 보이지 않았다. 렌터카 회사에 전화를 해보니 운전면허증이 없으면 경찰서에서 운전경력증명서를 떼오라고 했다. 나는 불편한 배에서 축적된 피곤함과 선잠으로 해결하지 못한 졸음을 등에 업고 경찰서로 향했다. 제주 경찰서라고 서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경찰서 건물에 달린 태극기를 품은 노란색 독수리는 서울이나 제주도나 똑같이 카리스마가 넘쳤다. 경찰서로 들어가니 민원창구가 보였다. 번호표를 뽑고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순서가 왔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뭐 필요하세요."라고 물어보는 직원에게 신분증을 내밀면서 "운전겨.."라고 말하고 있는데 "네"라고 말하면서 말을 잘라먹었다. 뭐지? 하고 상황 파악을 하고 있던 찰나에 프린터에선 의문의 문서가 나오기 시작했다. 운전경력증명서라고 적힌 문서에는 벙진 표정을 짓고 있는 내 사진이 보였다. 민원 창구에서 서 있던 내 표정이 실제로 그랬다. 직원의 불친절한 태도 때문에 기분이 상한 것이 아니었다. 진기한 광경을 본 것만 같았다. 경찰서 민원창구 직원들은 관상이라도 보는 것인지. 어떻게 말하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아는 걸까? 용한 점집에서 사주를 보고 나온 것 마냥 신기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숙소는 완벽했다. 마지막 여행지인 제주도에서는 다른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쉴 수 있는 독채를 예약했다. 자를 대고 그린 것처럼 절도 있는 선이 아름다운 독채. 그 주위에는 숨구멍이 뚫린 울퉁불퉁한 돌담들이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순간 서울 인사동에서 한글로 적힌 프랜차이즈 가게들을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났다. 현대적이면서 동시에 전통적인 공간들은 언제나 푸석한 내 마음에 신선함을 들이붓는다. 독채 안으로 들어가니 신혼부부도 살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공간이 펼쳐졌다. 하루 종일 누워있고 싶게 만드는 회색톤의 깔끔한 침구류, 천천히 독서를 즐길 수 있는 원목 책상과 의자, 간단히 요리를 할 수 있는 안락한 주방까지. 휴가를 즐기기 위한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이 마련된 공간이었다. 땀에 절은 나는 일단 샤워부터 시작했다. 욕실에 들어가서 따뜻한 물을 틀었다. 차가운 물줄기가 따뜻한 물줄기로 바뀌는데 한참이 걸렸다. 따뜻한 물줄기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타고 흐르는데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보이지 않으니 몸을 감싸고도는 물줄기들이 더욱 포근하게 느껴졌다. 이대로라면 욕실에서 잠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몸을 구석구석 닦아내고 샤워를 마치려는데 문제가 생겼다. 좀비처럼 축 늘어진 손은 추호도 올라갈 생각을 안 했다. 어쩔 수 없이 제자리에서 빙빙 돌면서 물줄기로 드러난 부위만 씻어냈다. 수건으로 흥건한 몸을 대충 닦고 침대에 누우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천장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그래, 이게 바로 천국이지."라고 혼잣말을 하는 순간 잠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침대에 누웠다는 사실조차 인지하기 전에 내 의식은 사라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몸이 불편해서 잠깐 잠에서 깼다. 목이 시계방향으로는 돌아가는데, 반시계 방향으로는 안 돌아갔다. 화장실을 가려고 일어나니 다리에서는 찌릿찌릿 전기도 흘렀다. 뭔가 묘한 기운이 맴돌았다. 오후 2시부터 푹 잔 것 같은데 아직도 해가 중천에 떠있다니 말이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시계는 다음날 아침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 마이 갓." 평소에는 자주 부르지도 않던 신을 찾았다. 침대에 누워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미친 사람처럼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비명은 웃음으로 변했다. 시시한 여행의 마지막을 조급함으로 장식하고 싶진 않았다. 생각해보니 20시간 동안 쉬지도 않고 잠을 잔 것도 일상에선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다시 차분한 마음으로 침대에 누우니 얼굴에 아침 햇살이 내려앉았다. 서울 자취방이 서향이라 구경도 못하던 아침 햇살을 제주도에서 실컷 즐길 수 있었다. 아침 햇살은 저녁 노을보다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었고, 하루를 활기차게 시작할 수 있는 에너지를 채워주었다. 덕분에 이번엔 손으로 구석구석 몸을 씻어내며 샤워를 할 수 있었다.

숙소에서 자동차를 타고 조금만 나가니 해안도로가 보였다. 해안도로에 진입하기 전에 신나는 음악을 틀고, 모든 창문과 뚜껑을 열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정면으로 날아왔다. 무지하게 따갑긴 했지만 참을 수 없을 만큼은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바다를 친구 삼아 달리면서 느끼는 자유로움을 놓치고 싶지가 않아서 계속 달렸다. 런던에서는 죽을 만큼 하기 싫던 운전이, 서울에서는 웬만하면 하기 싫던 운전이, 제주도에서는 얼마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해안도로를 달리는 동안 작은 행복들이 수도 없이 밀려왔다. 액셀을 밟으면 나아가는 추진력, 브레이크를 밟으면 느껴지는 관성, 핸들을 돌리면 변화하는 방향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공복 상태로 24시간이 지나니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가 음악 소리보다 커졌다. 일단 급한 대로 편의점에 차를 세웠다. 간단히 김밥으로 배를 채우고 근처에 방문할만한 곳이 있는지 찾아봤다. 바다는 많이 봤으니 산이나 숲을 가고 싶어서 알아보는데 '곶자왈'이라는 단어가 자주 보였다. 난생처음 보는 단어라 호기심이 생겼다. 사전을 찾아보니 숲과 덤불의 합성어라고 하는데, 도대체 어떤 모습일지 상상이 되질 않았다. 마침 근처에 투어 가이드가 직접 설명을 해준다는 환상숲 곶자왈이 있었다. 해안도로를 나와 숲길을 달리는데 "시시한 여행은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한치도 예상할 수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도로 처음 여행을 온 주제에 한라산도 아니고, 오름도 아니고, 바다도 아닌 곶자왈을 향해 가고 있다니 말이다.

환상숲 곶자왈에 도착하니 작은 매표소가 하나 보였다. 다가가니 매표소 문이 열렸다. 백발의 할머니가 건강한 미소를 하고 나를 보고 말했다. "반가워요, 예약하고 오셨어요?" 알고 보니 네이버 예약을 이용하면 더 저렴하게 숲해설을 들을 수 있다고 했다. 현장 가격은 5,000원 네이버 예약가는 3,800원. 얼마 차이가 나지 않아서 현금으로 숲해설 이용권을 구매했다. 할머니는 매표소에서 나와 입구를 가리키며, 10분 뒤에 해설이 시작한다고 친절하게 설명했다. 숲해설은 매일 09시부터 시작해서 16시까지 1시간에 한 번씩 진행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심지어 해당 시간에 환상숲을 찾아오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숲해설은 진행된다고 했다. 환상숲 곶자왈을 운영하는 사람이 입장이 아니라 찾아오는 사람들 입장에서 만든 운영 정책에 나는 숲해설이 시작되기도 전에 감동해버렸다. 매표소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입구에서 투어 가이드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숲해설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다양했다.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온 가족이 다 같이 찾아오기도 했고, 서로를 바라보는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커플도 있었다. 전문적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인지 대포 카메라를 들고 있는 청년도 보였고, 알록달록 곱게 차려입고 수다를 떠는 아주머니들도 있었다. 정각이 되자 주황색 등산복을 입은 젊은 여성분이 나타났다. 챙이 넓은 모자 때문에 얼굴에 그림자가 살짝 드리워졌다. 그럼에도, 그녀의 미소가 백발의 할머니의 건강한 미소를 닮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허리에 차고 있던 마이크를 켜더니 기분 좋은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숲지기의 딸 이지영입니다."

투어 가이드가 아니라 숲지기라는 표현이 참 좋았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를 숲지기라고 표현했고, 자신을 숲지기의 딸이라고 소개했다. 자신의 아버지가 11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지고 나서, 반신마비의 몸으로 만든 산책길이 환상숲 곶자왈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지금 아버지의 상태는 어떤지 궁금한 듯 웅성거렸다. 그녀는 숲지기인 아버지가 곶자왈의 좋은 기운 덕분에 지금은 건강이 많이 호전되어 숲해설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속으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고, 사람들 표정을 보니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환상숲 곶자왈에 대한 배경 설명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숲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푸른 녹지가 많긴 했지만 흙이 아니라 돌멩이 위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심지어 용암이라 물이 고이지도 않는 돌멩이에서 생명체가 어떻게 자라고 있는 걸까? 그녀는 곶자왈 밑으로 흐르는 지하수로 식물들이 자라날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 곶자왈이 무슨 뜻인지 알고 계시나요?" 오늘 처음 들어본 나와는 달리 곶자왈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자 그녀는 "그럼 숲을 뜻하는 곶과 덤불을 뜻하는 자왈을 구분하는 방법이 뭘까요?"라고 물었다. 숲과 덤불은 고민을 할수록 똑같은 말 같았고 동시에 전혀 다른 말 같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도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본인의 질문에 직접 답했다. "저희 할머니가 그러더라고요. 곶은 소 무리들이 들어갈 수 있고, 자왈은 소 무리들이 들어갈 수 없다고요." 나는 이 말을 듣고 나서도 곶자왈이라는 공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곶자왈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공간이 분명했다. 차가운 바람에 얼굴이 따가울 정도로 추운 겨울이지만 곶자왈의 나무들은 하늘을 모두 덮을 정도로 울창하게 자라났다. 사진으로만 보면 곶자왈의 계절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다. 숲해설을 하고 있는 그녀도 곶자왈의 겨울은 울창한 초록잎으로 가득하고, 봄에는 빨간 낙엽이 우수수 떨어진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곶자왈이 가진 정체불명의 매력에 감탄을 하고 있는데, 호기심 많은 아이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선생님, 이건 무슨 나무예요?" 그녀는 나무를 손으로 만져보더니 푸조나무라고 답했다. 그러자, 아이는 다른 나무로 달려가 또 물었다. 그녀는 이번엔 나무 밑에 떨어진 이파리를 만져보더니 "따뜻한 제주도에서만 자라나는 종가시 나무예요."라고 친절하게 대답했다.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는 또 다른 나무에 서서 물어보는데 처음으로 그녀가 정색을 했다. 곶자왈에선 사실 나무의 이름을 물어보면 안 된다고 말했고, 곶자왈에서 자라나는 종이 900개가 넘는다고 했다. 그래서 나무에 대해서 질문과 답변을 하자면 오늘 하루로도 부족하다는 이유로 현명하게 물음표 귀신을 퇴치했다.

숲해설이 끝나기 전 그녀는 덩굴이 올라간 나무 앞에 서서 말했다. "갈등이 숲을 풍요롭게 만든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그녀는 시계 방향으로 올라가는 칡 나무와 반시계 방향으로 올라가는 등나무가 서로 얽힌 모양을 연상한 한자어가 갈등이라고 말했다. 등나무와 칡 나무는 서로를 경쟁 상대로 삼고 나무를 차지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힘이 얼마나 센지 나무에는 등나무와 칡 나무의 덩굴이 올라간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녀는 움푹 페인 칡 나무 덩굴 자국을 만지면서 갈등에는 영원한 승리자가 없다고 말했다. 지금 당장은 힘이 약해서 잘려나간 칡 나무 덩굴이지만 언제든 다시 나무를 타고 올라가 등나무 덩굴을 잘라버릴 수 있다고. 그래서 갈등을 통해 성장한 나무들은 숲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고 말했다. 그리고 갈등은 숲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는 말을 덧붙이고 숲해설을 끝마쳤다. 그녀가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자 사람들은 손이 시린 줄도 모르고 큰소리로 박수를 치며 고마워했다. 진심이 담긴 박수소리는 곶자왈에서 오래도록 울려 퍼졌다.


숲해설이 모두 끝이 나고, 사람들이 나가자 곶자왈은 고요해졌다. 다시 한번 혼자서 걸어보고 싶어서 곶자왈로 다시 들어갔다. 오롯이 나의 리듬과 기분에 따라 걸어가니 같은 길도 새롭게 느껴졌다. 사람들의 말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았던 바람 소리가 들렸다. '휘이잉' 작고 얇은 잎을 흔들고 가는 가벼운 소리. '슈우웅' 울창한 초록잎들을 휘몰아치는 무거운 소리. '끼이익' 얇은 통나무들 사이를 지나가는 으스스한 소리. 곶자왈에서 자라는 나무의 수만큼이나 바람소리도 다양하게 들렸다. 혼자서 다시 보니 곶자왈은 밝음과 어둠,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고 있었다. 햇살이 찬란하게 빛나는 자리에는 푸른 식물들이 활기차게 자라났다. 반대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자리에는 고사리 같은 양치류 식물들만 살아남았다. 전혀 다른 서식지의 식물들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건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곶자왈에서만 가능한 일이 아닐까.


환상숲 곶자왈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길 내내 여운이 가시질 않았다. 시시한 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일상이 지치고 힘든 날 눈을 감으면 언제든 환상숲 곶자왈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도 제주도로 처음 여행을 와서 한라산도 제쳐두고, 오름도 제쳐두고, 바다도 제쳐두고, 곶자왈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 마음속에 "제주도 하면 곶자왈"이라는 방정식이 생겼다. 제주도를 언제 다시 오게 될지는 모르겠다. 한 달 뒤가 될 수도 있고, 일 년 뒤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시 온다고 해도 제일 먼저 곶자왈을 방문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가능하다면 다음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곶자왈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불모지 같은 세상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제주도를 좋아하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제주도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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