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성우 May 12. 2023

문화적 진리에 대하여

최근 들어 하고 있는 나의 흥미로운 잡생각 중의 하나인 ‘문화적 진리’에 대한 소고이다. 인식론을 제대로 배워본 적은 없으니 정말로 뇌피셜이지만, 어느 정도 지식체계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진리’는 단수이면서 복수인 오묘한 탐구 대상이라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단수로서의 진리는 그렇게 호명될 때에 가능하며 때때로 제대로 제기능을 발휘하지만, 바로 그러한 구성적 성질이야말로 단수로서의 진리가 복수로 가능하다는 대주제의 근거가 된다. 여기서 철학과 인류학의 교차점인, ‘문화의 지역적 특질’에 대한 성찰이 가능한데, ‘전지구화’와 같은 최근 들어 활발한, 혹은 과거로부터의 간헐적 현상에 비하여, 문화는 태초부터 그 문화가 통용되는 특정 사회의 지역적 성질이었다는 가정에 동의한다면 다음과 같은 진리의 복수성을 추단할 수 있다. “진리는 견고하고 통약가능한 불변의 것이 아니라, 지식의 계층층위의 특정한 단계에 불과하며, 그 단계에는 복수의 진리가 가득해 서로 경합한다.”


진리가 절대적인지 상대적인지에 대한 오래된 철학적 논의는 뒤로 하고, 내가 여기서 논의하고 싶은 것은 단순히 참인 명제일 뿐 아니라 인간에게 중대한 의미를 전달하는 진리가치를 지닌 진리마저도 문화적 지역성을 강하게 띠곤 한다는 것이다. 가령 예수가 죽고 3일만에 부활했다는 이야기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진리이지만, 무종교인들에게는 헛소리에 불과한 것, 혹은 타종교인들에겐 심한 경우 이단에 해당하는 것처럼, 널리 알려진 (잠정적) 사실들도 진리가치의 사회적 지역성을 띠지만, 내가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은 추상적 네트워크 따위로 환원되는 “사회적 협소함”이 아니라(이런 뉘앙스는 내가 사회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이다.) 특정 시공간에 구현가능한 물리적 실체를 가진 문화적 사물에 관한 진리의 지역성이다. 여기서 ‘지역적(regional)’이라는 것은 비유가 아니라 본래의 의미를 가진다.


운 그만 띄우고 바로 구체적 실체로 들어가면, 가령 ‘물-불’, ‘해-달’과 같은 대척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오래전부터 이분법(dichotomy)에 근거한 많은 사물대립쌍들이 있어왔고, 과학혁명 이전에는 이들의 의미가 과학 이상의 것을 가졌다. 불은 물로 끌 수 있고 불은 물을 말리니 둘은 대척점이다. 해와 달은 밤낮을 번갈아 뜨니까 정반대의 의미를 가졌다. 그러나 현대과학의 관점에서 이러한 분석은 완전히 틀렸다. 불의 실체는 열과 빛이며 불 자체를 명명할 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은 지구상에 우연히 많은 물질 중 하나로 어쩌다 생명력을 책임졌을 뿐 전우주적 관점에서 불을 식히는 물질로 존재하길 예정했다고 볼 수 없다. 게다가 물이 불을 끄는 건 산소를 차단하는 때문이 주된 이유이다. 달이 밝은 건 태양빛을 반사했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발광하지 않는다. 게다가 공전과 자전주기로 달은 매번 모습을 바꾸고 어쩔 땐 태양이랑 같이 뜬다.


이외에도 횡문화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사물들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지식체계의 탑에서 특정한 계층을 담당한다. 그것이 문과생들이 좋아하는 것처럼 시적인 의미를 충만히 가지든, 비과학적 문화에서 특정 ‘속성’을 담당하든(사주팔자나 오행, 서양의 마법 같은 미신에서처럼), 더 견고해보이는 진리의 등장으로 물러섦을 당하곤 한다. 그렇게 역사 속으로 퇴장한다면 과학철학이 더 단순했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다. 퇴행을 겪으면서도 지역적인 문화적 진리들은 특정 지역에서 강한 힘을 발휘하며 서로 경합한다. 하다 못해 RPG 게임 속에서라도 ‘사물의 속성’이란 개념은 살아간다.


내가 싫어하는 인류학 표현 중 하나인 문화의 ‘주술적 효과’에 대해서 길게 서술해야할까? 이건 이미 많이 이루어져 있고 인류학자들 중 다수가 주술을 비유로 표현하는 건지 진짜 그런게 있다고 믿는 건지 알 수 없게 의미심장해지는 걸 좋아하니까 나는 정반대의 길을 걷겠다. 주술은 문화적 진리의 일부에 불과하고, 사람들은 그걸 진심으로 믿지 않아도 괜찮다. 부분적인 믿음만으로도 문화적 진리는 작동하고, 그런 인지적 오류를 사소하게 만들어주기 위한 경험칙으로의 발전이 문화적 진리의 주된 기능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이런 의미에서 보다 견고한 의미의 진리가 등장하여 밀어낸 문화적 진리들은 분명히 합의된 지역에서만 부분적으로 사용되어야 하며, 당연히 진리가치의 제1순위로 올라서서는 진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의 관점은 다 갖다 버리라는 기업가 정신의 과학자는 지양하는 바이지만, 비과학을 과학적으로 밝혀내는 작업이 인류학자와 같은 사회‘과학’자들이 과학의 이름을 달고 할만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보다 나은 서술을 위해서는 여러 책을 읽어봐야 하지만 나는 그럴 시간이 없다.


오늘의 dilettantisme은 여기까지.

매거진의 이전글 유사친족 문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