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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우 Nov 15. 2022

개인 없는 개인주의 사회

우리 사회는 흔히 공동체주의가 강하다고 한다. 언제나 ‘우리’가 먼저고, 가족과 국가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공동체주의라지만 ‘개인적인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개인 없는 공동체주의는 실상 집단주의에 가깝다. 한국전쟁과 급진적인 산업화 아래에서, ‘다 같이 어려운’ 시기를 겪은 사람들 사이에 집단주의는 생존을 위한 편향이었다. ‘우리나라’와 ‘우리 사회’ 사람들은 ‘나’ 없이 살아온 것이다. 이런 경향은 산업화로 인해 불쑥불쑥 등장하던 개인주의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어왔다. 어느 순간(대략 21세기 들어)부터는 우리 사회가 개인주의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개인주의의 확산과 이에 대한 여러 경고에도 불구하고 개인이란 것은 여전히 희미하다. 집단주의가 너무 강해 단편적인 개인주의들이 심한 것으로 보이지 않았나 싶다. 이런 모순적 양상에서 우리 사회를 ‘개인주의는 있고 개인은 없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다 같이 개인이 되자’라는 구호는 들려오지만, 정작 혼자가 되는 것은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집합처럼 보인다. 개인주의와 달리 개인이라는 것은 사회 속에서 자족적으로 존재하는 자연적 사실에 가깝다. 혼자라는 사실과 혼자인 것을 좋아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혼자인 게 편하고, 혼자가 되려 노력하며, 타인에게 혼자가 되길 권유할 정도면 철저한 개인주의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오히려 열성적으로 개인주의를 찬양하는 사람은 이미 개인이 아닐 확률이 크다. 이렇게 개인주의를 좋아하는 집단의 탄생은 역설적이다. 주류사회로 자리 잡은 개인주의는 개인이 될 수 있는 조건을 두고 경쟁을 한다. 그 조건들은 주류사회를 이끄는 원동력들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벗어날 수가 없다.

사회 기득권층이 개인주의적으로 비치는 것은, 이들이 손쉽게 개인이 될 역량을 갖췄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역량이 바로 그들의 개인성에서 나오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개인의 역량이 개인으로부터 나온다고 판단하는 것에 종종 심각한 오류가 있곤 한다. 연줄과 백, 부모의 등쌀과 세습자산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개인주의를 외치는 것은 모순적이다. 그런 개인주의는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심리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특권적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은 여기에 있다. 반면 사회적 지위가 높지 않은 사람들이 개인주의를 추구하다가는 ‘쥐뿔도 없는 애가 잘난 척하는 것’이 될 가능성이 크다. 보통은 그저 자연적 사실에 불과한 개인으로 남는다. 배제인지 무시인지 모를 것을 받으나 안심해도 좋다. 얼마든지 개인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너무 아래로 내려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개인으로서는 생존할 수가 없다. 생존형 공동체에 기대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

한국사회는 고맥락사회라고들 한다. 어떤 사회적 사실도 개인에서 시작해 개인으로 끝나기가 어렵다. 안 되면 사회 탓, 잘 되면 개인 덕도 문제지만, 안 되면 개인 탓, 잘 되면 사회 덕도 문제다. 학습능력이 부족한 학생을 쉽게 비난하면서도 명문대 진학생 수를 자랑하는 학교를 나왔다. 군대에선 병사가 공을 세우면 지휘관이 표창을 받는다. 한강의 기적은 과로에 시달리던 일반인들이 아니라 이 사회의 독특한 미풍양속 때문이란다. 대학과 기업에선 성인이 되었으니 개성을 가지라 부추기지만, 개인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는다. 개인성과 개인이 분리라도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개성을 갖도록 하는 건 필연적으로 집단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집단에 아무 쓸모가 없는 개성은 손가락질의 대상이다. 그러나 집단의 이익과 유리된 개인의 존재 가능성이야말로 개인주의의 모순 없음의 지표이다. 이때 필요한 개인은 그냥 개인이다. 개인주의를 굳이 펼칠 필요가 없다. 여기서 개인은 공과 사의 구분이 철저해지면서 탄생한다. 개인이 된다는 것은 퇴근하면 회사원이 아니게 될 때, 생활관에선 병사가 아니게 될 때, 심지어는 취미생활을 할 땐 가족이 아닐 수 있을 때 이루어진다.

개인주의가 성공적이려면 누구든지 간에 개인일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개인이 온전히 개인일 수 있으려면 개인 간의 상호존중이 밑바탕에 있어야 한다. 개인주의가 건전해질수록 역설적으로 느슨한 공동체주의에 가까워지며, 이때 발견하는 사회의 얼굴은 원래의 공동체주의가 잃어버렸던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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