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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성우 Nov 20. 2022

상승하는 자는 추락하기 마련이다

Birdman

[버드맨], 한국에서 개봉한지 무려 7년이나 되었다! 지금 당장 개봉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현대적인' 영화. 동시에, 근대적 '극장'을 옮겨놓은 듯한, 인문학적 영화.


어떤 배경을 통해 이해해야 좋을지에 대해, 직접적인 단서는 드물다. 플롯만 보았을 때는, 한때 [버드맨]이었던, '퇴물' 히어로 연극인의 재기를 위한 몸부림, 그리고 추락과 상승 정도로 볼 수도 있다.


혹은, '예술' 너머 예술인에게 주어진 리얼리티적 숙명에 대한 이야기.


혹은, 예술에 선행하는 리얼리티의 잔혹함.


[버드맨]은 리건의 과거이자, 분열적 자아이다. 리건은 한물간 20세기 연극의 각색본을 무대에 올려 '다시' [버드맨]이 되기를 원하고, 또 그래야만 한다. 연극적인 의미에서도, 현실적인, 혹은 경제적인 이유에서도,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철학적인 이유에서도.


리건은 화려한 과거를 가지고 있고 이를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점에서, 즉 온전히 잊히지 않은 인물이라는 점에서 비극적 존재다. 단순히 지난 과거에 잡어 먹혀 현실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이라고 매도하기에는, 그의 명성의 현재와 새로운 시도들은 마냥 낡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사람들에게 너무 오래 남았고, 그에게 계속해서 격정적인 충동을 속삭이는 [버드맨]은 아직 그 안에 살아있다.


그리고 기회는 실재했다! 전적으로 그의 기준이지만 격정 없이 연기하는 평범한 배우들 사이에서, '마이크'라는 반항아가 샛별처럼 등장한다. 그는 무대 위에서 난동 피우고, 자기 멋대로고, 폭력적이며, 반항한다. 연기만큼은 천재적이고, 광기를 내재한 리건에게 그는 하나의 영감이 된다.


하지만 마이크는 무대 아래에서도 여전히 반항한다. 깃을 치켜세운 피코트와 꼬나문 담배,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거친 언동은 실존주의 작가이나 철학자 알베르 카뮈의 이미지를 닮았다. 감각을 무디게 하는 모든 리얼리티와, 꾸며낸 감정을 강제하는 연극 무대 사이의 부조리에 대한 반항. 그는 무대에서만 진실을 말한다.


이러한 반상황적 행위들은 연기에서의 천재성을 비추지만, 카뮈라기보단 니체에 가까운 리건의 심기를 건든다. 둘 사이의 불협화음은 엇박자의 재즈음악으로 예고된다.


리건이 니체적이지만 마음 놓고 격정을 뿜을 수 없는 이유는 그가 아버지라는 데에 있다. 혹은, 곧 아버지가 될 수 있는 부성적 존재(극 중에서 리건은 둘 다에 해당한다). 연극적 현실에 대한 어설픈 감독, 애쓰는 각본가. 그의 딸 샘과 전부인은 그의 격정을 잠재울 수 있는 치유이기도 하지만, 그가 온전히 광기에 몸을 맡길 수 없게 하는 제약이기도 하다. 광기는 그의 가족을 다치게 하고, 그나마의 관계도 망가뜨린다.


영화의 원테이크 촬영기법은 혼란스러운 브로드웨이 극장가의 연극적이면서도 무엇 하나 제대로 연기할 수 없을 만큼 순식간에 변하는 상황적 현실을 담는다. 배우들은 무대에서 연기하기 이전에, 이미 연기하고 있고, 어쩌면 '배우'라는 존재(혹은 강제된 직업)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이름 없는 대중 앞에서 연기하지만, 비평가의 악평에 하루아침에 몰락할 수도 있는. 그리고 그 둘 사이의 전통적인 간극을 메울 가능성을 시사하는 SNS(특히, 트위터). 리건은 진정 예술성 있는 배우이기 전에 유명한 히어로물의 주인공이었고, 대중은 그를 연예인(celebrity)으로 기억했다.


우연찮게 연예인으로서 광대적 명성을 날리게 된 리건은 다시 성공적인 배우가 될 수 있었지만, 그는 무대에서도 광대가 될 바에 자살한다. 그러나 그 광기가 그를 다시 [버드맨]이 되도록 했다!(무대에서 권총을 빼어 든 그가 마이크나 비평가를 죽이기에 단념했음은 물론, 자살에도 실패했기 때문에.)


비평가는 그를 새로운 초사실주의를 구현한, 미국 극장가의 잃어버린 가치를 되찾은 배우로 극찬한다(이 영화 장르가 초사실주의인 건 안 비밀). 그리고 그 기사의 제목은 "The Unexpected Virtue of Ignorance"(예기치 않은 무지의 미덕).


확실히 그는 [버드맨] 이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혹은 다시 [버드맨]이 되는 것 이외에는. 그리고 '자신'을 죽임으로써 다시 한번 [버드맨]이 된다. 병원에 누워 스포트라이트를 온몸에 받는 리건. 그로 인해 분열적 자아를 청산할 수 있었던. 그러고 나서 새를 따라 창문으로 나가, 하늘로 날아간, 이로써 자살을 완성시키고 온전한 [버드맨]이 되는 배우.


연상되는 단어: 예술인, 극장, 무대, 시네마, 블록버스터, 히어로, 가장, 아버지, 부성, 언론, 인기, 비평, 상승, 추락, 자살적 충동, 파토스(pathos), 이카루스, 반항하는 실존, 사르트르와 카뮈, 그리고 둘 이전의 니체.


추락한 니체적 인간들의 행위 집합.


내가 삶에서 갈망할 수 있고, 그렇기에 두려워하는 모든 것들. 누구도 예술가의 영광을 누리는 삶을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못한다. 자신에게 날개가 없음을 깨닫기 전까지는.


하지만 상승하는 자는 추락하기 마련이다. 새조차도 목을 축이려면 땅을 딛어야 한다.


인간에게 하강은 허락되기 어려운 이미지다.


+) 이 영화에서 음악을 활용하는 방식이 매우 흥미로웠고 띠용한 포인트들도 많은데 한 번 봐서는 제대로 알기 어려운 것 같다. 엇박 재즈와 드러머는 인물 간, 그리고 자아간 분열을 나타내는 듯했지만,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 2악장을 활용한 무대는 미지수다. 왜 하필 그 음악이었을까?


+) 한국적인 배경에서는 다소간 거리를 둘 필요도 있을 것 같다. 혹은 새로운 현대적 감각에서도... 그 철학자의 시대 역시 저물었다면 저물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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