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승광 Mar 21. 2024

왜 '엄마미소'는 없을까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살펴보았으니 이제 그 안으로 들어가 봅시다. 가족 안을 민주주적 시선으로 살짝살짝 걸어보는 겁니다. 맨 먼저 들여다 볼 사람은 엄마입니다. 4년 전 일기를 꺼내어 다시 써봅니다.


작은 애는 지 엄마를 졸졸 쫓아다녔습니다. 어찌된 게 키가 딱 엄마 중간일까요? 애 얼굴이 엄마의 엉덩이에 붙었습니다. 밥솥으로, 인덕션으로, 식기세척기로…. 엄마가 걸음을 종종대며 옮길 동안, 작은 애의 발 또한 방향을 열심히 옮겨대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계속 그러면 엄마가 방구 낀다? 엄마의 의도는 영 반대였겠지만, 아이에게 그 말은 더 달싹 붙으라는 말과 다름없습니다. 까르르. 


그러다 쿵. 아앙~ 역시나입니다. 씽크대 모서리에 부딪혔습니다. 이런 광경의 끝은 언제나 울음입니다. 엄마가 아이의 얼굴을 손으로 감쌉니다. 그러니까! 엄마가 다친다고 했지? 말은 호통인데, 말투와 몸짓은 어르달램입니다.


이 광경을 적당한 거리에서 계속 지켜보던 제 입가가 올라갑니다. 이게 바로 아빠미소일 겁니다. 울음이든, 땡깡이든, 그저 내 딸이기에 웃음이 나는 것. 신이 있다면 아빠미소를 닮지 않았을까요?


스스로의 미소를 알아차리며 흐뭇해집니다. 하지만 잠시였습니다.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왜 '엄마미소'라는 말은 없을까? 이 질문을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궁금증은 이내 반성으로 돌아왔거든요.


제가 잊고 있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미소는 넉넉함과 여유를 필요로 한다는 것.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는 미소가 나올리 없습니다. 폭소와는 다르게 미소에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다른 이와 떨어져서 혼자 무엇인가를 되새김질할만한, 그것이 꼭 이성적일 필요는 없을지라도, 음미할만한 시간적 여유가 필요합니다. 


시간뿐일까요? 공간으로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감촉 언저리에 닿을만한 여유적 공간. 정확히 말하자면 닿기만 할, 팔을 뻗어 꼭 안겠다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결단을 하지 않는 한 그저 대상과 닿기만 할 물리적 거리가 필요합니다.


Photo by Vincent Delegge on Unsplash


다시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왜 ‘엄마미소’는 없을까요?


아내에게는 적당한 거리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항상 딸아이와 부대낍니다. 딸애의 행동 하나하나를 음미하고 되새길만한 여유가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가끔은 있었을 겁니다. 가끔. 하지만 말 그대로 가끔일 뿐입니다.


폭소스러운 남자들이 여자들의 미소에 반해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둘 사이에 태어난 딸아이로 미소를 짓고 있는 이들은 대부분 그 남자들입니다. 많은 수의 여자들이 미소를 잃고 폭소를 떠안습니다. 미소에 반해 미소를 얻은 그들과, 미소를 잃은 채 폭소를 얻은 그녀들. 미소와 폭소의 불균형만큼이나 가족 내 양육은 어그러져 있습니다.


이전 12화 동성혼, 민주주의적 시선으로 바라보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