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 후기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슬램덩크에 별다른 추억이 없다. 오히려 그 시대에는 한글도 깨치지 못했으며, 이후로도 다른 만화들을 더 좋아했다. 그래서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개봉했을 때도 시큰둥할 따름이었다. 대개 이런 종류의 영화는 그 시대의 추억을 공유하지 않은 사람들에겐 그다지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늘 그렇듯이 구태여 찾아 볼 마음은 거의 없었는데, 우연히 영화의 OST를 듣게 됐다. 그야말로 취향 직격. 영화에 대해서도 괜히 호기심이 생겼다. 더욱이 영화 자체도 괜찮다는 이야기가 주변에서 들려왔다. 호평에는 이유가 있을테니 기왕이면 영화관에서 봐두는 게 좋을 것 같아 망설이지 않고 극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애써 찾아온 보람이 있을 만큼 영화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만화 <슬램덩크>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 영화로, 산왕공고와의 경기를 송태섭(미야기 료타)의 시점에서 풀어내고 있다. 원작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만화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북산과 산왕의 경기가 어떻게 끝날지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렇기에 원작과 동일한 내용을 구태여 강백호(사쿠라기 하나미치)의 시점에서 되풀이하지 않은 데에는 원작의 작가이자 이번 영화의 감독을 맡은 이노우에 타케히코의 안배가 엿보인다.
강백호의 이야기로서, 만화 <슬램덩크>는 그 자체로 완결이 났다. 제아무리 그 이야기를 스크린에 고스란히 옮겨놓는데 성공하더라도 원작의 재현에 그칠 것이고, 재현을 목적으로 한다면 도리어 실패할 가능성이 더 농후하다. 어떻게든 원본을 따라가려 해도 따라갈 수 없는, 리메이크 극장판이 가지는 태생적인 한계 때문이다. 동일한 이야기로는 그 퀄리티를 넘어설 수 없다는 문제도 있지만, 다른 차원의 어려움도 존재한다.
독자의 감상은 변하지 않는 영원불멸한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자들이 원작을 접했던 그 순간과 지금의 조건이 완벽히 똑같지 않은 이상 원작에 대한 그때 그 시절의 감상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독자의 앞에 가능한 있는 그대로 원작을 가져다 놓아도, 그들은 전혀 다른 감상을 내놓을 것이다. 그래서 슬램덩크 극장판 역시 달라질 필요가 있었다. 원작자 이노우에 다케히코 본인이야말로 그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원작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던 송태섭이라는 인물을 중심에 놓은 시도는 훌륭했다. 같은 이야기라도 다른 인물의 시점으로 원작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음은 물론, 결말에 이르는 과정을 다르게 채워나갈 수 있다. 독자의 감상도 달라지게 되었고, 원작을 알고 있던 이들에게 색다른 느낌을 선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원작을 모르던 이들도 영화의 전개를 따라갈 수 있도록 원작의 몇몇 장면들을 과감하게 생략한 결단도 돋보였다. 전후 맥락을 모르는 상황에서원작의 팬이 아니라면 쌩뚱맞게 느껴질 장면들이 사라진 덕분에 전개에도 속도감이 더해졌다. 원작을 기억하는 팬들에게는 영상으로 재현되었으면 하는 장면들이 아예 사라져서 아쉬움이 남을 수 있겠지만, 모두가 어느정도 만족할 수 있는 결과가 아니었나 싶다.
그러면서도 이야기의 핵심은 놓치지 않았다. 바로 소년의 성장이다. 원작은 강백호가 농구를 만나 성장하는 과정이었다면, 영화는 농구를 통해 자신의 그늘과 마주하고 극복해나가는 송태섭의 성장과정을 다루고 있다. 두 인물은 경박하다는 점에서 언뜻 비슷해보이지만, 결이 조금 다르다. 송태섭의 여유로워보이는 모습의 이면에는 그렇지 않고서는 스러질 것 같은 위태로움이 숨어있다.
송태섭은 아버지를 잃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믿고 의지하던 형마저 잃게 된다. 송태섭의 어머니도 두 사람의 빈자리에 불안해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도 위태로웠던 건 송태섭 본인이다. 주변을 신경쓰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강백호가 행동과 말을 과장스럽게 꾸며대는 타입이라면, 송태섭은 미소를 띄운 모습으로 여유있는 척 하는 타입이다.
송태섭은 남들, 특히 어머니에게 자신이 괜찮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괜찮다는 듯이 굴어야했을 것이다. 오직 농구만이 그 순간들을 견딜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었다. 아무런 생산성이 없는 공놀이에 몰두하면서 한 소년의 인생이 바뀌어가는 과정은, 지켜보는 이들로 하여금 덩달아 벅찬 감정에 빠져들게 만든다.
어찌보면 참 별 것 없는 이야기다. 농구의 룰도 제대로 모르고, 땀내나는 고등학생들이 농구 경기를 할 뿐이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에는 감동이 있다. 고작해야 공 하나에 수많은 사람들이 울고 웃는 게 참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스포츠, 그리고 만화의 본질이 그곳에 있다. 다른 이들에겐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그 일을 통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까지 이루게 되는 것.
누가 무엇이라고 하든, 최선을 다하는 일. 그래서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는 감동이 있다. 그리고 더욱 큰 놀라움은 그렇게 최선을 다하는 일이 때로는 보답을 준다는 것이다. 원작 슬램덩크는 기어코 산왕공고를 이겼음에도, 북산은 그 다음 경기에서 탈락하고야 만다. 몹시나 현실적이게도 승승장구하는 일은 없었다는 듯이. 작가의 냉철한 현실 감각을 엿볼 수 있다. 심지어는 주인공 강백호의 선수 복귀마저 요원한 상태에서 만화가 끝이 난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는 굳이 그 사실을 비춰주지 않는다. 오히려 경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마주 보고 인사를 나누는 송태섭의 모습을 담백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미국으로 진출한 정우성의 맞은편에 서서 경기에 나서는 송태섭을 비추며, 원작의 결말과는 달리 어떤 희망 같은 걸 엿볼 수 있게 만든다. 삶의 밑바닥에서도 최선을 다해 치고 올라온 이가 맞이한 보답이라고 해야할까.
그리고 언젠가 맞이할 그 순간을 위해서라도 자신의 무대에서 보일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아 한다. 산왕공고와의 대결이 진정으로 멋진 이유도 그 경기에 참가한 모두가 자신의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능성을 포기하면서까지 몸을 내던진 강백호와, 자존심을 접어두고 비로소 팀 경기에 나선 서태웅이 나누는 박수가 아름다운 것도, 뜨거운 눈물을 흘린 정우성의 모습마저도 전율을 불러일으킨 것도.
물론 장점만 있는 영화는 아닐지 모른다. 영화는 북산과 산왕의 경기, 그리고 인물들에 얽힌 사연을 교차편집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데 긴장과 이완을 통한 완급 조절의 측면에서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송태섭의 과거가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점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어떤 영화는 좋지 않은 점에도 불구하고 그 단점마저 좋아하게 되는 것 같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그 단점마저도 아름답게 바라보게 된다. 나에게는 추억조차 아니고, 그저 좋은 만화 중 하나일 뿐이었지만 모처럼 가슴 뜨거운 이야기를 볼 수 있었음에 몹시나 감사한다. 이렇게 감상을 남긴 것도 지금을 추억하기 위해서다. 또 언젠가 이 순간을 돌아볼 때, 그 감정들을 생생히 떠올리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