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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희 Jan 18. 2023

뮤지컬과 영화의 차이

영화 <영웅> 리뷰

이것은 뮤지컬이 아니다.

뮤지컬과 영화는 다르다. 그렇기에 만드는 방법도 다르고, 감상하는 방식도 달라야 한다. 너무나 당연해서 입 아픈 소리 같겠지만, 그 당연한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면 문제가 될 것이다. 영화 <영웅>의 문제도 여기서 시작된다.



영화 <영웅>은 안중근 의사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뮤지컬 <영웅>이라는 원작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안중근이라는 인물과 하얼빈 의거라는 역사적 사건을 원작인 뮤지컬의 노래와 장면으로써 보여주려고 한다. 이 과정이 너무 성실하게 이루어진 나머지 영화라 말하기 어려워진 셈인데, 거듭 말하건대 이것은 뮤지컬이 아니라 영화이고 그래서 실패가 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저 남자를 알지 못한다

가령 영화의 첫 장면을 보자. 왜 저 남자는 설원을 걷고 있을까. 그리고 왜 갑자기 손가락을 자르면서 노래를 부르나? 뮤지컬 원작을 알고 있는 관객이라면, 그 장면이 어떤 연유에서 나왔는가 대강 짐작이라도 해볼 수 있지만 원작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처음 봐서는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는 장면이다. 남자 혼자 설원을 걸어가는 비장미조차도 이해하기 힘들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곧이어 더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 이어진다.



절규하는 남자의 뒤로 갑자기 등장한 사람들은 대체 누구인가? 거기다 이들은 왜 이렇게까지 감정에 북받쳐 있을까? 아무래도 귀신은 아닌 것 같은데 아무것도 없던 숲에서 형체를 드러낸 인물들과, 그 중심에 있는 정체 모를 남자는 눈부신 햇살을 맞으며 노래를 열창한다. 그들의 모습은 제3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감동적이라기보단 냉정하게 말해 어딘가 기괴하기까지 하다.


물론 이 영화는 안중근 의사에 대한 영화고, 그래서 관객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설원을 가로지르는 남자가 안중근 의사일 것이라고 충분히 짐작해 볼 수는 있다. 더욱이 뮤지컬의 시작이 영화와 동일한 수순이었다면, 이 영화는 '뮤지컬'의 그것을 아주 잘 살린 셈일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원작을 바탕으로 했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똑같을 필요가 있었을까?


그 이유를 짐작해 보자면 그저 뮤지컬의 넘버들을 최대한 영화 속엔 녹여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혹은 고민도 하지 않고 뮤지컬을 그대로 작품 속에 녹여낸 게으름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첫 장면만 그런 게 아니어서 영화 내내 의아함은 잦아들지 않는다. 바로 다음 장면도 마찬가지인데 안중근 의사가 가족들과 이별한 후 고향을 떠나 독립군 활동을 이어나가는 장면을 보자. 전투 자체는 이상할 것이 없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무능하고, 불가해한.

안중근이 독립군에 참여한 전쟁은 몇 차례 성공으로 이어진다. 그 와중에 일본군 포로를 붙잡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안중근은 철천치 원수인 일본군이라 할지언정 그 개인에게 죄를 물을 수 없고, 전쟁법상 포로를 살해해서는 안 된다며 병사들을 만류한다.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다. 하지만 이후 살아나간 일본군 포로가 본대를 호출하여 독립군 진지를 초토화시키며, 안중근 의사는 그저 순진하게 인간의 선의를 믿은 멍청이가 되고 만다.



실제 역사에서도 안중근 의사의 독립군 활동은 그 결과가 좋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영화에서는 어설픈 선의로 독립이라는 대의를 그르치고 동료들까지 죽음으로 몰아간 무능함이 더 도드라진다. 더욱이 그때의 포로가 집요하게 안중근 의사를 따라다니는 것으로 묘사되면서 제 손으로 문제를 일으킨 것처럼 묘사된다. 서사의 긴장을 부여하기 위한 상상의 영역이었겠으나, 가뜩이나 이해하기 힘든 인물을 멍청이로 만들어놓은 셈이 되었다.


어떻게 이해해 보려고 해도, 안중근은 제대로 매듭을 짓지 못하다가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겨우겨우 성공한 인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평생을 고민해왔을 조국 독립에 대한 열망이나 결기 어린 선택들조차도 매우 뜬금없이 이루어지는 모양새를 하고 있어서, 제아무리 안중근 의사에 대한 배경지식을 알고 있는 관객조차도 그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과잉된 감정

어디 이해할 수 없는 게 이뿐이겠는가. 인물들의 감정도 마찬가지다. 인물들의 감정에 이입하기 위해서는 영화는 훨씬 더 세심하게 이야기를 안배할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가 한국인의 입장에서 감정 이입하기 쉬운 사건이라고는 해도, 그 과정에 도달하기까지의 고뇌와 갈등을 좀 더 밀도 있게 다루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오히려 단편적으로 묘사되는 일본군의 감정은 직관적으로 이해가 된다. 관객이 친일이나 제국주의자여서가 아니라, 극 중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감정은 아주 단순해서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반면 혹독한 현실에서 독립에 나서야 하는 이들의 감정은 아주 복잡하다. 목숨이 달려있는 상황에서 의기만으로 행했다고 설명하기에는 일반적인 이해로는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더욱이 그저 숭고하게만 그려서는 외려 거부감을 살 뿐이다.


영화 <영웅> 속의 안중근 의사는 그 감정과 연기가 모두 과장된 톤으로 보이는데, 배우의 연기만 놓고 보면 뮤지컬을 최대한 살려내기 위한 시도였겠으나, 뮤지컬의 연기톤이 그대로 영화로 옮겨졌을 때 화면을 가득 메우는 비장함은 실존 인물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어떻게든 더욱더 비장해 보이려는 우악스러움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하게 말해야 할 점은 이건 배우들의 문제가 아니라 연출의 문제라는 점이다.


뮤지컬이었다면 오히려 장점으로 부각되었을 것이다. 무대 위의 배우의 연기를 모두가 볼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먼 곳의 관객석에게까지 충분히 전달되어야 하니까. 하지만 카메라 렌즈를 통해 지근거리에서 관찰하게 되는 영화의 특성상, 뮤지컬에서나 통용되는 연출은 과장된 탓에 진정성마저 의심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것은 연기뿐만이 아니라, 인물을 보여주는 방식과도 결부된다.


도대체 누가 주인공인가.

영화 속에서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는 거의 나올 틈이 없다. 뮤지컬의 넘버도 보여줘야 하고, 그래서 주변 인물들에 지나치게 포커스가 맞춰진다. 때문에 이 영화에서 뜨악한 점은 서사와 인물뿐만이 아니다. 뮤지컬 넘버에 따라 극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롤러코스터처럼 급격히 치솟았다가 다시금 가라앉기를 반복하는데, 그 정도가 완급 조절이라고 말하기 힘들 정도다.


오히려 극의 몰입을 방해하는 수준인데, 뮤지컬이었다면 각각의 넘버별로 하나의 씬이 온전히 마무리되기 때문에 넘버에 따라 분위기가 바뀌는 것을 감안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고 있는데, 사건 전개와 인물의 정을 납득시킬 충분한 설명도 없고, 분위기는 장면마다 널을 뛰니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 할지 관객의 입장에선 난감할 따름이다.


바로 여기서 비중의 문제가 나온다. 만두에 대한 노래는 왜 넣었을까? 궁녀의 이야기가 그렇게 중요했을까? 이토 히로부미의 위치를 알려주던 내통자가 그렇게나 이토 히로부미 가까운 곳에 있었다면 오히려 그 사람이 암살을 하는 게 더 자연스럽지 않나? 물론 영화에선 그걸 설명하려는 듯이 암살 시도를 했다가 실패하는데, 여기서 또 한 번 쓸데없이 이야기의 비중을 차지한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분명히 나쁜 영화만은 아니다. 어떤 장면들은 생각보다 괜찮았고 원작 뮤지컬의 노래도 몇몇 군데에서는 좋았다. 그리고 좋은 뮤지컬을 알리고 동시에 안중근 의사에 대해 또 한 번 조명하고자 하는 의도도 좋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온갖 좋은 의도가 영화의 좋지 않은 만듦새에 대한 면죄부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영화 <영웅>은 영화로서의 기본을 지키지 못하고 감정만을 자극한다. 결의에 찬 안중근이 동료에 대해 흘리는 눈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자식의 수의를 손수 만들어 보내는 어머니의 모습, 연인을 눈앞에서 잃은 젊은이의 절규, 영화 내내 어떻게든 관객의 눈물을 짜내기 위해서 갖은 애를 쓴다. 우리는 말초적인 자극에도 눈물 흘리고 웃음 지을 수는 있겠지만 그 외에 다른 무언가를 얻어가지는 못할 것이다. 


추신.

영화에 대해서 힐난하는 태도로만 감상을 적는것도 좋지 않을 듯 한데, 내 솔직한 기분에 충실한 것과 좋은 글쓰기에 대한 고민이라는 양자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기란 언제나 힘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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