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핏의 맛] 18. 1000일 기록
1.
지난 2023년 9월 5일, 크로스핏 박스에 나가서 운동을 한 지도 어느새 999일. 다가올 1000일을 기념하여 미리 글을 써둔다.
*실제로 글을 마무리한 건 1004일째를 맞이한 월요일이다.
2.
크로스핏을 시작한 지 1000일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내가 크로스핏을 시작한 날짜는 2019년 9월 23일이다. 곧 있으면 4년을 꼬박 채운 셈인데, 1000일은 한참 전에 지났다고 할 수 있다.
실질적으로 크로스핏을 시작한 날짜를 따지다면 2016년 9월 7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겠으나, 그때는 1달 반만 다니고 그만두었기에 전체 경력에 포함시키기 애매하다고 할까.
그때도 나름 진심이기는 했다. 처음 체험을 한 이후로 호기롭게 3개월을 등록하고 프로모션을 진행한다기에 추가로 3개월을 더 등록해서 총 6개월, 장장 반년을 등록하고 1달 반만 다닐 줄이야.
부끄러운 기억이다.
3.
아무튼 내가 크로스핏을 시작하게 된 이야기는 이전 글에서도 몇 번이나 반복했기 때문에 -어떤 글에서 얼마나 이야기했는지 세어보는 것도 민망한 수준이다- 혹시라도 내 글을 유심히 읽어주신 분들이라면 또 그 이야기냐고 귀에 딱지가 않겠다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다.
그럼 처음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 4년이 다 되어간다면서 크로스핏을 1000일 동안 했다고?
수에 밝은 분들이라면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으리라. 단순히 계산해 봐도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 2019년 9월에 시작했는데 왜 1000일인가? 이것 또한 이전 글에서 몇 번 반복한 이야기지만, 저 1000일이란 숫자는 순수하게 박스(체육관)에 나가 운동을 했던 날짜만 세었을 때 나온 숫자다.
사실이냐고 묻는다면, 사실이 맞다고 99% 정도의 자신감을 담아 대답할 수 있다. 1%가 비어있는 이유는 조금 애매한 날짜도 있어서인데, 엄밀한 기준을 적용하자면 대회라든지 이벤트성 행사로 박스에 간 날짜는 빼야겠으나 일단 박스에 가서 운동 비슷한 것이라도 했다면 무조건 크로스핏을 한 날짜로 셌다.
심지어 인스타에 하나하나 기록을 해두었으니 이보다 확실할 수가 없다.
언뜻 기억하기로는 첫날은 따로 기록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착각이었나 보다. 어김없이 2019년에 크로스핏을 시작한 날도 기록되어 있었다. 하긴 사소한 것도 괜히 기록부터 하고 보는 나에게 있어 크로스핏을 다시 시작한 첫날만큼 중요한 날이 또 있었을까. 기록을 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
다만 지금과 업로드하는 방식이 달라서 의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여하튼 1000일을 맞이하기 며칠 전, 감상에 잠겨 일일이 인스타그램에 들어가서 그간의 기록들을 확인해 봤다.
스크롤이 너무 길어서 한참을 내려가야 했는데, 다시 한번 최근에 이르기까지 기록들을 주욱 훑어보면서 여러 감상에 잠겼다. 애초에 인스타그램을 시작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던 것 같지만, 크로스핏을 시작하고서부터는 크로스핏에 관한 게시글로 피드 대부분을 채우게 됐다.
내 크로스핏 인생의 집대성이라 해도 좋을 기록물이 된 셈이다. 그리고 그렇게 인스타를 살펴보며 나는 세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4.
첫 번째로, 의외로 운동을 그렇게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막 크로스핏을 시작한 즈음의 기록들을 보면서 불현듯이 알게 되었다. 왜 이렇게 많이 쉬었지? 처음부터 운동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한 줄 알았으나, 자의로 운동을 쉰 날이 꽤 되었다
애초에 하루하루 운동을 나가는 일 자체를 힘겨워하는 게 글에서도 느껴졌다.
하루 나가면 기뻐하고, 또 다음 날 나가면 괴로워하면서도 뿌듯해하는. 그럼에도 그다음 날에 운동을 가라고 하면 마음속으로 한참을 번민하다가 겨우 집을 벗어나는 전형적인 운동 초보의 모습이었다.
언제부터 운동 -정확히는 크로스핏-에 진심이 되었는지는 도저히 모르겠다. 아마도 서서히 스며들었던 게 아닐지. 기록을 한참 들여다봐도 그다지 진심이 느껴지지 않아서 어쩌면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렇게까지 진심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초심을 되찾자는 말은 나에겐 적어도 하나마나한 말이다. 초심이 아니라 오히려 앞으로도 꾸준히 하자는 말이 더 나을 것이다.
두 번째로, 1만 시간의 법칙에 따르면 나는 아직도 멀었다는 것.
보통 크로스핏 박스에 나가면 어쩔 수 없을 때는 1시간, 평상시에는 2시간 남짓, 여유가 있을 때는 2시간 이상도 체류하곤 한다. 1000일이란 날짜를 고려하면 약 2000시간을 크로스핏에 쏟아부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시간 내내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와드를 한 시간만 따지면 짧으면 10분, 길어지면 한 시간 정도다. 너그러운 기준으로 평균값을 1시간으로 두고 계산해 봐도 1000시간을 겨우 채우는 수준이다.
1만 시간의 법칙에 10분의 1 수준. 지금까지 4년 운동을 했으니 40년을 더 운동을 해야 1만 시간에 이른다.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 1만 시간을 꼭 채워야 한다는 건 아니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는 걸 깨달았다고나 할까.
세 번째는, 의외로 실력이 괜찮았다. 예전의 기록을 보고 대체 이걸 어떻게 했나 의구심이 드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을 텐데, 너무 기록이 좋다고 해야 할까. 지금 다시 한다고 해도 내가 과연 과거의 나를 이길 수 있을지. 자신의 노력에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 건지, 이대로 안주하지 말고 더 노력해야 할지 복잡한 심정이다.
언제나 과거의 나를 이기기 위해서 애쓰긴 하는데, 그럼 언젠가 미래의 내가 나를 보고 똑같은 생각을 할 모습을 상상하면 쓴웃음이 지어진다.
그래, 늘 그래왔듯이 지금의 최선을 다하도록 하자.
5.
1000일이라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그날 하루는 잠시 뿌듯했다. 내가 이 운동을 1000일이나 했구나. 하지만 나의 목표는 단순히 날짜를 채우는 데에 있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도 건강하게 운동할 수 있는 것. 운동이 곧 생활이 되는 것.
기왕이면 잘하면 좋겠지. 하지만 잘하지 않더라도 꾸준히 할 수 있기를. 언젠가 10000일을 맞이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