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쟨 보통내기가 아니야."
'보통' 이상이라는 메시지였지만 긍정적인 의미는 아니었다. 그냥저냥 넘어가도 될 일을 구태여 끄집어내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게 왜 잘못인지 머리론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마음 깊이 깨닫고 있었다. 내게 문제가 있다고.
어릴 때부터 내가 배운 건 '정의로움'이었다. 잘못된 부분은 문제 제기를 하고, 법과 규칙, 상호 간 계약에 의해 굴러가는 사회. 이게 내가 사회화 과정에서 터득한 세상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마주한 세계는 너무도 달랐다. 인지부조화가 일어났다. 타인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물음표를 삼킬 때마다 그 뾰족한 끝이 나를 찔러댔다. 사정없이 생채기를 만드는 이 부호를 꺼내고 싶었지만 어쩐지 손이 닿지 않았다.
왜 내게 불공정한 계약을 요구하냐고,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선명하게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 말을 완전히 꺼내지 못하고 넣었다 빼기를 무한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 조금씩 깎여나간 날것의 감정들을 주워다 부드럽게 뭉쳐냈다. 나는 당신과 싸우고 싶은 게 아니다, 당신을 비난하려는 목적도 아니다. 그저 궁금할 뿐이다.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당신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지, 서로에게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마음은 없는지. 그러니 제발 대답해 달라. 하나를 물어보기 위해서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설명이 필요했다. 대화할 때마다 피로도가 쌓여 갔다. 내게 들이닥친 문제를 해결하고자 꺼낸 말이었지만 감정으로 맞서는 사람들을 보며 한숨이 늘어갔다. 싸움닭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호구도 싫었기에 뾰족하게 날을 세웠다. 이 구역의 미친년이 되기 위해서. 그런데 갑자기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시작은 말 한마디였다.
“담아 님은 일대일에 강하세요.”
달리 말하면 여러 사람을 상대하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새로운 사람이 수시로 나고 드는 곳에서 여러 사람을 잘 맞이하지 못하는 건 분명 마이너스였다. 뛰어난 업무 능력을 가졌더라도 적당한 능글거림, 둥글둥글한 사회성같이 다른 미덕마저 고루 갖춰야 할 마당에 필수적인 능력마저 갖추지 못하다니. 경쟁이 디폴트인 사회에서 도태되기 딱 좋은 포지션이었다. 그런데 공격은커녕 심한 낯가림과 떨어지는 사회성을 아름답게 포장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청소가 주된 업무인 생활에서 손이 느리고 손끝이 야물지 못한 나를 ‘멘탈 케어를 담당한다’고 표현했다.
서울에서는 잘 듣지 못했던 말이었다. 삐거덕대면 서툴러서, 열심히 하면 튀어서 ‘유난이다’라는 평을 들었다. 일을 빨리 처리하는 나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진다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 거나 ‘사회성을 키워라’는 조언의 외피를 쓴 비난도 익숙했다. 그럴수록 나는 가시를 세웠다. 아는 척, 가진 척해야 했기에. 하지만 괜찮은 척만 하기에도 버거웠다. 그런데 갑작스레 날아드는 따스함에 잔뜩 세운 가시가 속절없이 녹아내렸다. 서울에서도, 이곳에서도 나는 분명 변한 게 없는데, 마치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나를 멋지게 만들어준 그 사람의 시선을 따라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나의 강점을 들여다보았다. 어쩌면 생각했던 것보다 내가 조금은 더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피어올랐다. 아주 사소한 나의 좋은 점에 숨을 크게 불어넣고 싶어졌다. 아주아주 크게 부풀어 오르도록.
“You make me want to be a better man.”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 나오는 대사가 떠올랐다. 사랑에 빠진 주인공이 상대에게 하는 말. 내게도 이런 마음이 생겼다. 그들과 함께 할수록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를 멋지게 바라보는 그들의 오해를 진실로 만들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