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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봄 Nov 17. 2022

맨 처음 도둑질이 있었다

감정이 말을 걸다 #둘

열 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숙제로 그림 한 장을 그려오라고 했다. 숙제로 내는 그림은 대회에 제출될 거라고. 꽤 큰 규모의 대회라고 들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꼭 상을 받고 싶었다. 창작 능력은 부족해도 카피 능력은 있었던 나는 집에 있는 백과사전을 뒤져 마음에 드는 그림 하나를 골라 비슷하게 그려 제출했다.


어둑어둑한 방에서 불도 켜지 않고 백과사전을 뒤적였다. 섹션별 백과사전 전집을 하나하나 다 펼쳐봤다. 백과사전에는 수많은 사진과 그림이 있었다. 그중 유독 시선을 사로잡는 그림이 하나 있었다. 어떤 그림이었는지, 정물화인지 풍경화인지 인물화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따뜻한 느낌을 주는 색감이 좋은 그림이었다. 그림을 보자마자 ‘딱 이거다!’라는 촉이 왔고 그 자리에서 크레파스와 도화지를 꺼내 똑같이 그렸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엔 베낀다는 생각보다는 맘에 드는 그림을 내 손으로 그린다는 만족감과 뿌듯함이 있었다. 완성된 그림은 그럴듯했고 책만 가득한 방에 이런 그림 하나쯤 걸어놔도 괜찮겠다는 감상에 젖어들었다.


얼마 후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상을 받았다.

상을 받고는 싶었지만 진짜 받게 될 줄은 몰랐던 나는 몸이 부르르 떨렸다. 얼떨떨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강렬하게 사로잡혔던 감정은 ‘공포’였고, 뒤따르는 '죄책감'...


훔친 그림이라는 걸 들키면 어쩌지?

그런 그림으로 상까지 받았으니 그보다 더한 벌을 받게 되는 거 아닐까?

지금이라도 창작 그림이 아니라고, 베낀 그림이라고 고백할까?

나 때문에 간절했을 누군가가 좌절하진 않았을까?


도저히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상을 받을 수가 없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박수 소리가 채찍질하는 소리로 들렸고, 손뼉 치는 친구들의 표정이 비웃음과 야유 섞인 미소로 보였다. 도둑질을 들킨 것도 아닌데 내 발은 몸서리치게 저려왔다. 이건 정말 아닌 것 같다…


양심의 가책 때문에 그 후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미술시간이 곤욕이었다. 상을 받았다는 이유로 내 그림에 대한 기대치가 한껏 상승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의 기억은 꿈으로만 기억된다.

미술 시간은 진땀 빼는 시간이다.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이유도 제각각이다. 마감 시간에 쫓겨 그려보지만 제 때 제출하지 못해 숙제가 누락되고, 그려와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서 뒤늦게 그려보지만 이미 늦었고, 도구가 없어 이리저리 찾아 헤매다가 시간만 흐르고.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그림을 그리지 못해 ‘0’점 처리된다. 결국 숙제를 못 내고 마는 끔찍한 혼돈을 경험하고 나면 잠에서 깬 후에도 한동안 후유증이 남는다.


왜 남의 그림을 도둑질했어?

도둑 그림으로 상 받으니까 좋아?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아무도 모르니까 마음이라도 괴로워야 하지 않겠어?


지금까지도 벌을 받는 이유다.


죄책감을 안고 산다는 건 무서운 일이다.
스스로 내린 죄질에 대한 판결로 끝도 없이 자책하고 어딘지도 모를 어두컴컴한 곳에 나를 가둔다.


잘못한 걸 알면서도 아무에게도, 단 한 번도 말하지 못했다. ‘어렸으니까, 몰랐으니까, 지났으니까’는 변명일 뿐, 그 일로 인해 나는 평생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다. 그 결과 얼마나 자주 초긴장 상태의 꿈을 꿔 왔는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으며 반성했다. 라스콜니코프가 자신의 죄가 탄로 날까 몸서리칠 때마다 내 몸에도 식은땀이 났다. 그가 제발 빨리 죄를 뉘우치고 자수하기를 누구보다 간절히 바랐다. 그를 통해 마음의 짐을 던져버리고 싶었고 해방을 맛보고 싶었다. 내가 못 하는 걸 그라도 대신 꼭 해 주길 바라며 책장을 넘기는 손에 힘을 잔뜩 줬다. 다행히 그는 속죄했고 나는 환호했다. 그가 나를 구원해준 것도 아닌데 고맙고 눈물이 났다.


어쩌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지나갈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아주 끈질기게 괴롭히는 꿈이 아니었다면 그랬을지도. 잘못인 걸 알았기에, 탄로 나지 않으면 탄로 내야 스스로를 가둔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걸 알았던 것은 아닌지… 그걸 꿈이 지속적으로 알려줬던 건 아닌지… 너무 늦었지만 고백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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