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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행복했을까?(16)

엄마의 이력서(履歷書)

by 메멘토 모리

이력서. 신발(履)이 다닌(歷) 기록(書).

이따금씩 강의 요청을 받으면 나의 이력서를 보내달라고 한다. 공직 20년과 퇴직 후 10년의 이력을 간단하게 적어 보내준다. 학력, 경력, 논문, 저서, 강의실적까지 간단하게 작성한 것 같아도 이력서는 빽빽하게 채워진다. 업데이트를 할 때마다 이력서는 몇 줄씩 늘어간다. 무에 그리 한 것이 많다고...

나의 이력서는 무미건조하다. 이력서에 누구를 사랑했고, 누구와 이별하였으며, 행복했던 일, 가슴 아팠던 추억을 기록하지는 않는다. 누구를 행복하게 했었고, 감동시킨 것, 감동받은 것에 대한 기록도 없다.

엄마의 자서전을 쓰면서 엄마의 이력서를 작성해 보았다.

(출생년월일) 41년 2월

(출생지)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학력) 초등학교 졸업

(경력 및 취미)

1. 5남매를 사랑과 정성으로 성장시킴

2. 한 남편의 배우자로, 한 집안의 맏며느리로 죽을힘을 다 하셨음

3. 평생을 농업과 육체 근로를 하시며 집안을 일구어 오셨음

4. 5남매가 잘 자라준 것을 가장 자랑스러워 하심

5. 동요를 좋아하고, 버스 타는 것을 좋아하심

(희망사항) 남은 생, 자식들에게 부담 주지 않고 세상과 이별


캡처.JPG


따뜻한 봄이 오면 가족들과 엄마 자서전 출간기념회를 준비하고 있다. 그때 나는 엄마에게 드릴 ‘자랑스러운 엄마상’을 준비해 보았다.

상장

성명 : 최○○

나이 : 85세

상기인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집안의 맏며느리로 한 남편의 아내로 5남매의 엄마로 그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 왔으며, 그 어려움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한 가정을 꿋꿋이 지켜온 공로가 크며...

엄마의 이력서를 작성하며, 상장을 만들며 엄마 삶을 추억한다. 그 어떤 부정적인 문구가 떠오르지 않는 삶의 기록이다. 나에게는 감동적인 이력서였고, 상장이었다.

학력은 단 한 줄이지만 삶의 지혜는 박사보다 높다. 경력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다. 한평생을 하나의 신념으로 행동하며 사셨다. 어쩌면 무미건조한 나의 이력서보다 감동이 가득한 내용으로 10장 이상 작성할 수 있다.


85년을 살아오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온 힘을 다 하셨고, 그 누구에게 아픔을 주지 않으려고 애쓰셨고, 그 누구의 아픔을 외면하지도 않았으며, 간절하게 사셨고, 하늘의 이치대로 사셨다. 최고의 이력서다.



이력서를 작성하면서 엄마에게 바라는 것을 여쭈었다. 엄마의 마지막 희망은 남은 생,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하늘나라로 가고 싶다고 하셨다.

엄마를 모시고 병원을 찾을 때마다 엄마는 나에게 “아들아, 내가 너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는 것 같아 미안하구나. 내가 어여어여 하늘나라로 가야 하는데...” 엄마의 그 말씀에 나는 “엄마, 나는 엄마의 시간을 평생 빼앗으며 살았어요.”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어제 쓰러져 병원을 모시고 갔다. 엄마는 병원 마당에 있는 휠체어에 앉아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파란 하늘을 쳐다보신다. 나는 “이제 엄마가 하늘나라로 가시면 저 파란 하늘을 보며 엄마와 대화 나누어야 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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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이력서에 엄마 꿈을 넣지 못했다. 엄마는 꿈이 있었는데 5남매를 키우다 꿈이 무엇인지 잊어버렸다고 하신다. 살아 계시는 동안 엄마의 기억을 되살려 엄마의 꿈을 되찾아 드리고 싶다.

입원하신 엄마는 평온하게 주무신다. 꿈속에서 어릴 적 꿈꾸셨던 그 꿈과 만나길 기도드린다.

엄마가 그 꿈과 만나 오늘 밤은 행복하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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