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의 삶을 통해 바라본 후회 3
“어르신, 1960년에 결혼하셨는데, 남편과 행복하셨어요?”
“시댁이 처가에서 아주 가까웠지, 그러니 시집간다는 생각도 안 들더라고 근데 시댁 집이 좁아 신혼 때 신랑과 시어머님과 한방에서 같이 살았지. 6개월을 그렇게 살다가 신랑 친구가 시댁 가까운 곳에 공간을 내어 줘서 거기다 방 한 칸을 지어 신랑하고 신혼집을 차렸지.”
“신랑은 죽을 때까지 그것을 미안해했어. 그런데 지나고 보니 추억이야 시어머님이 나에게 참 잘해 주었거든. 집을 질 수 있도록 공간을 내어준 그 신랑 친구도 우리 부부에게는 은인이지”
“그렇게 살았으니 신랑이 얼마나 나에게 잘해 줬겠어요.” “우리 부부는 같이 오징어 배를 탔어, 남편은 선장으로 난 선원으로, 그 험한 바다에서 서로 의지하며 생계를 꾸렸어요. 사연이 너무 많아요.”
“남편이 죽은 지 30년이 됐어요. 요즘은 왜 그리 보고 싶은지...”
더 사연이 많으신 어르신이 있었다.
“인천이 고향인데 남쪽으로 시집을 갔어요. 그런데 딸이 2살 때 신랑이 죽었어. 시댁에서 쫓겨났어요. 그 시절에는 그랬어요. 내가 시집을 와 신랑을 잡아먹었다고”
“처가로 갈 수는 없었고, 강원도 인제 백담사에 지인분이 찻집을 했는데 딸을 데리고 우선 급한 대로 거기로 갔어요.” “그때 백담사에 전두환 대통령이 와 있었잖아요. 경비가 삼엄했죠. 저는 간첩으로 오인받아 경찰서에서 조사도 몇 번 받았어요.”
“또 사찰에서 가깝다 보니 스님들이 찻집에 오시곤 하였는데 딸내미를 동자승으로 입적하면 어떻겠냐고 하셨어요. 남편 없이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이 그때는 너무 힘들었어요.”
“지금의 남편은 참 인자하고 좋은 사람이에요. 하늘나라로 간 전 남편 제사를 지내줘요. 참 고마운 사람이에요.” “지나고 보니 힘든 것이 너무 많았는데 나를 구해 준 것은 사람이었어요.”
‘사랑’, ‘사람’, ‘삶’ 은 자음만 바꾸고, 모음만 빠지면 연결되는 글자다. 결국 그 어원은 같지 않을까?
“신랑이 암으로 사경을 헤맬 때 그때 처음으로 고맙다.라는 말을 했어요. 신랑은 내 손을 잡고 시집와 고생만 시켜서 미안하다고 눈물을 흘렸어요.”
“2살이던 딸내미가 이제 어른이 되었어요. 힘들었던 시간 가족들이 가장 큰 힘이 되어 주었어요. 특히, 딸내미가 가장 힘이 되었어요.”
이제 생을 정리하는 어르신들은 주로 ‘사랑’,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셨으며, 후회라는 표현보다 미안과 감사, 그리고 사과라는 말씀을 하셨다.
나와 조금 다른 시대, 나보다 힘든 시대를 관통하신 어르신들에게도 역시 삶의 핵심은 사람이었고, 사랑이었다.
한 어르신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먹고살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어요. 같이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준 남편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번 못해본 것이 후회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