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다녀와도 어디에 다녀왔는지 헷갈려하시는 엄마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고마운 사람*을 만났던, 귀여운 데빌(Tasmania Devil)이 사는 태즈매니아.
호주를 사랑하게 만들었던 나의 첫 정, 멜버른.
어디로 갈까 고심하다가 첫 여행지는 지나간 추억으로 쓸쓸한 마음이 들지 않는 곳이었으면 했다.
그래, 너로 정했다. 퍼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시드니 공항에 들어서는 순간 공항 타임존이 시작되었다. 이른 새벽이었지만 출퇴근 시간의 트레인처럼 사람이 북적였다. 그제야 피곤함에 잠시 잊었던, 여행에 대한 기대감이 떠올랐다.
7시 15분 시드니 발 비행기가 9시 20분 퍼스에 도착했다**.
퍼스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새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계속되던 우중충한 시드니에 내 기분도 가라앉고 있었는데 퍼스의 아침 하늘은 말 그대로 눈이 부셨다. 덕분에 여행에 대한 기대감은 한층 더 올라갔다.
퍼스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눈에 들어왔던 파란 하늘과 그 아래 우뚝 서있던 관제탑을 그린 그림.
숙소로 가는 길에 만났던 재미있는 스트릿 이름 - 머니 & 호이포이
버스를 타고 퍼스 시내에 도착하여 구글맵에 의지하여 산책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숙소로 걸었다.
'Money' 스트릿 이름을 보고 혼자 실실 대며 사진도 찍고 그렇게 기분 좋게 도착한 숙소의 외관은 나의 기대감을 조금은 누그러뜨렸다.
'어? 웹사이트에서 본 거랑은 좀 다르네.'
그래도 평점이 괜찮았던 걸 기억하며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몰아냈다.
열쇠를 받고 2층 방으로 올라가려고 낡은 엘리베이터 문 앞에 섰는데 문이 열리고 대형 화물 엘리베이터가 나타났다. 사라졌던 불안감이 다시 스멀스멀 올라올 때쯤 2층에 도착했다. 가운데 천장이 뚫린 형태의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방으로 향한 복도의 짙은 어두움은 여행의 기대감을 완전히 삼켜버렸다.
방문을 여는 순간, 여행 첫날이라는 특별함은 이미 심폐소생술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되살아날 수 없을 정도의 지경이 되고 말았다. 청소를 한 번도 한 것 같지 않은 화장실은 물론,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상상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변색한 소파에, 끈적거리는 TV 테이블까지.
최소한 한 달의 야근과 주말근무와 맞먹는 스트레스가 몰려왔다. 두려운 마음에 감히 짐을 어디에 둘지 고민하다가 그나마 가장 덜 더러운 침대 시트 위에 두고 아침 비행의 피곤함을 이끌고 어디로 갈지 정하지도 않은 채 호텔(이것이 과연 호텔이라면) 방을 나오고 말았다.
'아, 첫날부터 왜 이래? 이 여행 괜찮은 걸까?'
*부모님과 함께 태즈매니아 여행을 하다가 렌터카가 체리 밭 옆 도랑에 빠져버렸다. 어떡하나 당황했을 때 갑자기 대형 트럭 한 대가 멈추더니 젖은 땅에 바지가 젖는 것도 잊은 채 체인으로 트럭과 렌터카를 연결하여 우리를 구해주셨다. 감사한 마음에 급하게 갖고 있던 과일과 과자라도 챙겨서 나왔는데 아저씨는 쿨하게 여행 잘하라고 손을 흔들며 바로 트럭을 몰고 가버리셨다.
**시드니와 퍼스 사이에는 3시간의 시차가 있는지라 5시간의 비행에도 불구하고 탑승시간+2시간이 도착시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