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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스 Nov 02. 2024

만유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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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 소매치기가 그렇게 많대. 밤에 잘 못 돌아다니면 정말 큰일 난다더라”


마음을 무겁게 하는 이야기가 내 귓속을 울렸다. 이탈리아행 비행기 탑승을 며칠 앞둔 날이었다. 이제는 짐을 싸야 하는데, 괜스레 겁부터 났다. 짐을 넣으려던 캐리어를 덮은 채 유튜브를 켰다. 검색 창에 ‘이탈리아 여행 팁’을 입력하자 수많은 영상이 쏟아졌다.


한 유튜버가 이탈리아에서 겪은 소매치기 사건 이야기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한 여성 유튜버는 바닥에 놓인 그림을 잘 못 밟았다가 몇십만 원어치의 유로를 뜯겼다고 했다. 희미하게 형체만 있던 걱정이 점점 몸집을 키우고 내 눈앞에 나타났다.


영상에서 언급된 조언을 바탕으로 여행 채비에 돌입했다. 캐리어와 옆으로 매는 가방, 에코백과 귀중품을 담을 힙색까지, 가방의 ‘분신술’을 선보이고 나서야 조금 안심이 됐다. 한 영상에서 몸과 귀중품을 연결하는 고리를 구입할 것을 추천했지만, 또 다른 영상에서는 고리가 오히려 소매치기의 타깃이 될 가능성이 높인다고 해 구입을 포기했다. 대신 짐을 숙소에만 보관해 둘 요량으로 숙소를 최대한 바꾸지 않기로 하고 현금도 최소한만 챙겼다. 이제야 비로소 전쟁터로 떠날 준비를 마친 듯했다.


우여곡절 끝에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을 떠난 건 오전이었지만 저녁 9시가 넘어서야 이탈리아 피렌체에 도착했다.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피렌체의 풍경이 내 경계심을 더욱 높였다. 나는 경계의 눈빛을 숨기지 않고 숙소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다. 휴대전화로 길을 찾으면서도 길을 한 번 살펴본 뒤 휴대전화를 가방 안쪽으로 슬그머니 집어넣었다. 앞으로 맨 가방이 돌아가지 않도록 길을 걸으면서 가방을 계속 앞으로 당겼다. 누군가가 나를 지나쳐갈 때면 티 나게 몸을 피하거나, 한 손에 가방끈을 꼭 부여잡는 방식으로 경계 태세를 내비쳤다. 잔뜩 화가 난 고슴도치가 꼭 이런 모습이었을까 싶은 광경이었다.


첫날 밤을 무사히 보내고 낮이 되자 세상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이탈리아의 아침은 맑고 깨끗했고, 고즈넉한 분위기의 건물들은 나를 매혹했다. 피렌체의 도시 풍경은 '여유로움'이라는 단어를 이미지로 만든 것처럼 인상적이었다. 산책을 하며 느껴지는 커피 향과 갓 구운 빵 냄새는 잔뜩 얼어붙은 마음을 무장 해제시켰다. 생긋 웃는 얼굴로 건네는 '본 조르노' 인사는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이탈리아에서 마신 에스프레소와 와인이 몸속에 쌓일수록 나 혼자 쌓아 둔 마음의 장벽은 점점 무너졌다.


이탈리아에서 받은 호의와 환대는 비로소 이곳이 전쟁터가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도시임을 느끼게 했다. 실제로 그곳에서 만난 현지인들은 내 선입견과는 전혀 다른 이들이었다. 친절하고, 따뜻하고, 여유를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었고, 문학과 음악, 미술 등 예술을 사랑했다. 커피와 술을 마시며 삶이 주는 흥취를 만끽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난생처음 보는 관광객에게 이곳에서 꼭 먹어야 할 와인과 음식을 추천해 주는 이도 있었고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며 구체적인 행동 요령을 알려주기도 했다. 숙소마다 비치돼 있던 웰컴 와인과 모카포트는 그들의 환대를 몸소 증명했다.


만유인력. 질량을 가진 물체 사이에 서로 당기는 힘은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관광객을 목표로 범죄를 저지르는 악인들이 있는가 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그들이 안정적으로 삶을 지탱할 수 있도록 사람들 사이에 믿음을 불어넣었다. 그 덕에 사람 때문에 잔뜩 상처받은 사람이, 또 다시 사람에게 치유받는 경우도 나타났다. 여린 마음이 사람들을 밀어내다가도 그 마음 한 켠에는 그들과 다시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머나먼 이국땅 이탈리아는 나에게서 멀어졌다가 어느샌가 가까워졌다. 이곳의 사람들은 설익은 지식으로 자신들을 함부로 재단한 한 사람의 마음을 녹였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한 줄기의 희망을 얻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로를 당기는 힘이 적지 않다는 것. 서로의 관계가 느슨해지지 않도록 당기는 사람들이 있어 세상은 한없이 어두워지지 않을 거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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