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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서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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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닿아 May 17. 2022

가끔 살고 자주 사라지고픈

서른에게 01

가끔 살고 싶고 자주 사라지고 싶은 요즘이야. '옥상달빛 -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라는 노래를 기억하지? 네가 한때 노래방만 가면 불렀던 노래니까. 지금의 날씨와 꽤나 잘 어울리기도 하지만, 요즘 내 마음이 딱 이 노래 같아.

날씨도 좋고, 몸 뉘일 안락한 5년 차 자취방도 있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애인과 친구도 있어. 가끔 만나는 가족과도 잘 지내. 그런데 요즘 자주 이 평화로운 세상에서 나만 쏙 빠져나와 흔적 없이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들어. 그냥 그러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달까. 생각이 많다 못해 고민까지 덧대져 온 요 몇 년의 삶이 문득 피로하게 느껴지는 거 있지. 요즘은 사람 얼굴을 잘 기억 못 해. 길을 걷거나, 커피를 사거나 하며 마주하는 사람들 눈을 잘 안 마주치게 되더라. 그걸 깨닫고서는 조금 슬펐어. 틈틈이 잘 쉬고, 아끼는 것을 잘 지켜왔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그러면서 에너지를 많이 썼나 봐. 좋아하는 일로 벌이가 석연치 않고, 그렇다고 이 일을 내려놓지도 품에 가득 끌어안지도 못한 채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어. 그러는 동안 빈 틈으로 조금씩 예쁜 마음들이 새 나간 걸까.

좋아하고 잘하는 것은 열정에 속한댔는데, 그렇다고 오랜 시간 믿어왔던 것에조차 여러 번 물음표를 던지고는 해.

지금보다 더 나아지고자 하는 마음은 참 건강한 건데, 그 마음을 갖는 데에 생각보다도 품이 많이 든다. 흐흐

 

나는 요즘 브랜딩이라는 말과, 노마드 워커라는 말을 오래 붙잡고 생각해. 좋아하는 일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고, 생활에도 더 여유를 갖고 싶거든. 여행을 가도 노트북이랑 핸드폰만 있으면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어. 그걸 '노마드 워커'라고 부르더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일을 할 수 있는 거야. 멋지지 않아? 네가 지금쯤 그 모습의 물꼬를 조금씩 트고 있으면 좋겠는데. 그러려면 지금 내가 더 애써야 하는데. 왜 힘이 안 날까? 속상하게.

아껴 일하던 카페가 갑작스럽게 영업 종료를 맞고 나서, 급하게 일을 구했다가 체할 것 같은 마음으로 그만뒀었거든.  

잠깐 직장인처럼 살더라도 안정적으로 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 때였는데, 때맞춰 지인에게 비슷한 느낌의

5개월짜리 프로젝트를 함께 해보겠냐는 제안을 받았어서 더 급하게 그만두었지. 왠지 마음 한 구석이 불안하더라니, 잠정적 이직이 불발되면서 반강제적 백수가 되었어. 그렇게 4주가량을 거즘 무일푼에 가깝게 보내다가 어제 새로 구한 곳에 첫 출근을 했다. 영상 콘텐츠를 만드는 연구소이자 뮤지엄 같은 곳에서 평일 저녁 자리를 지키는 일인데, 유동인구가 원체 적은 곳이라 사이사이 내 시간을 갖기 좋더라구. 그 시간을 요긴하게 잘 쓰려고 궁리 중이랄까. 할 일이야 많은데, 산발적으로 이것저것 하는 것보다 '이 시간엔 무조건 이걸 한다', 하는 걸 만들어두는 게 더 낫겠다 싶더라고. 내가 원래 진짜 못하는 거거든. 선택과 집중. ㅋ ㅋ 스무 살, 대학에 들어가서 과 친구들이 무리를 만들 동안 나는 저 무리에서 저 친구, 이 무리에서 이 친구, 골라가며 마음이 가는 몇에게 유독 애정을 건넸거든. 어떤 소속감에 대한 간절함도 없었고 말이야. 그러니까 따로 약속을 잡아 만나지 않는 한 무리로 놀 일은 잘 없었어. 노력하지 않으면 멀어지기 딱 좋았지. 지금도 봐, 하고 싶은 게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잖아. 너는 어때? 지금은 좀 정리가 되었니? 혹시 내가 너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보내는 게

아닐까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어차피 내가 해내야 할 일인데, 내가 삼십 대에 생각보다 큰 환상을 가지고 있나 봐.

서른이 다가오는 게 나는 조금 반갑거든. 물론 그 안에서 해내야 할 고군분투는 내 몫이지만, 어느 정도 심적이든 경제적이든 지금보다는 안정적일 거라 생각하니까. 그리고 내가 만나온 멋진 어른들은 다 삼십 대를 다채롭게 즐기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내 스물아홉보다 서른이 더 기대가 돼. 스물아홉은 내년일 뿐이야. 올해와 내년을 어떻게 하면 알차게 살아낼 수 있을까, 가 지금 내 가장 굵직한 고민이야. 내가 이 고민을 좀 치열히 해야 네가 좀 더 평화롭겠지? 네가 맞닥뜨린 문제들을 나는 아직 알 턱이 없지만, 네가 해내고 있는 것들은 분명 지금의 내가 굉장히 멋지다고 생각할 것들일 거야.

저런 고민까지 하는 사람이 되었구나. 하고자 하는 일 안에서 저만치 깊게 들어갔구나. 볕이 잘 드는 곳으로 이사를 잘 갔구나. ㅋ ㅋ 너무 뜬구름 잡는 소리일까? 아닐 거라는 동화 같은 상상을 하면서 지내.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몸도 마음도. 곁에 사랑을, 아끼는 이를, 좋은 술과 문장을 두고 느긋하고 부지런히 지내.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내가 먼저 애쓸게.


편지를 앞으로 자주 쓰게 될 것 같네? 출판을 거치든, 내가 따로 엮든 서른의 생일, 그때의 네 생일에게 줄 수 있게 글을 모아 두고 싶어졌어. 곧 또 편지할게.

 

_오월 십칠일, 닿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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