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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연군 Nov 04. 2020

이야기의 깊이를 더하는 디캔팅

그 열한 번째 이야기.  숙성된 이야기의 참맛

디캔팅 Decanting:
 와인을 디캔터에 담아 불순물을 가라 앉혀 걸러내는 작업

와인은 다른 술에 비해 먹는 방법에 따라 맛이 크게 좌우된다. 그래서 와인은 무엇을 마시느냐 만큼이나 어떻게 마시느냐가 중요하다. 와인의 온도와 잔을 잡는 방법, 곁들이는 음식 등 다양한 요소가 맛을 가르는 요소가 된다. 디캔팅도 그중에 하나로, 오래 숙성된 와인엔 불순물을 가라앉혀 본래의 맛을 끌어내고 생산한 지 얼마 안 된 와인은 공기와의 접촉을 늘려 깊은 맛을 더해준다. 디캔팅에는 대단한 스킬도 필요 없다. 그저 병에 담겨 있는 와인을 디캔터에 옮겨 놓기만 하면 된다.


글을 쓸 때도 와인처럼 디캔팅을 해주면 더 맛깔난 이야기로 탈바꿈할 수 있다.



이미지와 영상의 세대

90년생 ~2000년생은 밀레니얼 세대로 분류된다. 이 세대의 특징은 IT 기기 및 인터넷 네이티브라는 점이다. 유치원 시절부터 스마트폰을 쥐고 유튜브에 접속한 이들은 앞선 세대가 경험한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았다. 밀레니얼 세대는 SNS로 소통하는데, 주된 도구는 사진 이미지와 영상이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같이 사진이나 영상으로 일상을 공유하는 어플이 대세가 되었고, 이를 반영하듯 카카오톡에서도 이모티콘이나 짤로 불리는 사진으로 의사표현을 하는 방식이 대세다. 그나마 트위터 같이 이미지가 아닌 글로 소통하는 경우도 있지만 한 개의 트윗에 담을 수 있는 글자 수는 140개가 전부라 한계가 명확하다.


이제 이런 세대가 20대가 넘어 기성사회에 들어서며 가장 어려움을 느끼는 게 바로 글쓰기다. 학교나 학원에서는 문제를 보고 푸는 연습에 집중할 뿐 글쓰기 실력을 늘리는 일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논술을 준비하는 일부 학생들만이 사설 학원에서 글쓰기 연습을 할 뿐이다. 대학에 가서도 환경이 크게 바뀌지 않는다. 대부분의 전공과목에서 글쓰기 능력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서툰 글쓰기 실력으로도 좋은 학점을 받고 졸업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문제는 직업을 구하고 직장에서 일을 할 때 발생한다. 당장 입사를 위한 지원서의 자기소개서 작성에도 어려움을 토로한다.



회사 업무의 대부분은 글쓰기다

SNS에 기껏 쓰는 글은 해쉬태그를 붙인 단어가 전부다. [#일상 #기분 #날씨 #인생 #즐거움]처럼 맥락이 없이 단어만 던진다. 글이 아닌 인스턴트 메시지만 가득하다. 일상생활에서 이보다 긴 글은 주문한 음식 리뷰 정도다. 보통의 생활을 영위하는 데는 이 정도의 글쓰기 능력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다르다. 모든 업무가 글로 이뤄진다.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표현하는 것도 글이고, 다른 회사와 협의하는 방식도 글이다. 여러 부서가 힘을 합치는 어떤 프로젝트를 추진할 때, 그 기초가 되는 것도 글이고 협동을 하는 주된 방법도 글이다. 사진이나 영상은 글의 내용을 보충하는 정도로 쓰일 뿐, 그것이 메인이 되지는 않는다.


TV 드라마에서 보이는 회사 생활은 얼굴을 마주하고 회의를 하거나 주인공의 화려한 언변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일이 대부분인데, 이는 실제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물론 이따금씩 회의도 하고 탁월한 화술이 필요한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건 단지 이미 마무리된 업무에 마침표를 찍는 행위에 불과하다. 회의도 이미 메일이나 문서를 통해 사전 교감한 내용을 만나서 확인하는 행위고, 프레젠테이션도 이미 문서로 확정된 내용을 이해하기 쉽도록 발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회사의 모든 일의 처음과 끝이 글쓰기라는 소리다. 그러니 자연히 신입사원을 뽑을 때 자기소개는 물론 그밖에 다양한 글쓰기 과제가 빠지지 않는 것이다.


헤밍웨이가 그랬다. 모든 초고는 쓰레기라고.


단기간에 글쓰기 실력을 높이는 방법

글쓰기 실력은 단기간에 좋아지지 않는다. 며칠 만에 글쓰기가 실력이 확 늘어나는 비법이 있다면 한집 건너 한 명씩 시인과 소설가가 살고 있을 것이다. 글쓰기 실력의 핵심은 다독 / 다작 / 다상량이다. 뛰어난 작가가 쓴 많은 책을 읽고서, 이를 바탕으로 스스로 여러 글을 써보고, 쓴 글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고 주위의 조언을 구하는 일이다.

여기서 다독과 다작은 단기간에 해낼 수 없다. 책을 많이 읽고 써본 사람의 글에서 보이는 어휘력이나 문체는 단시간에 얻을 수 있는 성질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다상량은 다르다. 쓴 글에 대해 스스로 여러 번 생각해보고 주위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해 글을 고쳐나가는 것은 의지와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다.


다시 처음의 디캔팅으로 돌아가 보자. 와인을 디캔터에 30분 ~ 1시간 정도 담아두면 불순물은 가라앉고 와인이 가진 본연의 풍부한 향과 맛을 내게 된다. 글쓰기도 이와 다르지 않다. 막 작성한 따끈따끈한 글을 내어 보이기보다는 마음속 디캔터에 30분만 담아 본다. 쓴 글을 여러 번 읽어보면서 오타를 바로잡고, 어색한 문구를 수정하고 잘못된 내용을 고치는 것만으로도 처음보다 훌륭한 글이 된다. 시간을 조금만 더 투자해 다른 사람과 글을 공유하면 이야기의 흐름을 매끄럽게 하거나 화려한 어휘를 더할 수도 있다. 단시간의 숙성을 통해 글 맛이 배가되는 놀라운 마법이 펼쳐진다.


단 한 번에 훌륭한 글을 쓰는 것은 재능이다. 이태백이 그랬다. 그의 영감이 떠오르는 대로 쓰는 즉흥시가 신선의 능력과 같다고 하여 시선(詩仙)이라 불렸다. 반면 자신의 글을 수 없이 고친 이도 있다. 그의 이름은 '두보'로 이태백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수많은 퇴고를 거쳐 세상에 나온 두보의 글쓰기 능력이 성자의 경지에 올랐다고 하여 시성(詩聖)으로 추앙받는다. 많은 수정을 거친 글은 천재의 글과 견주어도 전혀 부족하지 않고 오히려 더 뛰어날 수도 있다는 점을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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