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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연군 Jan 24. 2021

전지전능한 신은 없다.

교회에서는 알려주지 않는 기독교의 비밀 첫 번째 이야기.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다. 무언가를 믿는다는 것은 인류의 속성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인간이 번성하는 조건의 하나로 종교를 들고 있는데, 공통적인 사상과 소속감 그리고 상상 속의 연대감을 느끼게 해주는 종교의 기능 덕분에 인류는 인지적인 한계를 극복해 수천 수백만 명이 모여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고 말이다. 우리가 믿는 것은 종교 자체라기보다는 종교의 핵심이 되는 신이다. 신의 숫자는 언제나 지구 상의 모든 종교의 합보다 더 많았다.


우리나라에서 종교라 하면 거창하게 큰 교회나 성당 또는 사찰을 다니면서 일정한 교리를 지켜나가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기 쉬운데 그거 어디까지나 고정관념에 가깝다. 그저 내가 믿고 의지하는 것이라면 모두 종교가 될 수 있다. 아주 먼 옛날 사람들은 큰 나무나 돌, 하늘을 종교로 삼았고, 어떤 곳은 자신의 조상들을 신으로 섬겼다. 그리스 로마에서는 사람의 감정이나 생활에서 필요한 부분들을 떼어다가 사랑의 신은 아프로디테, 전쟁의 신은 아테나처럼 그것을 관장하는 상상의 신을 만들었다. 중동지역 발생한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독특하게도 신은 단 하나라는 유일신 사상을 기치로 내걸었고, 지금은 전 세계를 양분할 정도로 널리 전파되었다.


우리나라는 독특하게도 이 모든 특징을 다 가지고 있는데, 성황당처럼 큰 나무에 제사를 올리는 풍습도 있고 아기를 점지해준다는 삼신할머니에게 아기를 달라고 물을 떠 넣고 기도하기도 한다. 산에 가면 산신령이 있고 부엌에 가면 부엌 귀신이 있다. 이렇게 수많은 신을 두고서도 조상신도 따로 섬긴다. 멀리 종묘사직으로 대표되는 조선시대 역대 왕에 대한 제사를 언급할 필요도 없다. 명절만 되면 각 집안마다 모여서 자신들의 조상을 위해 정갈한 음식을 올리며 절을 하는 모습을 지금도 쉽게 볼 수 있으니까. 요즘엔 기독교를 믿는 이들은 이러한 제사를 유일신을 욕보이는 우상숭배라고 하여 기독교식 예배나 간단한 식사로 대체하기도 한다. 가끔 우리나라는 모든 종교가 뒤섞여서 지내는 종교 박물관 같은 곳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포세이돈은 바다의 제왕이자 제우스를 뒤이은 올림포스 넘버 2의 실력자다.

일신교와 다신교

이렇게 다양한 종교를 구분하는 방법이야 많겠지만, 크게 둘로 나누자면 일신교와 다신교로 분류할 수 있다. 일신교는 신이 하나인 종교이고 다신교는 신이 여럿이 있는 종교를 말한다. 일신교를 대표적으로 꼽자면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있다. 이슬람교가 낯선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가 가장 일반적인 비유가 될 수 있겠다. 기독교에서는 "나 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를 십계명 중 첫 번째로 둘 정도로 배타적인 일신교다. 배타성은 이슬람교도 둘째가라면 서러운데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종교전쟁을 하는 주된 이유다.


반면, 다신교에서는 이런 걱정이 없다. 지혜가 필요하면 지혜의 신에게, 술이 필요하면 술의 신에게 가면 된다. 죽음의 신, 바다의 신 등 수많은 신이 있다. 그리스를 넘어 로마시대로 가면 신의 숫자는 어림잡아 3,000은 훌쩍 넘어간다고 한다. 상황이 이러니 그저 나에게 지금 필요한 신을 찾아가면 될 뿐이지 어떤 신이 더 나은가를 두고 싸울 이유가 없다.(설령 신화 속에서 신은 서로 싸우더라도 말이다.) 


일신교와 다신교는 신의 능력에서 차이가 갈린다. 세상에서 필요한 능력이 100이라면 다신교는 100명의 신이 한 가지 능력씩 나눠 갖는다. 하지만 일신교는 아니다. 한 명의 신이 100개의 능력을 홀로 갖는다. 종교를 믿는 사람 입장에서는 사실 일신교가 편할 수밖에 없다. 언제든지 하나의 신만 찾으면 되기 때문에 그때그때 필요에 맞는 신을 찾아다니는 수고를 덜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일신교의 신들은 하나 같이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이른바 '전지전능'의 영역이다.



전지전능은 모순이다.

초나라 때 일이다. 어느 한 장사꾼이 길에서 세상에서 모든 방패를 뚫을 수 있는 창과 모든 창을 막을 수 있는 방패를 팔고 있었다. 그걸 보던 한 사람이 그럼 그 창으로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됩니까 하고 묻자 그 상인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자리를 떠났다는 일화가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순이라는 단어의 유래다. (모순은 한자로도 창 모矛자에 방패 순盾자를 쓴다.)


신이 전지전능하다는 것도 모순의 영역으로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불가능한 개념이다. 하지만 일선 교회에서는 신의 전지전능함을 찬양하기에 바쁠 뿐 그에 대한 의심을 가지는 일은 거의 없다. 먼저 전지전능을 풀어쓰면 전지(知)는 모든 것을 아는 능력이고 전능(能)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전지는 모든 사물의 과거에 일어난 일은 물론 현재의 일과 앞으로 일어날 일까지 다 아는 것이다. 즉, 일반 사람들이 A가 B가 될지 아니면 C가 될지 모르지만 전지자는 A가 B가 될지 알고 있는 것이다. 전능은 A가 B가 되게 할 수도 C가 되게 할 수도 있는 능력이다. 


하나하나 떼어보면 엄청난 능력자이지만 이 둘을 붙이면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먼저 신이 전지한 능력으로 A가 B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하자. 그 상황에서 A가 C가 되고 싶어 하는 소망을 듣고 전능한 능력으로 C로 만들어 줄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만일 그렇게 하면 신의 전지함은 부정된다. 이 상황에서 전지자임을 유지하려면 A가 B가 되려는 운명을 거부하고 신께 기도해서 신이 능력을 발휘해서 C로 만들어주는 것까지 알고 있어야 성립된다. 


뭐 그렇다 치자. 다 알고 있었다고. 하지만 다 알고 있는 신을 만들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신은 부정 된다. A에 대한 선택지를 신이 알고 있는 상황이라면 신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정해진 범위 내에서만 능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신이 A가 B가 될 것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A가 아무리 C가 되고 싶다고 기도한들 들어줄 수 없다. 오직 B가 되는 것에 힘을 쓸 수밖에 없으니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전능자가 아닌 것이다.


전지전능하지 않은 신에게 하는 기도는 어쩌면 무의미한 행위일지도 모른다.

신은 위대하지 않다.

전지전능은 매우 모순되고 역설적인 개념이다. 모든 것을 아는 신은 모든 것을 할 수 없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신은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어찌 보면 참으로 인간적이다. 그래서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신들이 그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졌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수많은 종교인이 신께 무릎 꿇고 자신의 소망을 담아 기도를 드린다. 신의 속성을 고려해 보자면 헛수고라 말해주고 싶다. 전지자인 신은 자신의 아는 것과 반대의 결과로 바꿔줄 능력이 없고, 전능자인 신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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