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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소영 Feb 28. 2021

<場글 Book> 죽으란 법은 없는 거니까!

그림책 <용감한 아이린/윌리엄 스타이그 글. 그림>

   나는 몽골몽골한 애니메이션 무척 좋아한다. 특히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이웃집 토토로'는 스무 번 넘게 본 것 같다. 2001년 여름 토토로에 푹 빠져 있을 즈음 만난 스윗한  애니메이션이 하나 있다. 이름만 들어도 '아, 그거~'할 정도로 유명한 작품,

바로 미국 드림웍스에서 만든  '슈렉'이다.

성 밖 늪지대에 혼자 사는 괴물 캐릭터, 못생기고 더러운 외모와는 달리 귀염뽀작한 모습에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작품이다.


  슈렉은 윌리엄 스타이그라는 그림책 작가의 동명 작품에서 시작되었는데, 원작 그림책 속 슈렉은 영화보다 훨씬 심각하게 못생겼다. 초등학생이 그린 것 같은 짙고 거친 검은 선 위에 수채 물감으로 가볍게 대충 칠한 것 같은 슈렉의 모습은 2D인데도 3D처럼 입체감이 느껴진다. 책 속에서 왠지 늪지대의 쾌쾌한 냄새가 날 것 같은 기분이랄까. 하지만  자기보다 못생긴 공주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는 슈렉의 모습은 영화 속 캐릭터 못지않게 유쾌하고 사랑스럽다.

  슈렉뿐 아니라 윌리엄 스타이그 작품 속에는 고난, 역경 극복 스토리의 주인공들이 많이 등장한다. 의인화된 동물들과 아이들이 주로 나오는 그의 작품을 읽다 보면  가슴이 따뜻해진다.


   윌리엄 스타이그는 젊은 시절 뉴욕에서 '카툰의 왕'이라 불렸었다. 2600장이 넘는 드로잉과 200여 장의 잡지  표지를 그리며 탄탄한 입지를 다지던 그 어떻게 그림책 작가가 된 것일까?

 스타이그는 어릴 때부터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미술과 음악, 운동에 까지 남다른 관심과 소질을 보였다. 하지만 대공황 상태에 빠지면서 늙은 아버지 혼자 가계를 꾸려나가는 것이 힘에 부치게 되자, 궁핍해진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했다.

                                                                                          

. “제가 그대로 학교를 다녔다면,  저는 프로 체조선수나 조정 선수가 됐을 거예요.... 하지만 대공황이 불어닥쳤죠. 저는 힘들어하시는 아버지를 못 본채 하고 그대로 학교 수업을 받고 있을 수만은 없었어요. 그래서 가족을  위해 상업만화를 그리는 카투니스트로 나서야 했죠.”


돈을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그림을 그렸던 윌리엄 스타이그! 기특하고 안쓰럽다.

하지만 그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그림을 그리면서도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잊지 않고 살았던 모양이다.

그가 그림책 작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은  61세 때였다. 불혹과 지천명의 나이훌쩍 지난 환갑의 나이에 그는 새로운 꿈을 꾸었고 그 꿈을 이던 것이다.


 가끔 무언가에 몰두하다 보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어 멈칫때가 있다.

멈칫하는 순간 떠오르는 핑곗거리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레퍼토리도 가지가지다.

해야 할 이유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왜 그렇게 많은지.

이 나이에 무슨...

남들도 하기 힘든 걸 내가 한다고 되겠어?

하던 일이나 잘하는 게 낫지.

  요즘 내가 가장 많이 내세우는 핑계  나이 탓이다.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뭘 하지 못할 나이도 아닌데 툭하면 '이 나이에 무슨...'을 앞세우곤 한다.

나이가 벼슬도 아닌데 말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나이 따위는 아무 문제가 안된다는 것을 보란 듯이 실천한 윌리엄 스타이그의 열정 앞에 괜히 머쓱해진다.

 95세의 나이로 생이 다할 때까지 남긴 30여 편이 넘는 그의 작품들 속에서 생의 우여곡절을 지나온 작가의 삶과 철학이  느껴진다.

그는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드는 책은 쓰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그의 그림책들은 하나같이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과 사랑이 깔려 있다. 주인공들은 유쾌하고 긍정적이며 잠재적인 가능성을 가진 존재 그려지고 있다. 무겁거나 딱딱할 수 있는 주제지만 위트와 유머를 담아 담백하게 풀어고 있다.

 억지스러운 설정으로 교훈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웃음 코드를 담고 있는 그의 그림책이 그래서 좋다.

그의 삶의 태도가 좋다.




  <용감한 아이린>은 윌리엄 스타이그의 대표적 그림책 중 하나이다. 미숙하고 나약한 존재로만 여겨지던 어린 딸 아이린이 아픈 엄마를 돕기 위해 매서운 칼바람을 뚫고 심부름을 나서며 시작되는 이야기다. 아이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가답게 이 책에서도 아이린의 야무진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공작부인의 드레스를 파티 전에 무사히 전달해야 하는데, 엄마 몸이 좋지 않다. 난감해하는 엄마에게 아이린은 자기가 해보겠다고 나선다. 말도 안 된다며 말리는 엄마의 걱정에도  아이린은 고집을 꺾을 생각이 없다.

편찮으신 엄마를 위해 이불도 든든히 덮어 드리고, 차도 끓여 놓고, 난로에 장작도 충분히 넣어 두었다. 심부름을 가기 전에 몇 번을 더 엄마를 살뜰히 챙겨 보고 길을 나서는 아이린의 모습에서 큰아이와 둘째 아이 어릴 때 첫 심부름을 시켰던 기억이 다.

"슈퍼에 가서 밀가루와 식용유 좀 사다 줄래?"

심부름을 보내 놓고  아빠는 아이들 뒤를 몰라 따라가고 나는 베란다로 나가 아이들 동선을 살폈다. 멀지도 않은 슈퍼로 심부름을 보내면서도 첩보영화를 방불케 하는 수선을 떨어 썼는데...


과연 아이린은 엄마의 심부름을 잘 해낼 수 있을까?


 아이의 당차고 기특한 선택이었지만,  스타이그는 아이라고 봐주지 않다.

날씨는 춥고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몰아치는 바람과 발목까지 차오르는 눈 때문에 아이린은 한걸음 한걸음 발을 떼기도 어려웠다. 장화 속으로 차가운 눈이 파고들어 발은 점점 더 시려 왔다.

하지만 아이린은 눈길을 밀고 나다. 정면으로 안되면 측면으로, 그도 안되면 등으로 바람과 맞서며 헤쳐 나갔다. 

'왜냐하면 이건 아주 중요한 약속이니까.'
그림책 <용감한 아이린 中>


중요하지 않은 약속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살다 보니 이런저런 이유와 핑계로 지키지 못했던 약속들이 더 많았었단 생각이 든다. 공수표 같이 남발하는 '밥 한 번 먹자.'는 약속부터, 일상 속의 사소한 시간 약속, 미래에 대한 계획까지.

그중에는 의도치 않게 지키지 못했던 약속도 있고, 일부러 회피했던 약속도 꽤 된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 합당한 여러 가지 이유들을 만들어 내곤 했.

'난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뉘앙스를 담뿍 담아서.


  지각의 이유, 약속된 시간에 약속 장소에 갈 수 없는 상황에 대한 핑계를 댔던 기억을 떠올려 보면, 대개 게으름이 원인이었다.

아침 일찍 수업이 있는데 새벽까지 유튜브를 보다가 늦잠을 자거나,

차가 막힐 걸 예상했으면서도 꾸물대다 늦어버린다거나.

뭐 그렇게 대단한 이유가 있던 것도 아니면서 지키지 못해  둘러댄 핑계들이 구구절절 많기도 하다.

 어디 지각 핑계뿐이겠는가.


살아오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내뱉었던 수많은 이유들. 정말 그럴만한 정당한 이유들이었을까?

남보단 나의 이기심이 더 중요했기에 스스로를 방어하려고 했던 말들은 아니었을까?

요즘 들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나이 핑계도, 어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찾아낸 명분일지도 모르겠다.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아이린은 그만 포기하고 엄마가 있는 따뜻한 집으로 돌아갈 이유가 충분했다. 공작부인에게 가져갈 드레스도 속수무책으로 날아가 버린 판에 더 이상 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빈상자를 들고 돌아간다고 해도 아이린을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린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이린에 꼭 가야 할 확고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

사랑하는 엄마가 얼마나 힘들게 일했는데.....,
얼마나 오랫동안 재고, 자르고, 시치고, 꿰매고 했는데.....,
공작부인은 이제 어떻게 하나요!

  엄마가 열심히 만든 드레스와 그 드레스를 기다리는 공작부인의 마음을, 어린 아이린은 헤아리고 있었다. 그래서 이 상황을 꼭 전해야만 했, 끝까지 가야만 했던 것이다.


기-승-전- 무사 도착, 해피엔딩일 거라 예상했지만,  '저 정도면 포기해도 할 말은 없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이린의 고생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온몸이 떨려 왔어요.
이가 딱딱 부딪쳤습니다.
'이대로 얼어 죽고 말지 뭐, 그럼 이 고생도 끝날 거 아냐?
안 될 거 뭐 있어? 벌써 이렇게 묻히기까지 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났겠단 생각까지 하게 된 우리의 아이린, 어떻게 되었을까!


이 책을 보면서 아이린의 미션 성공 여부보다 더 오래 마음에 남는 것이 있다.  

바로 아이린이 겪은 '우여곡절'이다.

악착같이 견디며 한 발 한 발 내딯여 보지만 겹겹이 닥치는 시련들!

  '나라면 어땠을까.' 생각하게 하는 지점들이 있었다. 오죽하면 이대로 얼어 죽어 버리는 게 낫겠단 생각까지 했을까 싶어 짠 마음도 들었다.


  남편 하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었던 때가 있었다.  쉬지 않고 일을 하고 또 해도  통장에 들어온 돈은 스치듯 안녕~.

점심 사 먹을 돈도 아까워 삼각김밥 하나로 끼니를 때워가며 일했다. 그땐 정말 매일 잠드는 것이 곤욕이었고 눈을 뜨는 것이 지옥이었다. 차라리 죽어버리면 이 고생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차를 끌고 죽으러 나갔던 적도 있다.

물론 지금도 형편이 넉넉한 것은 아니지만 그때 일을 떠올리며 우스개 소리를 할 정도의 여유는 좀 생겼다.

끝날 듯 끝날 듯 이어지는 시련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쯤 일어나는 희망적인 반전은 비단 그림책 속 아이린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살다 보면 때론 죽고 싶은 만큼 힘든 때가 있다. 사람마다 그 깊이와 크기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의 시련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그럴 때마다 난 숨구멍이라도 틔우려고 이런 탓, 저런 핑계를 대며 현실에 안주하기도 하고, 외면하기도 하고, 도망치기도 하며, 적당히 타협점을 찾았었다. 렇게 사는 것이 떳떳하지 못하다고 여기면서도 그랬었다.

 그런데 그것 또한 나쁘지 않다고 생각다.

'살맛' 나는 일과 '죽을 맛' 나는 우여곡절을 견디며 살아가는 긴 인생, 어떻게 대쪽 같게만 살 수 있겠는가.

이렇게도 살고 저렇게도 사는 거지. 인생에 정해진 답이 한 가지면 너무 빡빡하까.

지금은 좀 흔들려도 괜찮다는 생각이다. 


'사람이 죽으란 법 없는 거니까.'


환갑의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한 윌리엄 스타이그처럼,

죽을 고비를 넘기며 눈길을 헤쳐나간 아이린처럼,

수백 가지 포기할 이유가 있더라도

해낼 수 있는,

해내야 할,

확고한 이유 하나쯤 생지 않까.


그러니까 지금은,

그런 때가 왔을 때,

가차 없이 끝장을 볼 수 있는 베짱이나 좀 두둑이 만들어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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