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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소영 Apr 24. 2021

<場글 Book>깔끔하고 담백하게 사과할 용기

그림책 <사자가 작아졌어/정성훈 글그림>


"제발 그렇게 말하지 마. 넌 계속 네 변명만 하고 있잖아. 그냥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  네 얘기 듣고 있으면 오히려 화를 내고 있는 내가 이상한 건가 싶어."    

     

  친구가 나에게 단단히 화가 났다.

듣다보니 화를 내고 있는 그 사람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는데...

내 말과 행동이 친구 마음을 많이 상하게 한 것 같 맘이 좋지 않았다. 알고 했든 일부러 그랬든 듣고 보니 분명  잘못이었다. 하지만 생각은 그랬어도 행동으로 옮겨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잘못했다는 말을 하는 순간 내가 지는 것 같은 마음에 괜히 한 번 더 꼬장을 부리게 된다. 이기고 지는 문제를  이 순간  나는 왜 떠올리고 있는 건지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지만  번번히 그랬다.  내가 그렇게 행동한 데는 너도 일말의 잘못이 있다고 책임을 전가해 보려 별별 말을 갖다 붙였다. 그러다 말이 안통한다며 입을 아예 닫아 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모질지는 못한 성격이라 상황을 모면하고 싶단 생각에 마지못해 겨우 한 마디를 내버리듯 하고 만다.


 '일단 알았어. 네가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얼른 마무리 짓고 밥이나 먹었으면,

다시 기분이 좋아졌으면,

이 상황이 빨리 끝났으면,

싶은 마음에 습관적으로 감정 없이 사과의 말을  해버렸다. 얼굴엔 억울하고 자존심 상한다는 표정을 뚝뚝 흘리면서 말이다.

다급하면 머릿속에서 필터 없이 먼저 튀어나오는 말들은 상황을 해결하기보단 불난 집에 기름을 들이붓는 격이 돼버리고 만다.

'일단' 미안한 건 뭐고, '기분 나빴다면'은 뭐란 말인가.

문제의 원인이 모두 ‘너’에게 있다는 듯한 말투, 네가 원하니 사과는 한다만 난 사실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말로, 차라리 하지 않은 것만 못한  사과를 하곤 했다.


  잘못을 인정하고 미안한 마음을 전하는 데도 정말 용기가 필요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어려운 말,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거라 생각했던 말, 그래서 더 하기 어려웠던 그 말을 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용기를 내야 했다.

하지만 늘 용기가 필요한 순간에 담백하지 못하게 붙였던 나의 변명, 회피, 다급한 협상의 태도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그 일이 있기 전까 알량 자존 내세웠다.  

    

‘넌 사과받을 기회를 놓쳤어. 화를 낼 때도 그 화를 낸 끝이 어떨지를 생각해보고 냈어야지. 수습하지 못할 거 같으면 화를 내지 말았어야지. 안 그래?’

듣고 나서 한 참을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말. 오래오래 마음에 남아 곱씹게 된다.

사과받을 기회?

상대가 저지른 잘못에 나는 화를 냈고, 그 상대의 잘못에 난 미안하단 말을 듣지 못한 채 사과받을 기회를 잃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 말을 처음 듣고, 난 내가 무슨 엄청난 기회를 놓친 것 같은 생각에 화를 낸 자체가 잘못 것인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세 명이 약속을 했고 약속 장소에 갔지만 그 사람들은 거기 없었다. 전화를 해보니 둘은 이미 변경된 약속 장소에 가 있었다. 화가 조금 났다. 솔직히 화가 났다기보다 조금 짜증이났다는 표현이 적절하겠다. 변경된 장소로 찾아가면서 몇 번을 헤맸고  그러다보니 더  그 상황이 더 짜증스럽게 느껴졌던 건 사실이다.  한 사람은 몹시 미안해했고, 한 사람은 변명을 했다. 자신이 그 날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그리고 더 친한 너희 둘이 알아서 연락을 따로 했어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분명 단톡 방이 있는데 더 친한 둘이 따로 연락을 안 한 것이 잘못이라니! 누구든 변경된 걸 얘기해 주지 않은 건 그쪽 잘못 아닌가. 더군다나 운전해서 오는 사람에겐 톡 확인이 어려울 수도 있었을 테고, 그럼 전화해서 연락을 줬어야 하는거 아닌가 말이다.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계속 화를  수 없으니 어찌어찌 그 날 만나서 했어야 할 일들을 처리하고 헤어졌다

  후에 그날 그렇게까지 화낼 일도 아니었는데 유연하게 넘어가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나 역시 사과의 말을 전하기 위해 두 사람에게 화를 했다. 그날 너무 미안해하던 사람은 자기도  당황했지만 화난 마음을 이해한다고 말했고, 또 다른 사람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알고보니 일부러 받지 않았던 것이다. 몇 번의 전화 끝에 겨우 통화가 되었고,  사람은 나에게 ‘사과받을 기회를 놓쳤다’고 했다.

그 사람 말에 의하면 그러니까 그날 난 그 사람이 사과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얼굴 표정이 너무 썩어 있었단 얘기였다. 나때문에 주변 사람들 너무 불편했다.


 아, 화 났지만 상대방이 사과할 수 있도록 표정관리를 잘했어야 했다니.

정말 몰랐다.

적어도 화를 내려면  거기까지 생각을 어야 했다는 말인가. 정말 그런 건가! 갑자기 머릿속이 띵해졌다.

그래, 내가 감정을 잘 못숨기고 표정에  나타나는 편이긴 하지. 좀 더 참았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의 맘도 들었지만 그건 지금  사람에게 들을 말은 아니지 않나 싶었다. 적반하장도 참.


그 일이 있은 후, 그날 화를 낸 일은 내 기억 속에 부끄러움과 후회로 남았고, ‘사과를 받으려면 사과할 사람에게 멍석을 깔아 줘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로 기억되었다.


‘변명 없이 깔끔하고 담백하게 사과하기’

잘못에 대해 용서를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용서를 할지 말지는 차후의 문제다. 내가 잘못을 한 부분에 대해 일단 군더더기 없이 깨끗하게 인정하고 사과하는 일이 가장 먼저 되어야 그다음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 사과의 시작이 왜 그렇게 어려운 것인지, 일단 변명하고 회피하고, 떠넘기려고 만 했다. 어떨 땐 협상으로 입막음을 하려고만 했다. 그래도 안 되면 이젠 나도 ‘사과받을 기회를 놓쳤다.’고 말하면 되려나.  

    

  산과 바다가 보이는 부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 정성훈이 쓰고 그린 그림책 <사자가 작아졌어!>는 아프리카 초원의 생태계 속에서 먹고 먹히는 관계인 사자와 가젤에 대한 이야기다.

어느 날 점심을 먹고 늘어지게 자고 일어난 사자는 몸집이 아주 작게 변해버렸다. 그 사실을 모른 채 개울을 건너려던 사자는 그만 개울에 빠지게 되고, 그걸 본 아기 가젤이 작아진 사자를 구해준다. 몸집은 작아졌지만 그 동물이 사자란 걸 알게 된 가젤은 낮에 사자에게 먹잇감으로 희생된 엄마를 떠올리며 분노한다. 당황스러운 사자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가젤을 달래본다.  본능대로 배가 고파 그냥 점심 식사를 한 것뿐이라고. 맞는 말이긴 하다. 사자 입장에선 평사시와  같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행동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상황은 바뀌었고, 자신을 위험에서 구해준 가젤에게 일말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것일까.      

사자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잠깐! 잠깐만! 그게 네 엄마였다고?
나는 그냥 점심을 먹으려고 잡았던 것뿐이야.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보다시피 난 너보다 훨씬 작아졌어.
물에 빠뜨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내가 네 마음을 달래 줄게.
어떻게 하면 될까? "    


  자신의 말과 행동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을 때, 솔직히 많이 당황스럽긴 하다. 알고 저지른 일이든 모르고 한 일이든 살짝 맘이 편치 않은 것 사실이다.  일단 ‘네 마음이 아프다면 달래는 줄 게.’ 하는 심정으로 뭐라도 해서 상황을 빨리 마무리 짓고 싶어 하는 건 다 비슷비슷한가 보다.    

  

"그래, 꽃이 좋겠다!"
아프리카에는 없는 꽃들도 너한테 줄게."
"노래를 불러줄까?"
"네 뿔에 진짜 멋진 그림을 그려 줄게.
넌 이제 아프리카에서 가장 멋진 가젤이 될 거야!"     

  

가젤의 마음을 달래주려고 애쓰는 사자의 모습 기특하고 귀엽긴 하지만 엄마를 잃은 가젤의 슬픔이  저 풀릴까.

가젤를 잡아먹은 사자가 자신의 영역 밖 일까지 염두에 두며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있을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자에겐 자연스럽고 당연한 그 일이 가젤에겐 잊을 수 없는 고통이 되었다면? 사자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이든 자신의 행동 하나로 누군가에게 깊은 슬픔을 준 것에 대해 우선 잘못을 인정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지만 사자의 말과 행동엔 그것이 빠져있었다.


  오래된 부부 사이에, 또는 친한 사이에, 또는 가족끼리 굳이 뭘 새삼스럽게 사과를 하고 말고 하냐며 슬쩍 눙치며 넘어가려는 경우 참 많이 보았다.

때론 저녁 한 끼 먹고,

술 한 잔 찐하게 하고,

반짝이는 선물 하나 안겨주고,

그러면 그걸로 됐지 싶어 오래오래 그 흔한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고 넘어가는 일이 다반사.

그게 익숙해지다 보니 그 말이 오히려 새삼스럽고 쑥스럽게 느껴져 점점 더 속으로 삼키게 되고 만다. 물론 어떤 사과의 말보다 진심이 담긴 행동 하나가 마음에 깊이 전해질 때도 있긴 하지,그래도 할 말은 하는 게 좋단 생각이다.    

  

드디어 가젤의 슬픔에 진심을 다해 공감하게  된  사자의 한 마디! 사랑한다는 말만큼이나 어렵고 수줍은 고백,     


"널
슬프게 해서
미안해."     


  가젤이 엄마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은 변치 않는 사실이지만, 사자의 진심 어린 사과는 가젤의 마음에 분명 전해졌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사과한 후에 용서를 받을 수 있을지, 용서를 해줄 마음이 생길지는 상대의 마음이다. 그건 내 몫이 아니니 나는 내 할 도리를 하면 된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지는 것이라 생각했던, 그래서 어김없이 앞서 내세웠던 말들을 거둬들여야 한다.

"네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네가 상처 받았다면...."

"네가 화가 났다면...."

"네가 기분 나빴다면..."

난 모르겠지만 굳이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니 일단 알겠다는 듯이 했던 책임 회피성 말들과 이젠 안녕을 해야 한다.

담백하고 깔끔하게 사과하기!

미움받을 용기만큼 어렵지만, 이젠  용서받지 못하더라도 사과할 용기를 연습해 봐야겠다. 물론  더 앞서 사과할 일을 만들지 말아야 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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