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순록씨 Jun 11. 2023

영화 '더 웨일' 감상문

힘껏 서롤 향해 다시 헤엄칠까.

*영화의 내용에 대해서 서슴없이 이야기를 합니다. 영화를 보신 분은 읽으시며 공감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영화 '더 웨일' 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해야 될 말이 몇 가지 있을 것 같다.

    브런치에서 작가로서 글을 쓰면서 아직 나도 나의 이야기를 쓰진 못했다. 작가가 아닌 사람으로서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또는 모르는 이들에게 하고 싶지 않은 얘기도 충분히 있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자신있게 내 이름을 걸고 '리뷰' 라든지, '평점' 같은 말을 영화에 쓰진 않는다. 나는 그냥 영화를 본 사람 중 1명이고 거기서 받는 영감에 대해서 쓸 뿐이다. 그래서 때로는 '이 영화는 이렇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라는 시선을 짚거나 '이 영화의 이 부분이 너무 인상깊었다' 라는 식으로 의도적인 노력을 기울이기도 한다.

    이렇게 이 글이 그저 '감상문' 임을 먼저 얘기하는 이유는 영화 '더 웨일'에 담겨져 있는 여러 소재들때문이다. 주인공이 동성애자라는 사실, 동성애에 대한 종교의 시선, 그리고 종교를 미워하는 사람들의 시선 등 가볍게 얘기할 수만은 없고 '저는 이게 정답이라고 생각해요.' 라고 가볍게 주관을 드러내기도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도 계속 쓰기를 망설였는데 너무 좋은 영화임에는 틀림없고 그 소재들은 수단일 뿐이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더 깊은 바다 속에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일단 나는 동성애에 대해서 아무 감정도 아무 생각도 없다. 당장 내가 가치판단을 내릴 일이 없었기 때문에 굳이 고정관념을 가지지 않고 있다. 또한 나는 확실한 이성애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종교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해본 적은 있지만 정작 믿는 종교도 없고 종교 활동을 해본 적도 없다. 기독교 정신을 표방한 학교를 다니고 있지만 강요받은 적도 없고 오히려 학교는 개방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주인공이 외형적으로 꽤나 비호감이라는 느낌이 영화 내에 가득하지만 나는 그저 '힘들겠다.'는 생각밖에 안들었다. 이 정도의 밑밥이라면 안전하게 나의 감상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적-Whale Song을 들으며 글을 읽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넓은 바다와 깊은 바다, 그리고 헤엄치는 고래.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를 접하게 된 계기는 단연 '브렌든 프레이저'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 소식덕분이었다. 어린 시절 미이라 시리즈를 정말 좋아했는데 오랜만에 들은 그의 소식이 감동적인 남우주연상이었기에 내심 기쁘기도 했다. 하지만 배우로서 '오랜만에' 라는 말이 얼마나 많은 사연이 담겨있는 단어일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관객과 대중에게 자주 모습을 비추고 좋은 배우, 명품 배우로서 '기억되는 것'이 예능인으로서의 어쩔 수 없는 과제일 것이다. 잊히는 것이 얼마나 쓰라렸을까. 그의 엄청난 연기력이 자신이 아직도 역량이 뛰어난 배우라는 것을 이 영화 속에서 여실히 드러냈다. '연기를 잘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자주 해봤는데, 특히 해외영화를 관람할 때는 더더욱이 연기력에 대한 평가를 확신하지 못하곤 한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며 정말 대단한 연기력이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더 웨일'의 공간은 매우 한정적이다. 연극이 원작인 탓도 분명 있을 것이다. 찰리의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손님들이 왔다갔다하는 식으로 영화는 전개된다. 하지만 이 사실을 눈치챈 건 영화가 끝나갈 무렵 찰리의 문이 밝은 햇살을 향해 열릴 때가 되어서였다. '찰리' 라는 거구의 인물을 연기하면서 영화에 빈틈을 못 느끼게 하고 꽉 찬 공간감, 그리고 질리지 않는 감정선이 말도 안된다.


    영화 속 '고래'는 소설 모비딕의 고래 얘기에서 계속 반복되는데, 특별한 언급은 없더라도 모두들 덩치가 굉장히 큰 찰리가 고래랑 동일시된다고 암묵적으로 여기는 것 같다. 그렇다면 찰리의 집은 마치 하나의 바다일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찰리는 그 바다 속에 갇혀있다. 사냥꾼을 피해 심해에 숨었지만, 수면 위로 돌아오는 법을 잊어버린 또는 잃어버린 것만 같다. 하지만 그는 돈도 식비를 제외하면 거의 사용하지 않고 온라인 강의로 밥벌이도 하고 있으며 집밖에 나갈 일도 전무하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간대의 일주일 전만 되었어도 영화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영화 속 단 한 주만이 이 영화의 시간대이다. 찰리의 건강이 확실히 안좋아지고 다음주엔 죽을 것이 확실시되는 그 과정. 당사자로서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초연한 찰리의 마음 속엔 과연 어떤 생각들이 있었을까?


용기와 자포자기의 사이

출처 네이버 영화

    엄청나게 높은 혈압, 웃기만 해도 죽을 수도 있는 상태. 그의 절친인 리즈는 간호사이다. 거의 찰리의 집에 드나드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리즈는 찰리가 다음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걸 확실하게 알고 초조해한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찰리는 남 얘기라도 되는지 전혀 다른 것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

    찰리는 딸이 8살일 때 가족들을 버렸다. 그리고 그는 죽기 전에 딸 엘리를 집으로 불러 돈을 줄테니 자신의 옆에서 에세이를 작성하라는 요구를 한다. 엘리는 성질을 바락바락내며 온갖 험담을 퍼붓는다. 하지만 찰리는 딸의 이야기를 듣고서 얘기를 하는건지 온갖 긍정적인 말만 하며 화 한 번 내지를 않는다. 리즈 또한 찰리가 엘리를 불렀다는 사실을 알고 화를 낸다. 해서는 안될 짓을 하고 있는 거라며 주의를 준다.

    찰리가 그의 과거를 상징하는 자신의 가족, 특히 딸에게 계속 관심을 주고 붙들어놓으려는데는 큰 결심과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찰리는 지금껏 종교와 사회 바깥으로 추방받아 살아왔다. 세상을 충분히 미워하고 혐오하며 그 화살이 또 스스로에게도 많이 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가 자신의 가족만큼은 직접 떠났다. 물론 순서의 차이도 있겠지만, 찰리는 앨런과 함께 정말 행복했지만 앨런은 모태신앙과 얽힌 갈등으로 인해 자살을 선택했고 그걸 계기로 찰리는 심해에 빠져들었다. 찰리는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앨런을 선택했을 것 같다. 왜냐면 그 마음은 '진심'이었으니까.

    그러나 그의 용기는 자신을 포기하고 혐오하는 것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그는 '살고자 하는 의지' 가 없다. 자신이 죽게 될 운명이라는 걸 알게 되고 괴로워하지만 그는 세상을 떠날 준비를 동시에 한다. 그에게는 숨겨둔 돈도 있었지만 병원에 가기를 강경히 반대하고 그냥 죽기로 한다. 이런 자포자기에서 비롯된 용기는 딸인 엘리에게는 꽤나 이기적이고 가식적이게 느껴질 것이다. 8살 때 나를 버려놓고 이제 와서 뭐가 위해서 나를 찾는거지?


진심은 수면 위로 올라와 솟구치듯 올라가서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속 피자배달부 '댄' 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댄은 어떻게 보면 찰리의 심해 생활을 안정적으로 만들어주는 인물이다. 배달을 올 때마다 찰리와 대면하지 않고 피자를 선반 위에 두고 돈도 정해진 곳에서 꺼내간다. 매일 같은 일의 반복, 그리고 잦은 주문에 댄은 찰리의 요구사항을 외우고 먼저 그렇게 하겠다고 얘기한다. 찰리가 지금까지 집밖에 굳이 나가지 않아도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 어떻게 보면 찰리의 일정한 루틴을 - 비록 건강하진 않더라도 - 지켜주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갑자기 '괜찮으세요?' 라고 소리치며 물어본다. 도와줄 일이 있냐고. 자신의 이름은 댄이라며 소개한다. 그런 그에게 찰리도 떨떠름해하며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괜찮다고 말한다.

    사실 이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한번 이상 고함을 지른다는 사실을 느꼈을까? 그리고 그 고함은 꽤 과격한 방식이더라도 '진심'을 담은 외침이었다. 찰리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다 필요없고 '진심으로 솔직한' 이야기를 부탁했던 것과 같이. 피자배달부 댄의 큰 외침이었던 '저는 댄이에요. 도와드릴 게 있나요?'는 솔직한 말 한마디였던 것이다. 그리고 리즈가 토마스에게 한 호통도, 찰리에게 서운함을 토로하며 한 말도, 토마스의 찰리에 대한 혐오감이 가득찬 한 마디도.

    등장인물들이 모두 가식적이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죽음' 을 직면해 초연해진 찰리의 주변 인물들이 한명씩 찰리에게 진심을 소리치는 느낌들은 찰리에게 불편함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시원한 청량감을 주기도 할 것이다. 그 모습들이 나에게는 고래가 수면 위로 올라와 큰 소리를 내며 물을 뿜는 모습을 연상시켰다. 때론 그 소리로 서로 고래들이 소통하기도 하듯이.


    그래서 한편으론 토마스가 '지금의 육체를 버리고 새 육체를 얻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 는 방식으로 찰리에게 얘기한 것이 얼마나 찰리를 화나게 만든 말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피자배달부 댄은 찰리의 외형을 모르고 오직 찰리의 기침소리와 찰리가 피자를 배달받는 방식만을 알고서도 그를 도와주고자 한다. 반면 토마스는 찰리의 외형을 보고 처음에 당황하지만 혐오스럽지 않다며 자신을 속이고 찰리를 속이며 도와주겠다고 한다. 찰리 입장에서 토마스는 그저 선민의식에 빠져서 자신을 아래로 보는 젊은 청년, 심해에 들어가있는 인간들에게 잘난척을 하지 않고선 못 배기는 사람으로 보여졌을 것이다. 토마스는 결국 찰리에게 '당신은 역겹다' 고 솔직하게 말해버린다.

    하지만 피자배달부 댄은 서로간의 암묵적인 약속을 어기고 찰리와 눈이 마주치고 만다. 그리고 댄은 도망간다. 사실 이 부분에서 '도망갈 것까지 있나..?' 라고 생각했긴 하다. 아마 댄은 순간적으로 놀라 순수한 혐오감을 드러내버린 것일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같은 것을 먼저 떠올리기 전에 나와버린 그의 진심을 말이다. 그 후부터 찰리는 '자기파괴'에 이른다. 과한 폭식을 하고 선생으로서 해선 안되는 욕설을 섞어가며 속 시원하게 학생들에게 일갈의 메세지를 보내고 만다.



역겨움(Disgusting)과 놀라움(Amazing) 사이



    찰리는 영화 속에서 역겨움의 대명사이다. 그 또한 '제가 역겨운가요?' 라며 물어보기도 한다. 하지만 찰리는 딸인 엘리에게는 '어메이징' 하다며 칭찬한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가장 불편한 부분이기도 했는데 영화 중간까지 엘리에게 '어메이징'을 주입하는 찰리의 모습이 너무 이질적이고 부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악행이고 누가 봐도 나쁜 짓인데 그녀를 옹호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얘기한다.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은 역겹고 나쁘다는 엘리의 지론에 반박을 하지만 엘리는 이제 와서 아빠노릇하려고 하지 마라며 화를 내고 거부한다.

    찰리는 딸 엘리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엘리는 찰리의 집에 방문하고서 '나도 저렇게 되는거야?' 라고 묻는다. 외형적인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엘리도 한 마리의 고래와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엘리는 8살 때 아빠에게 강한 거부감을 선물받고서 제대로 삐뚤어졌다. 그 이후 쭉 자신에게 연락 한 통 없었던 아빠를 엘리는 계속 해서 곱씹고 상상하며 '악인'으로 만들어놨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아빠의 이미지를 스스로 바꾸고 인정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엘리는 찰리에게 서슴없이 악행을 저지른다. 가장 큰 기폭제는 '수면제'를 먹였던 일이다. 엘리는 찰리가 가진 지병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있었고 아빠에게 하는 행동에 대한 적절한 선을 찾지 못했다. 어떤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채 그런 위험한 짓을 저지른 것이다.

    하지만 엄마 메리는 엘리를 혼자 키우며 많은 부담감을 느꼈을 것이다. 생계를 책임지는 일도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메리 혼자서 감당하기엔 어려운 일이다. 메리는 엘리에게 과한 기준을 적용하기도 하고 그 안에 들어서지 못하자 포기해버리는 모습도 보인다. 엘리는 엄마에게서 배워야 할 몫만큼 아빠에게 배워야 할 몫이 있었는데 충분히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이다. 엄마 메리는 엘리에게 '악마Evil' 라는 표현을 쓰지만, 물론 그녀의 행동이 선과 악을 따지면 악에 가깝지만, 엘리는 단지 배우지 못했을 뿐인 것도 사실이다. 엘리가 토마스에게 했던 행동을 생각해보자. 골탕먹이기 위한 행동, 이용하기 위한 행동, 약점을 잡고자 하는 모습 등이 순수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행동이 토마스에겐 선행이 되었다. 그걸 알게 된 찰리는 엘리에게 '너도 누군가의 구원이 될 수 있는 사람이다.' 는 걸 알려주고 싶어했던 것 같다.

    세상 모든 걸 싫어하고 세상 모두가 싫어하는 엘리에게 찰리는 자유를 마지막으로 선물하고자 했다. 더 넓고 더 사랑이 넘치는 곳으로 헤엄칠 수 있게, 자신을 포기하지 않게. 아빠라는 존재가 채워버렸던 엘리의 족쇄를 죽음으로서 해체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게 찰리 인생의 가장 잘한 일이 될 수 있도록.


구원을 원하는 모두에게



    이 영화의 원작인 연극은 실제로 극작가가 수업을 하다가 솔직한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주문햇는데 '흥미진진한 인생이 펼쳐지지 않을 거란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는 쪽지를 받고서 구상이 시작된 연극이라고 한다. 얼마나 현실적이고 얼마나 솔직하며 또 얼마나 체념의 심정이 들어가있는 말 한마디일까. 불안함과 흥미진진함은 한끗차이다. 때론 어떤 일이 일어나냐의 문제도 있지만 어떻게 받아들이냐의 문제도 있다. 여느 성공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처럼 모두 마음의 문제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사람은 감당하기 힘든 일을 감당 못하면서 성장하기도 한다. 모든 일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면 그건 긍정이라는 이름표를 붙인 쓰레기통에 불과하다.

    구원은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받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미 나는 구원자 명단에서 제외됐다고도 생각하는 사람들도 꽤 많고 영화 속 등장인물들 또한 그럴 것이다. 죽고 나서의 일들을 걱정하기엔 세상이 너무 혼자 버티기 어려운 일들을 선사한 탓이다. 종교를 찾는 이유에 대해서 보통 '힘든 일이 있을 때' 라고 얘기하기도 하지만,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오히려 그 반대 케이스이다.

    엘리는 찰리의 집에 온 첫 날, 찰리의 보조기구를 내동댕이치며 자신이 있는 곳까지 직접 걸어서 와보라고 호통친다. 찰리는 노력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엘리는 '그럼 그렇지' 라는 듯이 문을 닫고 나간다. 그러나 며칠새 두 사람 사이에는 서로 이해하고 용서해주진 못하더라도 의문점을 지울 수 있는 일들이 있었고, 찰리가 곧 죽는다는 사실 또한 엘리는 알게 된다. 찰리의 마지막 날, 찰리는 엘리에게 성큼성큼 발을 내딛는다. 마지막 한달음을 내딛으려하는 그 찰나 엘리 또한 찰리에게 다가간다.

    엘리는 지금껏 찰리가 자신이 보지 못하는 곳으로 가기만 해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정말 진심으로 찰리가 엘리에게 다가서고자 하는 것인지 알아야만 했다. 그리고 찰리가 정말 죽을 힘을 다해, 정말로 죽을 힘을 다 해서 엘리에게 다가서자 엘리 또한 한 걸음을 다가간다. 영화에서 말하는 구원의 형태는 이런 것이었다. 곧 죽어가는 사람에겐 해방을, 앞으로를 살아갈 사람에겐 사랑을 주는 것.

    앨런이 하이라이트쳐두었던 성경의 문구를 토마스는 육체때문에 불행했을 것이라고 해석했지만 나는 조금 다르게 해석하고 싶다. 에세이를 쓰면 그 안에 사람의 마음이 수면 위로 드러나듯 담겨지는 것처럼. 진심을 터놓고 소통하기 위해서는 육체도, 성향도, 성격도, 환경도 다 버리고 하나의 영혼이 또 다른 영혼을 만나야 하는 것.


출처 네이버 영화


    마무리하며,

      솔직히 전혀 소재에 대해서 모르고 오직 에세이를 쓰는 이야기 라고만 알고 봤었는데 꽤 깊은 생각을 필요로 하는 소재에 당황하기도 했다. 영화에 여러번 등장하는 엘리의 모비딕 에세이에 대해서는 깊게 얘길 꺼내고 싶지 않다. 다만, 엘리의 감정이 담겨져 있고 그 내용이 훌륭하든 어쨌든 그 에세이가 엘리 그 자체이기에, 찰리가 그 에세이를 계속 간직하고 곱씹어읽었다는 것이 엘리에게도 구원이었을 것이고 찰리에게 또한 위태로운 순간마다 딸의 에세이를 읽으며 안정을 취했다는 것이 구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짧은 글 속에 엘리의 어릴적 찰리에 대한 마음이 담겨져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감정들이 거부되면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입체적이다. 모두 사랑스러운 부분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부분도 있다. 그리고 심해에 있는 것도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도 골고루 필요한 일이다. 무조건적인 선과 악, 예의나 역할 이런 것을 초월해서 주인공 찰리의 끊임없는 외침, '제발 솔직하게!'. '솔직함' '소통' 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준 영화, 더 웨일에게 감사하다.


작가의 이전글 김동률의 <황금가면>, 태양을 바라보는 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