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거의 모든 시간을 잠으로 보낸다. 그렇다면 난 사실 별로 그렇게까지 힘이 들어서는 안된다. 물론 밤에 잠을 설치기는 하지만, 뭐 이까짓 거, 혼자일 때도 수시로 밤을 새우지 않았는가.
온전히 나에게 맡겨진 이 생명이 너무 신기하면서도 눌려오는 책임감이 무섭다.
'이 아이를 이 낯선 미국 땅에서 어떻게.'
나는 당장 시작할 수도 없는 직장에 집착하며 매일 인터넷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이미 미국에 들어오기 전 우리는 내가 먼저 직장을 구하고(그 길이 가장 쉬울 줄 알고), 영어가 조금 익숙해진 후 남편은 직장을 찾기로 걔획을 세웠으니..
물론 남편도 내가 모르는 책임감으로 괴로웠겠지만, 나는 그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180도 달라진 나의 상황과 생활패턴으로 인해 나의 이 조급함과 불안감은 온전히 남편에게로 향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참고 견뎌준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다.
나는 당장이라고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사람처럼 이력서를 넣고 있었다. 그럴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뽑아만 준다면 어떻게든 상황을 만들서라도 일을 시작하리라.
하지만 누가 나를 뽑아줄 것인가. 미국 병원 시스템에 아무런 지식이 없으며, 영어는 겨우 의사소통만이 가능한 나를.
많은 생각들이 있었지만, 절박함을 이길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한 달 후쯤 두 병원에서 면접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하나는 집 근처 400 beds 정도의 한국으로 하면 중소병원, 하나는 LA에 있는 그 우명한 cedars sinai hopital.
이게 말이 되는가.
그 큰 병원에서 나를 만나주다니. 나는 괜히 우쭐해지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설마 나를 뽑겠어? 혹시? 아니야? 내가 할 수 있을 까? 많은 생각들에 잠을 설쳤다.
첫번째 병원이 있는 곳은 vietnam community라고 알려져 있어 아시아계 간호사들이 많은 곳이다. 실제로 필리핀 간호사들은 미국 어디에나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베트남계나 태국 간호사도 또한 일도 잘하고 영어에서는 거의 완벽하다.
남편은 학교를 빠지고(차가 한대뿐이라) 온 가족이 병원을 향했다.
면접은 그 당시에는 나쁘지 않았던 걸로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가하면 아마도 나의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뭐 지금도 별반 영어가 딱히 많이 늘거나 발음이 좋아진 건 아니지만, 최소한 지금은 상대방을 쳐다보며 대화를 하고, 안 되는 발음은 다른 단어로 바꿔 말할 수 있는 여유는 있으니.
나는 일주일 후 한통의 이메일로 그곳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음을 통보받았고, 그것은 온전히 다음 면접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다음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 cedars sinai hospital.
그곳의 수술방 charge 간호사가 한국인이라고.
'와 너무 대단하다. 자랑스럽다. 부럽다.'
아직도 그분이 일을 하는지 얼굴 한번 보지 못한 그분이 가끔 궁금하다.
나는 그 분과의 만남도 없이 HR(Human Resource) 사람과의 간단한 인터뷰만으로 이미 쫑난것을 알았다.
난 너무 준비가 안되어있었다. 영어는 생각보다 높은 벽이었고 그럼에도 가장 기본적인 의사소통인 것을.
나는 절망했고 무서웠으며, 그럼에도 포기는 할 수 없는.
길을 잃었다.
흔한 말이지만, 하나님은 하나의 문을 닫으면 다른 쪽의 문을 열어준다는.
그 후 나는 아기를 키우며 여전히 인터넷을 보며 하루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때 아기에게 조금만 더 집중할 것을, 조금만 더 아기와의 시간을 즐길 것을
물론 후회도 있지만, 사실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뭐가 달라질 것인가.
두 달 후쯤, 나는 전화기에 낯선 사람의 메시지가 남겨진 것을 보았다. 그것이 나의 인생을 100%는 아니더라도 70%는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Hi, This is Donna from north anaheim surgery center'
'어? surgery center?
그게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