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Shaun SHK
Sep 26. 2022
누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갔을까
예상하지 못한 친절
그날은 집안의 재활용품들을 버리러 나가는 길이었습니다.
특급 배송의 잔재들인 누르스름한 종이박스와 식수 공급의 흔적들인 빈 생수 페트병들을 구석에서 끄집어내 데리고 나갔습니다.
내다 버릴 재활용품을 양손 가득 보따리상처럼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보니 이웃 주민으로 추정되는 다른 한 사람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사는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총 5대지만, 내가 사는 층수가 이용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는 딱 2대입니다.
엘리베이터 대수에 비해 세대수가 많다 보니 한번 놓치게 되면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보통은 이용 가능한 두 대의 엘리베이터 버튼을 둘 다 눌러놓고 기다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것이 먼저 올지 모르니 일단 두 개 다 눌러놓고 기다리는 식입니다.
그 이웃 주민은 한 대의 엘리베이터(편의상 '엘리베이터A') 버튼만 누르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 엘리베이터A가 곧 도착할 참이었습니다.
엘리베이터A가 막 도착할 즈음, 집에서 지갑을 두고 왔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외출하는 김에 사 올 물건이 있어 미리 지갑도 챙겼어야 하는데 뒤늦게 생각이 났습니다. 양손 가득 있던 재활용품 보따리들을 근처 바닥에 잠시 놓고 집으로 다시 걸어갔습니다.
이제 막 도착하려는 엘리베이터A는 결국 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옆에 있던 엘리베이터B는 아예 버튼도 누르지 않았던 터라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 같았습니다.
집에 들러 지갑을 챙겨서 돌아와 보니 앞서 기다리고 있던 이웃 주민은 엘리베이터A를 타고 내려갔고, 내가 두고 갔던 재활용품 보따리들만 덩그러니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아무도 버튼을 누르지 않았던 엘리베이터B 버튼이 눌러져 있었습니다.
내려가는 표시의 화살표 버튼에 불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누가 버튼을 누르고 간 거지?"
버튼이 눌러져 있던 엘리베이터A는 그 이웃 주민이 타고 내려갔고, 옆에 있던 엘리베이터B는 지갑을 가지러 가기 전까지는 분명히 버튼이 눌러져 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제3의 인물이 엘리베이터B를 타고 가기 위해 눌렀다기에는 지금 엘리베이터 앞에 나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지갑을 가지러 간 잠깐 사이에 엘리베이터B 버튼을 눌러 줄 사람은 함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그 이웃 주민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웃 주민 입장에서야 기다리고 있던 엘리베이터A가 곧 도착하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옆에 있던 엘리베이터B 버튼을 새삼스럽게 누를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엘리베이터B 버튼은 눌러져 있었고 나는 타기 직전에 놓친 엘리베이터A 대신 바로 옆에 있는 엘리베이터B를 곧 탈 수 있었습니다.
잠깐 집에 다녀온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으니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지는 못합니다.
1) 두 대의 엘리베이터 앞에는 나와 그 이웃 주민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2) 그 이웃 주민은 내가 엘리베이터 근처에 종이박스와 페트병 보따리를 잠시 놓고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3) 제3의 인물이 갑자기 나타나 엘리베이터B 버튼만 누르고 홀연히 사라졌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재활용품을 가득 들고 서 있던 내 모습을 봤으니 내가 곧 다시 돌아와 엘리베이터를 탈 것이라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그때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버튼을 눌러줄 수 있는 사람은 그 이웃 주민밖에 없습니다.
여러 정황을 고려했을 때 엘리베이터 앞에 있던 그 이웃 주민이 엘리베이터A를 타기 직전 옆에 있던 엘리베이터B를 대신 눌러주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친절한 이웃이 짐이 많은 나를 위해 엘리베이터 버튼을 대신 눌러주고 내려갔다.'
나에겐 대단히 좋은 의미로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일면식 없는 이웃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방금 마주친 사람을 위해 다른 엘리베이터를 눌러 주고 간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배려입니다.
내가 그 상황이었다면 곧 엘리베이터를 타러 올 이웃이 있다는 걸 알더라도 굳이 다른 엘리베이터 버튼을 미리 눌러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처음 마주친 사람에게 그렇게까지 적극적 호의를 베풀어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일면식 없는 이웃 주민으로부터 배려와 친절을 받으니 지금 살고 있는 공간에 대한 만족감이 커졌습니다. 가끔 소음이나 쓰레기 투척으로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못마땅한 이웃 사람들도 있지만, 이번에 내가 받은 뜻밖의 배려를 통해 이웃에 대한 생각이 조금 더 긍정적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번에 받은 친절을 나도 다른 이웃에게 전달한다면 그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다시 다른 이웃에게 배려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긍정적인 연쇄 반응들이 이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선의는 또 다른 선의를 만들어내고 선의의 순환이 만들어집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푼다는 것은 마음이 여유롭고 배려심이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도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낯선 누군가에게도 흔쾌히 친절과 호의를 베풀 수 있는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힘들고 지친 하루이더라도 마음만은 누구에게나 너그럽게 가질 수 있다면 그 긍정의 태도는 선의의 순환이 되어 나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재활용품 버리다가 문득 기분 좋아지는 하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