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현역 근처에 위치한 '피크닉(piknic)'은 전시된 작품뿐만 아니라 공간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작품이 되는 공간입니다.
피크닉을 소개하는 글에 따르면, 업무용 건물이었던 이곳을 전시공간으로 탈바꿈시킨 결정적 이유는 진입로에 위치한 수백 년 된 느티나무들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도시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식물로부터 위안을 받는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서 아름드리나무 근처에 터 잡았습니다.
피크닉 설립 취지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탄생부터 자연과 함께 하는 공간입니다.
피크닉을 방문하는 날에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비 내리는 날 방문한 피크닉은 햇살이 내리쬐는 날과는 다른 감성으로 관람객들을 맞이합니다.
흐리고 구름 가득한 하늘을 배경으로 수직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보면 주변 콘크리트 빌딩들이 평소보다 더 삭막하고 침체된 모습으로 느껴지지만, 그와 대비되어 피크닉 주변 빗방울을 맞는 식물들은 싱그럽게 생명력이 넘쳐나 보입니다.
비 내리는 날 피크닉을 방문하더라도 날씨가 좋지 않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비 내리는 도시의 무채색에 대비되어 자연의 색채감과 생동감을 더 깊이 있게 느낄 수 있습니다.
티켓 발권을 하고 난 후 전시관 입구로 가기 위해선 데크를 따라 'ㄷ' 자 동선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주변의 나무와 푸른 식물들을 보며 입장하게 만드는 동선은 서울의 번잡함과 소란스러움을 한 겹 벗겨내고 차분하게 전시관으로 갈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담장 밖으로 시선을 넘기면 무미건조한 회색 빌딩들이 솟아 있지만 조금만 아래로 시선을 내리면 아름드리나무와 푸른 식물, 흙이 있습니다.
자연을 벗삼아 전시관 입구로 향하는 길은 건물의 정체성을 잘 보여줍니다.
건물로 들어선 방문객은 실외로 나갔다가 다시 실내 건물로 들어가는 독특한 동선을 경험하게 됩니다.
실내와 실외가 연결되어 있고, 인공과 자연이 연결되어 있는 느낌을 줍니다. 이 공간 자체가 자연을 향해 열려 있고 또한 이곳을 방문하고자 하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공간이라는 기분이 들게 합니다.
전시관 입구로 가기 위해서는 실외로 나와 데크를 따라 걸어야 한다. (사진출처 : 피크닉 공식 SNS계정)
비가 오는 날에는 전시공간 스태프들이 야외 이동용 우산을 비치해 놓습니다.
관람객들의 동선마다 늘 충분한 수량의 우산이 구비되어 있도록 스태프들이 계속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최적의 관람 환경을 위해 스태프들이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이곳은 전시 관람자들에 대한 편의와 최적의 관람 환경을 위해서라면 운영의 번거로움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줍니다.
데크를 따라 짧게 걸은 후 전시관 입구에 서게 되면 마치 누군가의 저택 앞에 선 기분이 듭니다. 초청을 받고 주인의 환대를 기다리는 들뜬 방문객들처럼 이곳 전시관 입구에서는 잠시나마 설렘이 듭니다.
현재 피크닉에서 진행되고 있는 전시는 <프랑수아 알라르 : 비지트 프리베>입니다.
프랑수아 알라르는 유명인사, 예술가들의 사적인 공간을 40여 년간 촬영해 온 프랑스 사진작가입니다.
그가 찍어 온 수많은 유명인사, 예술가들의 사진이 전시관을 가득 채웁니다.
이번 사진전은 작가가 다른 예술가들의 집을 방문하여 그 사적인 공간을 촬영한 기록들이라는 특색이 있습니다.
관람객은 전시장 입구에 들어설 때 프랑수아 알라르가 예술가의 집에 들어갈 때처럼 누군가의 사적인 공간으로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게 됩니다.
마침 스태프분이 직접 전시관 입구의 문을 열며 즐거운 전시 관람을 하라는 멘트를 할 때면 내가 정말 저택 주인의 초청을 받고 집 내부의 사적인 공간을 둘러보는 느낌이 듭니다.
출처 : 피크닉 공식 SNS계정
전시장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단정하고 고요한 전시관이 나타납니다.
전시관은 사진 촬영은 가능하지만 무음으로만 가능하도록 제한을 뒀습니다. 덕분에 찰칵대는 스마트폰 셔터음 개입 없이 작품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합니다.
원치 않는 셔터음의 개입으로 감상이 깨지는 것을 방지한 작은 가이드라인은 이곳이 최적의 전시 경험을 위해 섬세하게 신경을 쓴다는 느낌을 더해줍니다.
출처 : piknic 공식 인스타계정
전시관 내부에 들어서면 넓게 난 창문으로 주변 풍경을 볼 수 있도록 해놓은 점이 눈에 띕니다.
조금 전 내가 걸어온 데크와 건물 진입로 주변의 푸른 나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전시관에 걸려있는 작품뿐만 아니라 커다란 창문이 하나의 프레임이 되어 외부 풍경을 액자에 담아 전시해 놓은 것 같습니다.
전시장을 다니면서 또 한 가지 느낄 수 있는 특이사항은 스태프들이 수시로 향기나는 무언가를 뿌리고 다닌다는 점입니다.
정확히는 방향제인지, 향기 나는 탈취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향기가 감상하는 중간중간 느껴집니다. 관람객들이 편안하고 기분 좋게 관람을 할 수 있도록 작은 부분들 하나하나까지 신경을 쓰는 느낌입니다.
전시 작품에 대해 조금 더 얘기를 하게 되면,
이번 사진전을 통해 집이나 작업실 등 사적인 공간에 담긴 한 개인의 취향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각자의 다양한 취향에 따라 꾸며져 있는 집을 보면,집이야말로 그 사람의 내밀한 개성을 가장 입체적이고 생생하게 구현한 결과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빌라 케릴로스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고르라면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의 저택 내부가 기억납니다. 그 색감을 보고 있자면 다른 컬러 필터를 달고 세상을 보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의 공간들
화려하고 아름다운 작품들이 많았지만 나의 눈을 사로잡는 것은 퇴색된 시간의 흐름이 묻어있는 작품들이었습니다.
라 쿠폴라
그중 <라 쿠폴라>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적혀 있습니다.
"사랑에 빠진 감독과 배우가 건축가에게 부탁하여 둘만을 위한 돔 모양의 안식처를 마련하지만 이들의 결별 후 이 안식처는 아무도 돌보지 않아 버려진 공간이 되고 말았다. "
라 쿠폴라 - 사랑으로 충만했을 공간이 지금은 한없이 쓸쓸하게 남아있다.
집이란 곳에는 사람의 손길이 지속적으로 닿아야 합니다. 손길을 주며 다듬는 공간에 자기만의 개성을 숨결처럼 불어넣어야 살아있는 공간이 됩니다.
이 공간은 연인이 함께 손길을 주고 숨결을 불어넣었지만 그 관계의 끝과 함께 이곳은 버려지고 말았습니다.
자연은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아도 되고,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아야 더 온전한 모습을 갖출 수 있습니다.
반면 인간이 만든 집은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순간 그 빛을 잃게 됩니다.
감정 없는 돌로 쌓아 올린 집이지만 우리의 감정이 담기지 않는 순간 그곳은 퇴색되기 시작합니다.
이탈리아 화가 조르조 모란디의 아뜰리에
사진의 가치는 기다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회화는 예술가가 붓을 들어 그리는 순간부터가 작품의 시작이라면
사진은 셔터를 누르기 훨씬 전, 피사체를 포착하고 적당한 빛과 적절한 장면이 만들어지기까지 기다리는 시간부터가 작품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셔터를 누르는 찰나의 순간이 작품 활동의 전부라고 말한다면 중요한 가치를 빼놓고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랑수아 알라르는 누군가의 사적인 공간을 찍기 위해 20~30년의 시간을 기다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의 꾸준한 요청과 기다림에 유명인사는 자신의 가장 내밀한 공간을 여과 없이 사진작가에게 공개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의 작품에는 작가가 기다린 오랜 기다림과 인내의 가치가 함께 담겨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누군가의 집 내부 인테리어가 아름답고 특색있다는 것을 넘어 예술가들이 자신의 사적인 공간을 촬영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기까지, 그 오랜 기다림이라는 가치가 이 사진전에 걸린 작품들에 담겨 있습니다.
이곳에 오기 전, 사진이라고 하면 회화 작품과 비교해서 쉽게 결과물이 나온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셔터를 누르는 순간은 찰나지만, 그 순간이 포착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생각 이상으로 길고 인내심이 필요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인내의 시간을 거쳐 찍은 사진을 쉽게 나오는 결과물로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진전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감상의 폭을 넓혀준 전시이자, 피크닉이라는 도심 속 자연을 향해 열린 공간을 느낀 기분좋은 나들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