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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e Park Nov 04. 2021

나의 행복, 너의 행복

<완전한 행복 (정유정)>



책의 처음은 주인공의 딸인 지유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엄마가 비밀이 무슨 뜻이라고 했지?"
엄마가 복습을 시키듯 물었다. 지유는 대답했다.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되는 거요."
"그리고?"
'그리고?'는 이런 뜻이다. 답이 완전하지 않아. 지유는 나머지를 채웠다.
"말하면 벌을 받아요."


책을 몇 장 넘기지 않았을 때 이 부분을 읽으면서 보통의 어린아이의 대화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외에는 지유의 시선에서 엄마가 오리 먹이를 만드는 방법이 자세하게 그려지는데 그때는 오리 먹이를 만드는 장면이 이상하다는 생각보다는 지유는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다른 아이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지유의 이야기를 지나 주인공인 유나의 현 남편 은호의 이야기, 유나의 언니 재인의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2부의 제목이기도 한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녀는 누구일까


'행복은 덧셈이 아니야. 행복은 뺄셈이야. 완전해질 때까지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가는 거'라는 유나의 행복에 대한 정의가 그녀가 누구인지 가장 잘 드러내 준다.


우리는 인생에서 많은 사람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란다. 그중에서도 자아가 자라고 성격이 형성되는 시기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는 존재는 가족일 것이다. 

<완전한 행복> 책 발간 후 작가가 인터뷰에서 주인공 유나를 이렇게 표현했다. "유나는 사이코패스가 아니다. 악성 나르시시스트이다. 사이코패스는 정신질환이 아니지만 나르시시스트는 병이다. 사이코패스는 타고나지만 나르시시스트는 성장 과정에서 생긴 후천적 정신병이다"


뒤이어 "사람은 성장과정에서 건강한 좌절을 경험해야 해요. 어릴 때 장난감을 사달라 조를 때 부모가 슬기로운 방법으로 넘길 수 있다면 성공적인 육아죠. 유나는 그럴 부모가 없었어요. 거기에 언니가 자신의 것을 다 빼앗았다고 생각하고 그에 대한 앙심이 커졌죠. 결국 주변 사람들 모두를 도구로 생각하는 극단적인 나르시시스트로 자랐어요".


극단적 나르시시스트인 유나에게 있어 자신이 중심에 선 이 무대에 모든 주변 사람들은 모두 유나를 위해 존재해야 하며, 유나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여야 한다. 그렇기에 자신의 딸과 현 남편인 은호의 마음을 조종한다. 우리 사회에서 많이 이슈 되고 있는 '가스 라이팅'의 전형적인 예이다. 




문을 열고 나오기까지 아이가 감당해야 했을 갈등과 두려움을 알기에 그랬다. 몇 시간 전 둘의 대화를 들었기에 더욱 그랬고.
(중략) 다른 하나는 오늘 밤 지유가 방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것이었다. 절망적인 소식이었다. 유나는 지유를 지배하는 신이었다. 자신은 지유가 아니라 지유의 신을 상대해야 하는 것이었다. 


지유에게 유나는 엄마가 아닌 유나의 세계이자 신이었다. 정신적으로 지유를 지배하며 지유를 자신의 인생의 행복의 도구로 사용했다. 건강한 가정에서 자라지 못하면서 극단적인 나르시시스트가 되기 전까지 다른 정상적인 사람들에 의해 변화될 기회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지유는 유나의 밑에서 자라면서도 유나를 진정으로 아껴주는 이모와 할머니를 만나 엄마의 독백 무대의 도구에서 벗어날 기회를 얻었다. 


그러기에 유나라는 인물이 더욱 궁금해졌다. 자신의 완전한 행복을 위해 딸과 남편을 조종하고 자신의 행복을 위한 도구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에는 그 상대가 누구이던 제거해야 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는 잔인한 방법으로. 



이 소설은 무대의 주인공인 유나의 시선이 아닌 그 주변에서 도구로 이용당하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그려진다. 그 이유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종의 기원이 주인공의 속을 다 뒤집어서 보여주는 것이었다면 이번엔 주인공이 하는 짓에 의해 타인의 삶이 파괴되고 황폐화되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했다. 

작가의 말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적었다. "악인의 내면이 아니라, 한 인간이 타인의 행복에 어떻게 관여하는지, 타인의 삶을 어떤 식으로 파괴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으므로."


유나의 세계에는 다른 사람의 생각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모순적으로 작가는 유나가 생각하지 못하는 그 시선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초반부터 이 끔찍한 몇 년간의 일의 범인이 누구인지 읽는 독자들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책을 끝까지 놓을 수 없게 만든다. 여기가 최악이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 다음 장에서 더 끔찍한 일이 있었음을 맞딱들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는 특정 인물을 떠올린 적이 없었다. 하지만, 작가의 말을 읽으며 작가가 그 '누군가'의 실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했다. 그 문장을 읽으며 번뜩 한 이름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소름이 돋았다. 유나라는 인물이 소설에만 존재할 법한 끔찍한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유나보다 더 끔찍한 나르시시스트가 우리와 함께 살고 있었구나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극단적이지 않아도 다양한 측면의 나르시 시트들은 존재한다. 그렇기에 '가스 라이팅'이 사회의 이슈로 떠오르고, 보여주기 식의 행복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겸손이 미덕이라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는 남들이 원하는 것에 자신을 희생하며 그것이 옳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착하다'라고 포장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착한 사람'이 되면서 자신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고민 하짐 못하게 되는 자존감 낮은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사회는 더 이상 '착한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보다 다른 사람을 위에 놓았던 사람들에게 이제는 나의 행복을 찾으라고 말한다. 그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나의 행복만을 추구하게 된다.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옳지만 나의 행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행복할 권리까지 침해해서는 안된다. 모든 일에 중간을 찾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지만 나의 마음을 돌아보면서도 중심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렇기에 작가가 작가의 말 마지막에 남겨놓은 문장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리고 기억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이며 삶의 목적이 되기도 한다. 다만 늘 기억해야 한다. 우리에겐 행복할 권리와 타인의 행복에 대한 책임이 함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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