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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숙 Dec 21. 2024

삶과 앎과 시

삶과 앎과 시   

백년어 서원 <죽간독서회>  

 

  죽간 독서회에서 <김수영을 읽다, 김수영을 쓰다>라는 제목으로 김수영 시인의 시와 산문, 그 미학과 사상을 되짚어 본 지 벌써 9개월이 지나가고 있다. 김수영의 시와 산문, 번역집「시인의 거점」과 평전을 지나 지금은 독서회에서 계획한 마지막 책으로 문광훈의 「시의 희생자, 김수영」을 읽고 있다. 


  김수영을 공부하며 나의 처음 화두는 김수영 시어들의 특징이었다. 지금이면 별스러울 것 없는 일상어의 시어화가 우리 문학사에서는 김수영으로부터 출발했음을 확인하며 그의 반시론을 조금이나마 더듬어볼 수 있었다. 일상어와 시어의 경계를 허물며 ‘비니루, 파리통, 주사기, 국산 슈빙지, 아무튼 구질구질한 생활필수품’ 이라든지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값비싼 피아노가 값비싸게 울린다, 돈이 울린다 돈이 울린다’ 등 일상적 언어와 언어의 범속화로 그는 시의 현대성을 획득하고 있었다. 이는 앙리 르페브르의 책 「현대세계의 일상성」의 전문을 통해 다시 한번 더 증명된다.1) 그 과정에서 나는 보들레르를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현대인이고 도시인이기에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자각한 사람으로 현대인 예술가의 자의식을 확립했다고 한다. 거친 현실에서 시가 드러나는 곳은 바로 그 거칢이 가장 강렬한 지점이라고 했다. 또한 가차 없는 현실이 허위의식을 뚫고 나타날 때 그것을 정형에 매이지 않고 가차 없이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밀려드는 새로운 시대의 그 혼란과 예감 속에서 삶과 앎과 시가 따로이지 않았던, 온몸으로 밀고 갔던 김수영이 우리에게는 보들레르였던 것이다. 기형도 유고 시집 서문의 두 문장에 한 번 더 방점을 찍기도 했다.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어둡고 축축한 밤거리를 쓸쓸히 떠도는 구름 한 장 같았던 시인 기형도 역시 김수영을 공부하고 깊이 공감했으리라 충분히 짐작되는 문장이지 않은가. 


  모더니즘, 리얼리즘 그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통일하거나 갱신한, 그대로 ‘자유’이자 ‘시’였던 김수영을 통해 나의 시는 여전히 미숙하고 실패하고 있음을 매번 느껴야 했다. 그러나 실패와 한계의 자리는 동시에 가능성의 자리임을 믿는다. 시 역시 실패 속에서 실패를 모르고, 실패의 운명이야말로 곧 시의 희망이니까. 이런 생각 중에 인상깊게 읽은 시인은 황인찬이다. 그의 시는 시적 순간이 시편이 되며 시의 순간으로부터 실패해 버리는, 비유의 한계를 다른 방식으로 넘어선 것 같았다. 즉, 어떤 시적 순간의 잠재적 에너지 상태를 언어로 드러내기를 최대한 지양하며 다만 그 에너지가 응축된 정황에 대해서만 담담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언어의 뼈를 발라내어 본질에 가닿을 수 있을까? 그 어떤 비유 없이 시를 쓸 수 있을까? 언어는 세계의 본질로부터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있고 언어 그 자체가 세계의 은유라는 걸 몰랐던 어린 시절의 질문들도 다시 떠올리며 나는 그의 곁에 서서 그가 느꼈을 말할 수 없는 어떤 시적 순간에 감응해보는 것이다. 그때 그가 말한다. “느껴져?” 


  두 번째 화두는 시적 주체에 대한 고민이었다. 김수영은 세계에 밀착되어 있었고 문학에 투신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가족과 현실의 문제 앞에서 딜레마를 겪으며 ‘차라리 위대한 것을 바라지 말았으면’이라고 고백하고 있었다.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며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고도 했다. 이는 가감 없이 ‘나’에게 진실한 언어의 고유성이 보편성을 획득한, 그의 시에 나타난 시적 화자와 실제 시인의 일치성을 진정성 있는 고백시의 맥락에서 언급하는 증거가 되기도 했다. 번역 작업을 통해 세계문학을 적극적으로 경험한 이력과 그의 문장 속에서 세계문학과 조우하는 대등한 주체로서의 목소리를 읽어내는 글도 있었다. 그는 서구문학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종이야말로 ‘탈을 바꿔 쓴 후진성이라고 일갈하며 이 뒤떨어진 현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시인의 태도야말로 가장 안타깝고 부끄러운 것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그에게 문학은 나를 넘어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었고 타자의 언어를 나의 언어로 바꾸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세계문학이 한국문학화 되는 것이었고, 한국문학이 자신의 목소리로 세계화되는 것이었음’2)은 박수연의 논문을 통해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김수영 시의 주체에 대한 논의 중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그의 시 ‘풀’과 ‘묘정의 노래’ 시적 화자 안에 ‘귀신을 접하는 무당적 존재’가 함께 한다는 임우기의 논의였다. 즉, ‘묘정의 노래’에서 깊은 밤 묘정에서 천지인 간에 서로 작용하고 조화하는 음양의 기운이 곧‘귀신이 조화를 부리는 시적 아우라’에 감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며, 나아가 ‘풀’에서 특유의 귀신론적 사유와 관점을 일관되게 보여준다고 했다. 또한 ‘소리’의 기운이 김수영의 시와 시 짓기의 근원성이다. 즉, 소리를 통해 언어는 언어로서 존재를 불러들인다. 소리의 기운이 시적 존재의 근원임을 보여준 걸작이 <폭포>라고도 말하며 이 시에서 시적 존재 혹은 언어적 존재의 심오함을 경이로운 직관력으로 보여준다고 했다.3) 


  생각해보면 산 사람과 귀신이 따로이지 않을 것 같다. 현대 물리학 관점에서도 물질로서 인간이 한없이 흩어지면 결국 분자에서 원자로 나아가 입자이거나 파동으로 그저 우주를 떠도는 에너지 다발이 아닌가. 즉, 빅뱅에서부터 시작되어 끝없이 모이고 흩어지길 반복하며 지금 여기서 잠시 나와 너의 몸이고 마음이고 사물들인 것이다. 고작 몇십 년의 기억에 사로잡혀 ‘나’라는 단단한 상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 시의 화자론에서 주체론으로 논의가 이어지고 끊임없이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어떻게 타자에게 가 닿을 수 있을까 자기 분열 및 해체에 이르렀던 시인들의 고민 역시 같은 맥락이지 않은가. 이 지점에서 황병승을 지나 인상깊은 시인은 김복희이다. 특히 3집 ‘스미기에 좋지’에서 그의 시적 주체는 씌거나 스미는 주체를 발명해낸다. 아니, 유전자적으로도 이미 우리는 씌거나 스밀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의 존재였으니 발명이 아니라 발굴인가? 상처 주지 않으며 타자에게 가닿으려는 김복희 시인의 윤리적 상상력, 그 다정한 마음의 움직임에서 그의 시편들이 리듬을 가지고 비로소 시로 일어선다. 입자나 파동이 모이고 흩어지듯 문장들 역시 시공간을 넘나들어서 단순히 어떤 틀에 가두어 해석하거나 분석하려 들면 낭패를 보게 된다. 다만 시를 쓰며 좋은 사람이 되는 길을 찾고 있는, 타자에 투신하고자 하는 그의 마음에 씌거나 스며보려 해야 할 것이다. 스밈을 당하거나. 김복희의 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 역시 ‘쌀 씻는 소리, 오이를 깎는 소리,..조용히 우는 소리...죽은 매미를 발로 밟는 소리...’등을 생각해보게 하며 묻는다. ‘세상에서 소리를 하나…… 데리고 갈 수 있다면 어떻게 할래?‘ 라고. 정말 우리는 죽어서 흩어지고 흩어져서 1초에 6만 개씩 사라지는 별들처럼 사라져서 저 아득한 우주를 건너갈 때 어떤 소리로 남을까. 김수영은 저 우주적 지평선을 훨훨 넘어가버렸을까, 그를 생각하는 나의 마음 곁에 잠시 친구처럼 스승처럼 앉아주기도 했을 거라고 나는 믿고 싶다. 


  김수영을 공부하며 시어, 주체, 표현, 사상 그 모든 관점이 결국 시와 생활과 예술과 삶이 따로이지 않을 때 내용과 형식이 따로이지 않은 좋은 시가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할 수 있었다. 그 따로이지 않음의 의미를 이성복 시인은 김수영 문학상 수상소감4)을 통해 밝힌 바 있다. 너와 함께 나누고 좌절하고 극복해가고자 하는 그 다정한 눈빛과 손짓이 담기지 않은 시는 그저 자기 연민에 불과한 울음일 것이며 언제나 실패한다는 걸 또 한 번 깨닫게 하는 문장이었다. ‘이 시의 주체는 어디서 출발했고 어디에 서 있나, 또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이 주체의 삶과 앎과 시는 얼마나 세계와 밀착되어 있는가? 의도와 무관하게 불온한 시대에 부역하는 언어실험이거나 재현의 윤리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거나... 끊임없이 질문하고 있는가?’ 김수영을 통해 대면해야 했던 질문들이었다. 이 질문들을 놓지 않는 한 나의 한계점도 한 발 내딛게 될 것이다. 시는 두고라도 조금은 좋은 사람은 되어 갈 것이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중꺾마)을 넘어 꺾여도 그냥 하는 마음(중꺾그마)! 


  글을 마무리하는 지점에서 보니 김수영과 그를 깊이 있게 읽은 사람들의 생각에 기대어 겨우 나를 되돌아보고 동시대 시인들과 조금이나마 교감해 볼 수 있는 계기 정도는 된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시에 좀 더 깊이 스밀 수 있기에는 턱없이 역부족이라는 반성이 오롯이 남는다. 곤궁한 일상을 살아가는, 날마다 좌절하는 초짜 시인에게 그의 따뜻한 문장들은 큰 힘과 위로가 되었다는 것도 말하고 싶었는데... . 그의 시 중에서 <긍지의 날>을 소개하며 서툰 글을 마친다.      


너무나 잘 아는/순환의 원리를 위하여/나는 피로하였고/또 나는/ 피로할 것이기에/구태여 옛날을 돌아보지 않아도/ 설움과 아름다움을 대신하여 있는 나의 긍지/오늘은 필경 긍지의 날인가 보다//내가 살기 위하여/몇 개의 번개 같은 환상이 필요하다 하더라도/꿈은 교훈/청춘 물 구름/피로들이 몇 배의 아름다움을 가(加)하여 있을 때도/나의 원천과 더불어/나의 최종점은 긍지/파도처럼 요동하여/소리가 없고/비처럼 퍼부어/젖지 않는 것//그리하여/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그러할 때면은 나의 몸은 항상/한치를 더 자라는 꽃이 아니더냐/오늘은 필경 여러 가지를 합한 긍지의 날인가 보다/암만 불러도 싫지 않은 긍지의 날인가 보다/모든 설움이 합쳐지고 모든 것이 설움으로 돌아가는/긍지의 날인가 보다/이것이 나의 날/내가 자라는 날인가 보다                      




1) 일상성은 현대성의 분비(分泌)이며 현대성이란 자본주의의 배태(胚胎)다. 일상성이란 보잘 것 없으면서도 견고한 것이며 현대성이란 새로운 것, 신기한 것을 의미한다. 무의미의 집합체인 일상을 의미의 집합체인 현대성이 그 후광으로 장식해주는 것이다.  


2)박수연 논문 「세계문학, 번역, 미메시스의 시-번역자로서의 김수영」 중에서 


3)임우기 『유역문예론』에서 시론<존재와 귀신-김수영 시의 ‘거대한 뿌리’> 중에서

   *전통적 귀신론과 수운의 ‘원시동학’의 재해석을 통하여 김수영의 시의 현실의식 심층에 작동하는 무의식적 ‘존재’(존재의 언어)와 ‘귀신의 작용’을 해명하며, 곧잘 지적되어 온 김수영의 ‘정치적 자유의지’바탕에 드리운 ‘거대한 뿌리’로서‘존재’와 ‘귀신’의 작용과 조화를 밝히고자 하였다.

   *‘새로운 귀신론’은 물질만능의 근대자본주의 문명을 넘어서 모든 유역流域-지역주의와 쇼비니즘을 반대하고 적극 극복하여, 세계내의 저마다 생활·문화적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여러 민족과 종족, 부족이 평등하고 우애롭게 교류하는 유역-마다 공동체적 ‘혼魂’의 문화를 일구는 뜻깊은 동기가 될 수 있다.     

 

4)“문학이 어차피 한 시대를 함께 겪어 나가는 사람들의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인 삶의 어쩔 수 없는 오열이라는 점에 나는 동의 한다. 어쩌면 시인이란 막을 수 없는 그 울음이 흘러나오는, 벌어진 입이 아닐까, 내 생각으로는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의 삶이든 모든 삶은 거대한 상처이며, 그때 문학은 ‘지금, 이곳에서 내가 너와 함께’ 나누고 좌절하고 극복하였던 상처의 기록이며, 기억의 현재진행형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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