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아무

by 김지숙

나는, 나를, 아무


숲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녹슨 구조물이 솟은 듯 있었다

저 너머, 폐허가 된 도시의

마지막 송전탑일 거야

너는, 상상했다


우리는 숲을 걷고 있었다

길이 나 있지 않아

풀들이 발목을 쓸었다


너의 한 걸음 뒤에서 걸었다

돌아보며 네가 손을 내밀었다

하얗고 가느다랗고

외로운 손이었다


네가 고통을 포기하지 않는 한

굳건할 거라고

결말은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운 곳에 있고


푸른ㅡ

푸른 저녁과 푸른 하늘은

다른 푸른 물결을 타고


우리에겐 간직해야 할 약속이 있어


송전탑을 돌며


돌아보면

우리 없는 자리마다

흔들리고 있는

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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