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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복도에 앉아

by 김지숙

흰 복도에 앉아


긴 복도 양쪽으로

흰옷의 사람들이 잠깐씩 출현하고


무너지지 않으려

두툼한 허리띠를 휠체어에 묶은 늙은 영혼이

반쯤 감긴 눈을 하고 다가오고 있어


클레오,

저 표정은 밑줄을 긋고 싶은 표정이야

밑줄마다 각주를 다는 거지

ㅡ죽고 싶은 사람은 명랑하면 안 되나요? 난 명랑하고 싶어요, 그리고 늘 그리워하겠어요


"사람들은 보통 기다리는 것을 두려워해. 나는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이 기다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어."*

클레오,

흘러내린 낡은 양말 속 검고 마른 저 발목을 좀 봐

내가 발목에 집착한다고?


나를 낳고 키우고 씻기는 이상한 일이

출렁이는 물의 무덤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으니까

거기 발목을 담근 기억들이 자꾸만 자라나니까


쓰고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는

무수한 겹의 기억에 다시 각주를 달아

ㅡ누가 당신에 대해 물어요, 그 어떤 귀신보다 아름답고 씩씩한 우리들의 귀신이라고 말하면...그럼 무어라 부를까요?


곧 떨어질 과일처럼 무르익은 눈빛

휠체어는 점점 가까워지고


문득문득 생은 살아남아 폐인처럼


구름만이 긴 이야기를 들려줄 것 같아

구름은 상처투성이 이야기꾼


흰 복도 끝, 처치실 앞에서

클레오,

나는 지금

내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는 중이야


흰 붕대로 번져 나는 선홍색 뜨거운 얼룩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는 세계



*아녜스 바르다 영화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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