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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역사(들)* #21

by 김지숙

사랑의 역사(들)* #21


딸랑ㅡ종이 울리고

문을 열자 카페 한쪽 벽 커다란 액자가 보입니다

칠이 벗겨져 낡은 액자 속은 짙은 보랏빛 안개의 밤이구요, 크고 검은 범선이 파도에 갇혀 있습니다. 찢긴 돛을 펄럭이며


그는 언제부터 저기 있었지? 그가 기타를 퉁기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정처 없이 걷고 또 걷는 일이었네ㅡ아아ㅡ오오ㅡ우우

여기저기 사물들이 모서리를 삐걱거립니다


“우리가 사랑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유성우 쏟아지는 소리가 들립니까?”익명의 손님이 말합니다


“아름다운 가설은 추한 사실에 의해 목이 잘려버리지요, 오래된 냉장고의 비정기적 울림일 뿐입니다.”다른 손님입니다


또 다른 목소리도 들려요 “세상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건 없어.”


그건 아름다운 가설인가요, 추한 사실인가요?


낮은 목소리가 들려요 “여전히 뜨거운 기억은 문장을 가질 수 없어요.”,“그런데 우리가 만나기는 했었나요?”

누구입니까?

돌아보면 사람들이 멈춰 있어요

얼굴 없는 정물들, 누군가는 몸뚱이만 남아 잿빛 토르소처럼


카페는 이층이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좁은 나무 계단이 위태롭게 소리를 냅니다 종이 딸랑ㅡ울리고 문이 열리고

다시, 내가 들어서요 나에게 가서 내가 겹치고 가수가 가수에게 가서 겹치고, 손님도 사물들도 겹치며 삐걱거리며, 모서리를 잃어갑니다 목소리들이 뒤섞여요


카페,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어두운 구석으로 아카시아 짓이겨진 냄새 고입니다

점점

형태가 흐릿해질수록 표현적이지요


빈 의자 몇 개가 허공을 부유하자 창틀이 뒤틀리기 시작해요 카페의 모든 것들이 금이 가고 무너지려고 해요 창밖엔 끝없이 펼쳐진 모래언덕, 주황빛 태양 아래서 탈색되어가다

섬광처럼 펄럭ㅡ


ㅡ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정처 없이 걷고 또 걷는 일이었네ㅡ아아ㅡ오오ㅡ우우


충분합니까? 이제 그만 깨어나십시오!


아무것도 외치지 않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쓰레기통 속 찢긴


*장 뤽 고다르 『영화의 역사(들)』 제목 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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