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테아 Jan 24. 2019

내가 당신의 신도가 된다는 것

박찬욱 <박쥐> 



*


존 던의 <the canonization>에서 canonization, 즉 시성식은 가톨릭에서 성스럽게 살다 죽은 이를 일정한 절차를 통해 성인 반열에 올리는 의식이다.

이 시에서 주장하는 일정한 절차는 '사랑'이며 서로를 사랑하는 두 연인은 성인 반열에 올라 서로에게 신성한 존재가 된다. 

사랑과 종교는 서로의 비유로 사용될 때가 많다. 상대방을 신격화하여 바라보는 것이 사랑의 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의 온도, 위치, 방식은 언제나 다를 수밖에 없다.




**


죽음을 감수하면서까지 신에게 자신을 바치고 싶어 했던 신부 상현은 희생의 과정에서 뱀파이어가 된다.

그러다 우연히 태주를 만난다. 태주의 몸을 욕망하던 상현은 그녀와의 섹스 후 사랑에 빠진다. 그가 모시던 신은 태주로 대체된다.

태주의 몸에 들어간 날은 의미심장하게도 부활절이며, 더 나아가 상현은 “태주 씨를 안는 것은 무슨 물속에 들어간 것만 같다고, 그것이 죄가 아닌 것 같다”라고 표현한다.


물은 새로운 탄생을 상징한다. 특히 세례와 침례 의식에서 그러한데, 물을 머리에 붓는 세례는 신앙고백을 한 사람뿐만 아니라 예수를 모르는 유아에게도 베풀 수 있다. 하지만 완전히 물에 들어갔다 나오는 침례는 신앙고백이 있어야 받을 수 있다. 상현은 태주라는 종교에 신앙고백을 하고 그녀의 몸속에서 침례를 받는다. 태주의 신자로 부활한 것이다.


상현은 태주와의 행복을 위해 살인을 감행한다. 살인의 장소는 저수지, 물속이다. ‘저수지 속’에서 태주의 남편을 찍어 누른 채로 상현은 태주에게 얘만 죽이면 행복할 수 있는 거냐고 묻는다. 태주는 ‘물 위’에서 그에게 물을 뿌리며 ‘당연하지, 이 바보야!’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이는 불행을 예고한다. 태주는 애초에 상현과 다른 위치에 있었다. 그들이 처음 몸을 섞던 날, 상현은 태주의 가장 낮고 지저분한 부위인 발을 빨고, 태주는 상현이 늘 신에게 기도하기 위해 모아 왔던 손을 빤다.





***


우리는 신이 신도를 대하는 마음을 알 수 없다. 그는 무한히 베풀기도 하고, 벌을 내리기도 한다. 아무리 큰 시련을 내리고, 시험에 들게 해도 신도는 그것에 의문을 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귀결할 수밖에 없다. 우리 모두 누군가의 신자였던 적도, 신이었던 적도 있을 것이다. 이런 식의 구도는 사랑 안에서 생각보다 아주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이는 비극이었고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비극이다. 하지만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비극이었고 언제나 그리운 비극일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