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은 운명 앞에 영원히 빛날 수 없다. 별의 죽음을 전공한 그는 언제나 스스로를 연구하고 있던 것이었다. "음악을 들을 줄 알면 악보 따위는 필요 없어. 자네는 음악 좀 들을 줄 아나?"라는 물음에는 스스로의 특별함에 자신만만했지만, "별도 죽나요?"라는 물음 앞에선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높이 뜬 별이 되었지만, 그 자신의 말마따나 "한때는" 별이었던 아인슈타인을 만나고는, 이제는 직접 묻는다. "파멸의 연쇄작용 이야기했던 것 기억하세요?"라고. 그는 이미 자신의 몰락도 예상하고 있었다.
파멸은 곧 뒤이어 탄생할 새로운 별을 위한 연료가 된다. 원자폭탄의 힘을 바탕으로 더 큰 폭발을 일으키는 수소폭탄처럼. 오펜하이머의 몰락을 밟고 높이 떠오른 스트로스처럼. 그리고 폭탄은 폭발과 동시에 그 쓰임을 잃는다. 실험이 성공하면서 쓰임을 다한 과학자의 몰락은 그의 과를 벌하는 법정이 아니라, 그를 몰아내는 것만이 목적인 청문회에서 목격된다. 증거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아니, 잘못이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별이기 때문에 져야 한다. 별의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영화 <바빌론>에서, 무성영화 시대의 스타 잭콘래드는 유성영화의 등장 이후 웃음거리로 전락한다. 자신에게 우호적이었던 평론가의 혹평에 상심한 그가 평론가를 찾아가자, 평론가의 말은 그로 하여금 운명을 깨닫게 한다. 그가 자신의 시대가 지났음을 받아들인 뒤 그 아주 인상깊은, 그 쓸쓸한 음악이 깔리고는 벨보이에게 팁을 두둑히 준 뒤 자살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평론가는 말한다. "It's the idea that sticks."라고. 50년이 지나서 네가 죽은 뒤에 태어난 사람들이 너를 영화관에서 보고 환호할 때가 올 거라고. 그렇지만 너의 시대는 끝났다고. 스타라는 개념만 남는 것이고 계속해서 새로운 잭 콘래드가 나타날 거라고.
아인슈타인도 알고 있었다. 별이라는 자리만 남을 뿐 그 자리에 영원히 앉아있을 수 없음을. 오펜하이머로부터 상을 받을 때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상은 훗날 별이 될 자신들에게 스스로 수여하는 것"임을, 후대에 위대한 별로 기록될지 몰라도 지금은 추락해야 할 때임을.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기에, 한정된 자원을 두고 벌이는 끝없는 투쟁이기에, 동시에 인간은 타인과의 유대와 협력 없이는 살 수 없기에, 윤리적 고뇌로부터 자유로운 자는 없다. 인간들은 그 누구도 운명을 거스를 수 없음을 모르지 않으면서, 마치 스타가 나타나 세상을 밝게 비추고 역사를 바꿨다는 듯 떠받든다. 떠받들 대상은 스쳐지나갈 뿐이다. 죄책감을 덜어줄, 우리를 대신하여 고뇌하고 비난받을 스타는 스스로가 특별하다고 착각하지만 착각은 오래가지 못한다. 신발 상인은 미천하다거나, MIT 공대 출신은 비범하다는 등 자신의 천재성과 명성을 과신하며 안하무인했던 오펜하이머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성 없는 너드의 평범성을 되찾는다. 운명과 역사의 굴레에서, 인간은 제정신을 유지하며 살아가기 위해 그렇게 배우를 바꿔가며 연극을 하기로 무언의 합의를 이루어냈다.
오펜하이머여야만 할 이유는 없었다. 파멸의 연쇄작용이 누군가를 스쳐지나갔을 뿐이다.
실험이 성공한 뒤 프로젝트 구성원들에게 연설하는 시퀀스는 그것만으로도 표값과 세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시끄러운 발구름 소리, 진동하던 배경, 원폭이 터지듯 세상이 새하얗고 조용해진 장면, 눈 앞의 사람들이 희생자가 되어 스러지는 장면에서 갑작스레 터지는 소음과 오펜하이머의 어깨를 붙잡는 손까지 굉장히 긴장되고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청문회 중 진과의 불륜을 캐묻자 오펜하이머가 발가벗겨진 것으로 보이는 장면도 압권이었다. 청문위원들이 보는 앞에서 진과 사랑를 나누는 것만큼이나 그가 수치스러운 감정을 느끼고 있음을 보여주고, 뒤이어 오펜하이머 위에 앉은 진이 아내를 노려보는 장면까지.
그렇게 청문회는, 전후의 미국은, 인류는, 자신들이 직접 추앙하고 떠받들었던 오펜하이머를, 위대한 과학자를, 별을, 평범한 사람으로 추락시켰다. 아니 그보다 못하게, 청문회장에서 발가벗고 사랑을 나누는 야만적인 짐승으로 파멸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