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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uchu Pie Nov 16. 2019

에필로그

Connect the dots

이미 너무 유명한 스티브 잡스의 스탠퍼드 졸업 축사는 실로 주옥같은 말들이 많아서 여러 사람들에 의해 여러 방향으로 해석되고 전해졌습니다.  저는 그 '주옥' 중 바로 첫 번 째 주제, <Connecting the dots> (지난 단편적인 점들을 연결해 보니 하나의 테마가 보인다, 정도로 해석하면 너무 긴가)를 가장 좋아합니다.  


축사를 통해 잡스는 Reed College를 중퇴하기로 마음먹고 나니 정규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어져, 미국 서예(Calligraphy) 수업을 듣기로 한 이야기를 하죠.  과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답고 절묘한 서체에 푹 빠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훗날 매킨토시가 아름답고 다양한 서체를 보유하는 데에 큰 영감을 줬다고 합니다.  돌이켜보니.  


물론 결과론일 수 있고 그 수업을 안 들었어도 매킨토시는 여전히 아름다웠을 수 있습니다.  어차피 Ctrl + Z 할 수 없는 인생인 만큼, 다시 살아 보지 않고서는 지금의 나의 선택이 옳은지 그른지는 절대 알 수 없겠죠.


하지만 지금 나의 선택을 믿을 수는 있습니다.  나중에 어떻게든 연결이 되고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겠지, 하고.  내 지금의 선택이 옳은지 그른지는 알 수 없고, 사실 알 필요도 없습니다.

  

연설 중에 스티브 잡스는 이런 말을 합니다.

"미래를 내다보며 점들을 연결할 수는 없어.  지난날을 돌이켜보며 점들이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알게 될 뿐이야.  그러니 점이 어떻게든 미래에 연결되리라고 믿어야 해.  무언가를 믿어야 한다고.  이를테면 너의 배짱, 운명, 인생, 업보, 아니면 뭐든.  이런 생각은 단 한 번도 날 실망시킨 적이 없고, 실은 내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어."


두 번째 주제인 사랑과 상실(love and loss)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한 말이지만 이런 말도 합니다.  겨우 서른 살 즈음에 20억 달러의 가치를 가진 회사(애플)를 만들어내고 곧 그 회사로부터 해고된 이야기를 하면서 한 말입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된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었어.  사회적 성공에 대한 부담감은 새로운 시작이 가진 가뿐함으로 바뀌었어.  (다시) 모든 게 불확실한 상황이 된 거지.  그리고 덕분에 내 인생에서 가장 창의적인 시기가 시작된 거야."    


그 이후는 모두가 잘 알듯이, 그는 넥스트와 픽사를 창업하고 결혼도 합니다.  픽사는 토이스토리로 대박이 나고 넥스트를 애플이 매입하면서 잡스도 애플로 돌아오게 되죠.  애플에서 해고된 것은 당시에는 처절한 패배이자 실패였다고 생각됐지만, 지나고 보니 전혀 다른 기회를 열어준 것입니다.  해고되지 않았다면 경험하기 어려웠을.


스티브 잡스의 스탠퍼드 졸업 축사는, 제가 저질러 온 말도 안 되는 수많은 삽질과 좌절 속에 사실 희망이 있다고 위로를 건네주는 것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 좌절과 실패가 모이고 모여 저만의 이야기가 완성될 것이라고 용기를 북돋워줍니다.  그런 측면에서 스티브 잡스의 스탠퍼드 졸업 축사와 프롤로그에서 언급했던 코넌 오브라이언의 졸업 축사는 상당히 닮았습니다.  스타일이 조금 다를 뿐이죠.   


Connect the dots.


앞으로도 계속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살아내봐,라고 잡스 형님이 얘기해주는 것 같은 말입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열심히 살다 보면 지금 당장 겪는 어쩔 수 없는 좌절들이 나중에 마치 마법처럼 연결되는 신기한 광경을 목격하게 될 거야,라고 하는 거죠.  그 말을 듣고 저는 갈매기살 한 점 집어삼키고 소주를 목으로 들이켭니다.  그러면 잡스 형님이, '맛있냐, 건배는 하고 먹어야지' 그러는 겁니다.    


[오늘도 미끄러졌다]를 통해 그런 이야기들을 담아 봤습니다.  저만의 '서예 수업' 이야기와 저만의 '매킨토시' 이야기.  원하는 대학원에 모조리 떨어지면서, 미래의 현재에 충실할 수 있는 법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계속된 사업의 실패는 입까지 돌려버릴 정도로 아팠지만, 그것을 통해 좀 더 나은 아빠이자 남편으로서 성장할 기회를 가지기도 했습니다.  두려움에 대해 배우기도 했죠.  그리고 그 사업을 실패하는 아픈 과정은, 훗날 어렵게 취업하는 데에 뜻밖의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회사원으로서 낮은 평가를 받던 어두운 경험은, 무대 뒤에서 묵묵히 일하는 진정한 영웅들의 가치에 눈을 뜰 수 있게끔 해줬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베이에서 가장 크게 실망스러웠던 경험은 페이스북에서의 새로운 경험으로 저를 초대해줬습니다.


물론 결과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렇게 많은 일들이 시간이 지나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지금 당장의 좌절도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어느 정도 궁금하기까지 하죠.


사실은, 브런치 북 공모전 분량 제한 때문에 적지 못했지만, 지금은 또 다른 좌절을 겪고 있습니다.  요즘, 사실은, 제가, 약간의 우울증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설명처럼 심각한 상태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모든 자가 진단에서 일단 우울증이라고 나왔다.  어차피 자가 진단이란 게 다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원 소속 팀에서 반 강제로 나와 홀로 덩그러니 새로운 일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면 문제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반기에 보스와 의견 충돌을 겪고 잠시 여행을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버린 일이라, 개인적으로는 토사구팽 당한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새로운 일이 있으니 괜찮을 수도 있지만, 혼자 하는 일이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외롭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자리는 바뀌지 않아 원 소속 팀원들과 같이 앉아 있다 보니, 그 차이를 더욱 적나라하게 느낍니다.  예전에는 항상 저만 찾는 팀원들을 피해 다니기 일쑤였지만, 이제는 아무도 저를 찾지 않습니다.  하루에 15개가 넘던 미팅은 가끔 하나 있습니다.  하루에 100개 이상 오던 이메일은 5통 이하고, 그나마도 스팸 아니면 전체 이메일입니다.     


저는 워낙 낙관적인 사람이라, 처음엔 우울증이란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얼핏 우울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니, 아냐 내가 그럴 리가 없어, 하면서 강하게 부정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고 무작정 부인하기엔 민망해질 정도가 되니, 이제는 사람들을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혹시라도 만나게 되면 워낙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행동하기 때문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나 안으로는 더욱 많은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해야 했기 때문에 금방 지쳤습니다.  그렇게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오면 몇 배나 무거워진 어의 보따리를 집 한가득 풀어놨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 안으로 더욱 깊이 숨어 들어갔습니다.  예전에도 우울한 느낌을 받은 적은 많이 있었지만, 다른 차원의 느낌입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 우울증을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회사의 친한 동료들에게도 털어놨는데, 알고 보니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을 겪었거나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어느 날, 우울증에 도움이 될만한 프로덕트 아이디어가 생겼습니다.  그렇게 작은 팀을 모아 회사 내 해커톤(Hackathon)을 통해 프로덕트 프로토타입을 만들었습니다.  


이게 어제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어둑한 비행기 안에 앉아 있습니다.  결혼 15년 만에 처음으로 떠나보는 솔로 여행입니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며칠간 '나'와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허락해 준 아내에게 감사합니다)  


'Connect the dots'란 말을 꺼내기에 이처럼 완벽한 타이밍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저도 [오늘도 미끄러졌다]를 통해 저만의 dot들이 어떻게 연결되어왔는지 생각해 봤습니다.  또한 지금 당장 저를 실망시킨 일들과, 미래에서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실패들이 또 어떻게 연결될지 흥미진진하게 기대하는 마음도 담았습니다.  흥미진진하길 기대한다는 말은 진심입니다.  그렇게라도 말해놓고 나면 왠지 정말 흥미진진하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저는 브런치 북 제목처럼 정말로 '오늘도 미끄러졌습니다.'  그리고 이 에세이를 통해,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기대감을 다시 한번 되새겨봅니다.  그런 면에서는 상당히 이기적인 에세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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