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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uchu Pie Nov 16. 2019

실리콘 밸리 새옹지마

뭐, 그렇게 실망할 것도 기뻐할 것도 없다.

이베이에서 지긋지긋한 PM으로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팀으로 옮긴 지 약 6개월 된 2012년 겨울이었다. 이듬해 계획을 짜던 중, 나의 보스에게 상담을 요청했다.


당시 나의 보스는 프랑스 출신의 아름다운 금발 여인이었다.  나이는 40대 중반 정도.  이름은 실비아,라고 하자.  불란서 악센트가 촉촉하게 남아 있는, 절세미녀까지는 아니지만 만약 젊었더라면 반했을 것 같은, 그런 귀풍이 있으면서도 장난기 있는 여인이었다.  그리고 그 여인은 나에게 여러모로 은인이다.


이베이 초반, 다른 팀에서 낮은 레벨에 평가도 엉망으로 받으면서 적응 못하고 있을 때 앞뒤 안 보고 나를 자신의 팀으로 뽑아준 사람이기도 하고, 이후 여러모로 앞장서서 내가 하는 일을 지지해주던 나의 열렬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머리만 더 금발이지 소피 마르소를 많이 닮았다. (사진은 진짜 소피 마르소)

(Image source - gala.fr)


2013년을 앞두고 나는 좀 더 공격적으로 뭔가 도전해보고 싶었고, 고심 끝에 실비아에게 상담을 요청했다.  실비아는 안 그래도 2013년 나의 개인 목표 중에 약 20%를 '새로운 기회 물색'에 둘 생각이었다, 면서 반겼다.  그렇게 상담을 마치고 크리스마스를 보낸 후, 2013년 초 나의 포부를 실비아에게 말했다.  


나의 포부는 일본 시장 개척이었다.


Pitching을 하다

우리 팀은 해외사업팀이지만 러시아와 중남미에만 초점을 맞출 뿐,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시장은 뒷전이었다.  그중 유독 일본에서는 이베이의 규모에 비해 그 존재감이 미미했는데, 그런 만큼 오히려 기회가 많으리라 생각했다.  그 기회를 발판 삼아 이참에 아시아 시장의 선봉에 서겠다는 꿈을 꿨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불 킥 날릴 꿈이지만, 그때는 진지했다.  이 쓸데없이 진지한 꿈을 고맙게도 열심히 지원해 준 실비아는, 구체적인 아이디어 개발을 위해 나에게 6개월의 시간을 줬다.  


신바람이 난 나는 즉시 일본 시장분석을 마치고 그에 맞춰 상반기 일본 특화 마케팅 계획을 짰으며, 페이팔 Japan 및 소프트뱅크, 야후 Japan 등 여러 업체와 컨택해 협력 동의를 얻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우리 팀과 다른 팀 파트너들에게 돌려가며 여러 번 피칭했다.  총 약 20번 정도는 한 것 같다.  일부러 사람들을 여러 그룹으로 나누어 조그만 미팅을 자주 가졌다.  미팅의 규모가 작아 좀 더 친밀한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나의 피칭에 대한 동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더 쉬워졌다.  그렇게 업데이트된 내용으로 조금씩 그룹을 키워나가 결국 부사장에게까지 올라가 피칭을 하게 되었다.


이 모든 것에 단 2개월이 걸렸다.

당시 일본 시장 진출 제안서 표지


부사장을 포함해 우리 팀과 연관된 사람들은 거의 모든 내용을 이미 알고 있을 정도였기 때문에 피칭은 어렵지 않았다.  마음속에 내려져 있는 결정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수준의 자리였다.  그렇게 결국 일본 진출을 위한 2십만 불의 초기 마케팅 예산을 받아냈다.  페이팔 Japan 등 그동안 연락했던 모든 팀이 만세를 외쳤고, 받은 예산은 6월에 다 소진하기로 Yahoo Japan 등의 협력업체와 협의를 끝냈다.  나는 자신이 있었고, 무엇보다 나만의 시장을 개척한다는 점이 두근거렸다.  이베이에서 일하면서 가장 신났던 시기이다.


그렇게 완벽하게 준비를 마쳤을 때쯤—어김없이—일이 터졌다.


러시아발 폭탄이 터지다.

팀의 제1 우선순위인 러시아 시장이 환율 폭탄에 맞은 것이다.  이런 해외 사업의 가장 큰 불안 요소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당시 환율 1% 변동이 매출에 1.5% 정도의 영향을 미친 것으로 기억난다.  연초 대비 환율이 10% 가까이 올라간 시점이었으니, 매출로 치면 15%가 하루아침 새 증발한 셈이다.  난리가 날만 하다.  그렇게 러시아 시장에 불이 나면서 부사장이 일본 시장에 배정됐던 2십만 불을 그대로 빼앗아 갔다.  부사장에게는 단 한 마디도 직접 들은 바 없었다.  다만 마케팅 개시 단 일주일을 남기고 예산을 빼앗겼을 뿐이다.  망연자실할 시간도 없었다.  모든 것을 현지에서 준비하고 있던 페이팔 Japan의 Head에게 급하게 연락을 남겼고, 실비아에게도 부탁해서 양해의 전화 통화를 부탁했다.


목소리로도 그렇게 굽신 할 수 있다는 것을 참으로 오랜만에 느꼈다.


그 후 러시아에서 열린 패션쇼. 우리 팀은 러시아에(만) 목숨 걸었었고, 난 그게 못마땅했었다.


결국 일본 시장은 그렇게 날아갔고, 나의 일도 날아갔다.  무엇보다도 아시아 시장의 선봉에 서겠다는 쓸데없이 진지하지만 당찬 꿈이 날아갔다는 점이 아팠다.  사무실 안에서도 이미 많이 알려지게 된 일이라, 위로도 많이 받았다.


새옹지마

이렇게 김샌 이야기가 새옹지마인 이유는, 불과 1년 만에 내가 페이스북으로부터 연락을 받게 된 이유가 이 좌절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이 틀어지고 나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링크드인(LinkedIn.com: 비즈니스와 구직, 네트워크에 최적화된 SNS)에 바로 이 일본 시장 개척을 위한 노력에 대해 한 줄 쓰는 이었다.  과거형으로 안 쓰고 현재형으로 쓴 것은 내 나름의 반항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페이스북 리쿠르터로부터 연락을 받았을 때 이 한 줄로 인해 나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말을 들었다.  페이스북 일본팀 PM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년 후 난 페이스북으로 옮겨와 일하게 되었고, 러시아에 집중하던 이베이의 그 팀은 내가 퇴사 한 이듬해 30% 이상이 구조 조정되어 풍비박산이 났다.  물론 페이스북으로 옮겨온 것이 무조건 잘 된 일이라 하기 어렵고, 구조 조정되는 일 자체가 나쁜 것이라고만 하기도 어렵다.  더군다나 지금의 모습과 처지도 언젠가, 심지어 1년 후, 바로 뒤바뀔 수 있다.  그리고 그 뒤바뀐 모습 역시 누가 옳고 누가 나쁘다고 하랴.


결국엔 다 새옹지마.  즐거울 때 자중해 앞날을 준비하고, 힘들 때 결국 그 힘든 일이 좋은 무엇인가를 잉태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뿐이다.  정말 모든 것들이 빠르게 돌아가는 요즘 세상이야말로, 새옹지마란 말이 이렇게 날마다 피부로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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