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huchu Pie Nov 16. 2019

프로덕트 환경 미화원

보이지 않는 영웅들을 진심으로 고마워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베이에서의 어두운 초창기 시절은 짧지만 길었다.  직급도 낮았고 PM의 역할도 생각보다 한정되어 있었으며, 자기 PR도 잘 못해 화려한 프로덕트를 맡지 못했다.  언제나 다른 PM이 진행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다 받고 난 겉만 번지르르한 프로덕트를 맡아 무대 뒤에서 열심히 갈고닦았다.  나는 어둠 속에서 묵묵히 일하는 프로덕트 청소부였다.  그리고 '결정적인' 프로덕트가 없다는 이유로 업무 평가를 평균 이하로 받았다.  5점 만점에 항상 2점이었다.  하루가 한 달처럼 느껴졌다. 


열심히 청소해주는 건 고마운데 결국엔 쫓아낼 거야,라고 업무 평가서가 그 음흉하고 잔인한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 것 같았다.  소름 끼쳤지만 무기력했다.  남들이 출시 한 프로덕트 따위 그냥 내버려 둬서 망하게 둘 걸, 하고 뒤늦은 후회를 하기도 했다.  착하고 열심히 하지만 그리 유능하지는 않은 PM으로 이미지가 굳어가는 것 같아 화가 났다.


뒤도 안 돌아보고

다른 팀으로 옮겨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쉽지 않았다.  2점짜리 낮은 업무 평가가 발목을 잡았다.  다른 팀과 이야기가 잘 진행된다 싶다가도 업무 평가를 공개하면 막판에 틀어지곤 했다.  


그렇게 헤매던 중 유독 말이 잘 통한다는 느낌이 든 한 매니저와 만나 팀을 옮기게 되었을 땐 뒤도 안 돌아보고 나왔다.  1년 여만에 드디어 지긋지긋한 PM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토록 부러워했던 파워 홀더, BU(Business Unit)가 될 수 있어 기뻤다.  아부에 능한 털북숭이 아저씨를 더 이상 보지 않게 되어 너무 행복했고, 무엇보다도 새로운 매니저가 나를 진급시키면서 데려간 덕분에 더 큰 일을 맡게 된 것이 기뻤다.  영주권 역시 원래대로 EB-2로 진행해 3-4년 더 빨리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팀에 가자마자 화려한 일에만 몰두한 것은 물론이다.  낮은 직급의 PM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대 뒤'로 갈 필요도 없었다.  아드레날린이 샘솟는 화려하고 신나는 일들만 가득했다.


그렇게 2년 여가 지나고 페이스북(Facebook) 리쿠르터에게서 온 전화를 끊어버린 건, 그 역할이 PM이었기 때문이다.  리쿠르터가—그런 일에는 익숙했는지—다시 차분히 그 차이에 대해 설명해주지 않았다면 인터뷰도 보지 않았을 것이다.  


Fix of the week

이런저런 과정을 통해 결국 페이스북에 PM으로 입사하고 나서도 사실 확신이 없었다.  그나마 이베이의 BU와 비슷한 역할인 것처럼 보인 Product Marketing Manager로 바로 역할을 바꿔 버릴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PM으로서 또 아베이에서처럼 프로덕트 청소나 하게 될까 봐 걱정했다.  


그러던 와중 처음으로 참석했던 마크 저커버그의 Q&A에서 소름이 돋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일주일에 한 번 전 직원을 대상으로 Q&A 시간을 가진다.  지금은 회사가 많이 커져 장소를 옮겼지만 당시의 분위기는 이 사진과 가장 비슷했다.

(Image Source - Facebook)


일주일에 한 번 전 직원을 대상으로 하는 Q&A는 회사의 비전부터 직원 평가 시스템의 맹점, 혹은 월드컵을 회사 TV에서 틀어줄 것인지에 이르는 다양한 질문이 쏟아진다.  당시 전 세계에 퍼져있는 직원 다 모아도 약 4천 명 수준이었기 때문에, 꽤 비형식적이면서도 심도 있는 이야기가 많이 오갔고 직원들의 관심 또한 뜨거웠다.  


처음 시작은 보통 Fix of the week이라는 세션으로 시작하는데, 버그를 해결하거나 누구도 거들떠 안 보던 프로덕트의 문제점을 발견해 고친 사람들이 나와 전 직원 앞에서 약 5분 간 발표를 하는 자리이다.  보통 엔지니어나 PM이 나와서 발표하는 자리인데, 내가 처음 참석한 그 날따라 저커버그가 엔지니어에게 마이크를 건네주기 전에 한 마디 덧붙였다.


오늘은 새로운 직원분들이 많이 왔기 때문에 왜 이런 세션 (Fix of the week)으로 매주 Q&A을 시작하는지 먼저 설명하고 싶습니다.  회사가 급성장할 때는 보통 새로운 프로덕트를 만들고 출시하는 데에만 열중하게 됩니다.  Techcrunch와 같은 미디어에서도 예의 주시하고 있으니 더더욱 그런 유혹에 빠져들게 되죠.  

하지만 우리는 정말 훌륭한 프로덕트는 그것을 출시했을 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갈고닦아 만들어진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미디어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기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일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필요한 프로덕트와 서비스는 절대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작은 버그를 고치고 프로덕트 구석구석을 다시 다듬고 고치는 이 오랜 기간 동안의 단내 나는 작업을 통해 비로소 완성됩니다.  

그 결코 화려하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일을 '무대 뒤'에서 묵묵히 해내는 진정한 영웅들을 조명하기 위한 자리.  그 드러나지 않은 진정한 가치를 우리 스스로에게 상기시키기 위한 자리.  그것이 바로 Fix of the week의 의미입니다.   


소름이 돋았다.  


회사의 사장이 나서서 무대 뒤 청소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다니.  음흉하고 잔인했던 그 이베이 업무 평가서를 소환해다가 '들었냐, 들었냐고!'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아부에 능한 털북숭이 아저씨 매니저를 데려다가 자 이제 다시 한번 나를 평가해 보시던가,라고 되묻고 싶었다.  죽어라 마셔댔던 포도색 깡쏘주와 함께했던 수많은 날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저커버그 형이 앞장서서, '누구야, 걸리면 다 혼날 줄 알아'라고 소리쳐주는 것 같았다.  바로 옆에 서 있지 않아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꼭 껴안아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프로덕트 환경미화원

이베이에서의 2점짜리 경험은 그 '무대 뒤'의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의 고충이 무엇인지 나에게 가르쳐주기 위해 쓴 신의 시나리오였으리라.  돌이켜보면 이베이 입사 전까지 나는 주로 사업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무대 위 화려한 일에만 몰두하고 그 외의 것들은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었다.  


청소는 하찮게 보이지만 중요해,라고 아무리 얘기해봤자 귓등으로 들었을 나를 정확히 파악한 청소의 신이 나를 아예 더러운 무대 뒤로 보내버린 것이다.  거기서 나는 끝도 없이 쏟아지는 프로덕트 찌꺼기를 직접 치우고 고쳐 본 것이다.  그 정신없는 일들을 처리하고 난 후, 주인공들에 의해 다시 무대 위로 올려진 프로덕트를 커튼 뒤에서 바라보며 씁쓸한 마음을 달래 본 것이다.  주인공들이 박수갈채를 받을 동안 조용히 무대 뒤 쪽문으로 퇴장해 본 것이다.  


당장은 쥐꼬리만 한 수고비 외에 아무것도 얻을 것 없는 삽질이라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서 한 번은 겪었어야 할 중요한 경험이었다.  무대의 화려함만에 취해,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프로덕트를 갈고닦는 프로덕트 환경미화원의 소중함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건방지게 청소부라 부르며 투명 인간 취급했을 것이다.  잠자고 있던 새로운 시각이 저커버그의 한 마디로 인해 깨어났다.     


그렇게 '무대 뒤 작은 일'의 중요함을 겪었기 때문에 그런 영웅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일이 실제 가치에 비해 얼마나 소외되는지 포도색 깡쏘주를 퍼마시며 절실히 느꼈기 때문에, 그 영웅들을 진심으로 고마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어렴풋이 동감할 수 있게 되었고, 동감한다는 나의 말이 그들에게 사탕발림이 아닐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또 중요한 무대 뒤 일들을 함께 조금이나마 더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조그만 구멍가게를 운영한다고 맹목적으로 까불던 시절에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사고의 한 부분이 조금이나마 메워졌다.     


이베이 초창기 1년을 삽질이라 생각하며 살았지만, 진정한 삽질이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베이에서의 삽질이 없었다면 그런 일의 중요함도, 영웅들의 존재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고마워할 줄 몰랐을 것이다.  저커버그의 한 마디에, 왜 저런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을까,라고 잘난 체하고 앉아 있었을 것이다.  내가 상상해봐도 정말 재수 없는 놈이 되어있었을 것 같다.


그래서 열심히 한다면, 진정한 삽질이란 없다.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되어 돌아올 일들이다.  다만 지금 당장은 그 가치를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프로덕트 환경미화원이었어서 다행이었다.

이전 09화 프로덕트 청소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