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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uchu Pie Nov 16. 2019

프로덕트 청소부

아이큐로 치면 돌고래와 맞먹는 수준의 프로페셔널 청소부.

MBA를 졸업하고 나는 인턴쉽을 했던 그 전자상거래업체에 정직원으로서 정착하게 된다.  그 업체는 이베이(eBay), 실리콘 밸리에서의 나의 첫 직장이다.  프로덕트 매니저(PM: Product Manager)로 취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레벨이 아주 낮았다.  당시 약 10년 정도의 경력이 있었지만, 대학 졸업 2년 차와 사내 직급이 같았다.


나의 주 업무는 회사 내 조직 중에 하나인 BU(Business Unit: 시장 조사 및 전략 수립, 그리고 대형 판매자 발굴 및 관리 등의 비즈니스를 주 업무로 하는 팀이다.)이 원하는 프로덕트를 엔지니어들이 잘 만들 수 있도록 하는 조율자에 가까웠다.  굳이 비유하자면 BU와 엔지니어 사이를 잇는 '다리'와 같았다.  BU가 전략에 바탕을 둔 아이디어를 내면, 엔지니어와 함께 붙어서 그 프로덕트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엔지니어 측에서 문제점을 발견하면 BU에게 달려가 프로덕트의 기능을 조정해 주세요, 하고 굽신거리기도 한다—이베이의 모든 PM이 그런 건 아니다.  팀마다 직급마다, 무엇보다도 개인의 능력에 따라 많이 달랐다.


굵직한 일이 없어 우울한 날들

'다리'가 된다는 것 자체가 그렇게 나쁜 건 아니었지만,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수준의 낮은 직급이라는 사실과 여러 가지 겹쳐져, 굵직한 일을 할 기회가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주로 이베이 내 단기 홍보 페이지를 관리하거나 배너를 만들고, 남이 관리하는 프로덕트의 버그(Bug: 코딩 또는 디자인에 작은 문제가 있어 웹사이트 어떤 기능 등이 의도한 바 대로 돌아가지 않는 등의 작은 문제들.  소프트웨어 프로덕트에서는 흔한 일이다.)를 고치는 일 등을 했다.  


일들이 너무 단순해서 오후 두 시면 일이 끝났고, 그러고 나면 우울 게이지가 상승해서 집으로 돌아와 매일 와인 한 병씩 비웠다.  와인, 하면 멋있을 것 같지만 약 삼천 원짜리 싸구려 와인을 마셨다—실리콘 밸리에는 소주보다 오히려 더 저렴한 와인이 많다.  마시는 사람 입장에선 포도색 깡쏘주라고 하면 느낌이 비슷하려나.


그때 늦은 밤 혼자 술 마시며 즐겨 시청하던 해피투게더의 유재석 씨가 나의 술친구였고, 박미선 씨가 나의 누나였다.  다른 방송에서 유세윤 씨나 이수근 씨가 눈시울이라도 붉히면 나도 훌쩍댔다.  그런 식이었다.  딱히 슬픈 일은 없는데 틈만 나면 멜로드라마 여주인공처럼 울어댔다.  힘든 걸로 치면 예전에 사업할 때가 백 배는 더 힘들었는데, 그때도 울진 않았는데, 이상했다.  눈물샘이 성감대보다 더 민감하던 시절이었다.  심지어 심수봉 씨의 히트곡 '백만 송이 장미'를 듣고 운 적도 있다.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에서 터졌다.


나에겐 사실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PM이라는 타이틀은 같았지만 인턴쉽 때의 경험과 너무 달랐다.  패션 팀이었냐, 전자제품 팀이었냐의 문제일 수도 있다.  회사에서 인정받는 아리따운 금발 미녀가 보스였냐, 아부에 능한 털북숭이 아저씨가 보스였냐의 차이일 수도 있다.  막상 쓰고 보니 이게 바로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  


주변의 PM들은 아부에 능한 털북숭이 아저씨 매니저와 쿵짝이 잘 맞아서 굵직한 프로덕트를 잘도 맡아 진행했는데, 나에겐 그런 기회가 오지 않았다.  팀의 다른 PM들은 어떤 프로덕트를 출시하면 Techcrunch 등의 뉴스에도 나오고 했는데, 그게 너무 부러웠다.  나도 아부에 능한 털북숭이 아저씨 매니저에게 큰 프로덕트를 맡고 싶은 나의 마음을 은연중에 내비치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그렇게 솜씨 있게 정치하고 자기 밥그릇 챙기는 데에 확실히 약했다.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해서,라고 은근슬쩍 책임을 회피하고 싶지만, 한국에도 적극적이고 자기 PR을 잘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없다.  그냥 내가 적응을 못했다.  나의 큰 약점이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얌전하고 무조건 열심히 하기만 하는 누렁이 소 같았을 것이다.  그런 모습은 동양인인 데다 영어도 잘 못하고 직급까지 낮은 나에겐 치명적이었다.


우선 나에게 오는 일들은 떨거지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주목받는 프로덕트 출시(Launch)는 남들이 다 하고, 일단 출시가 끝난 프로덕트는 나에게 떨어졌다.  출시된 프로덕트는 MVP(Minimum Viable Product: 프로덕트가 돌아가기 위한 최소 기능만을 탑재한 아주 초기 상태)의 형태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급조된 티가 많이 났다.  크고 작은 버그도 많고 확장성도 낮아 뜯어고쳐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게 소위 잘 나가는 PM들이 BU 님들과 손 붙잡고 쿵짝쿵짝해서 엄청 멋진 프로덕트를 런치 해 우선 온갖 조명을 다 받는다.  그리고 화려한 조명이 꺼지고 커튼이 내려가면, 자 나머지는 알아서 해, 하고 나에게 툭 던져지는 것이다.  그렇게 '두 손 위에 던져진' MVP 프로덕트를 보고 있으면 한숨이 나올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출시하자마자 없애야 하는 프로덕트도 있었다.  그렇게 이미 화려한 무대 위에서 소비된 프로덕트를 맡아 무대 뒤에서 처리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었다.  한마디로 프로덕트 청소부였다.


이베이 사원증이 쓰레기통에 빠진 것을 깨닫고, 청소 도와주시는 분과 함께 쓰레기통을 뒤지던 모습.  사진은 지나가던 팀원 중에 하나가 낄낄거리며 찍었다.


결국 발목을 잡히다

그리고 그렇게 주목받지 못한 일을 하다 보니—물론 다른 이유도 많았겠지만—업무 능력 평가에서 항상 뒤처졌다.  첫 하반기 평가를 5점 만점에 2점을 받았고, 그다음 해 상반기 첫 평가도 결국 '간신히' 2점을 받았다.  왜 이렇게 낮은지 아부에 능한 털북숭이 아저씨 매니저에게 물어보면 대답은 항상 같았다.  너는 열심히 하고 다 좋은데 결정적인 프로덕트가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럼 나도 그런 결정적인 프로덕트를 맡고 싶다, 고 얘기해도 응응 생각해볼게, 라는 말로 대충 마무리됐다.  그리고 결과는 같았다.  화려하고 섹시한 프로덕트는 남들이 가져가고 무대에서 관중에게 보인다.  그 프로덕트들은, 무대의 커튼이 내려가고 나서야 카트에 대충 쑤셔 박힌 채로 나에게로 오는 일이 반복됐다.    


일도 일이지만 5점에 2점은 솔직히 많이 실망스러웠다.  엉망인 프로덕트를 잘 닦고 다듬어서 꽤 쓸만하게 만들었으니 성과를 인정해주겠지, 란 생각은 손만 잡고 잘게, 란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보다 순진한 생각이었다.  2점은 아주 낮은 평가였다.  대부분의 직원은 3점을 받고 2점은 극히 소수의 직원이 받는 걸로 알려져 있었다.  2점을 여러 번 받으면 자기가 알아서 퇴사하거나 특별 관리 대상이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뭔가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도태될 직원이 받는 점수였다.  1에서 5점의 분포가 Bell 곡선과 비슷하다고 하고 이베이 직원이 30,000명쯤 된다고 한다면 약 28,000등쯤 한 거다.  


아이큐로 따지면 간신히 돌고래와 맞먹은 수준이다.  그런데 돌고래는 수영이라도 잘하지.

(Source Image - Average Married Dad)


한국에서는 아무리 사업을 말아먹었어도 그건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니까,라고 자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건 빼도 박도 못한 열성인자 낙인이었다.  이렇게 적나라한 낙인은 스탠퍼드에서의 담판 이후 오랜만이었다.  이것이 진정한 나의 능력의 현주소인가, 아니면 내가 큰 회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가, 아니면 아부에 능한 털북숭이 아저씨가 나를 미워하나 등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유재석 씨와 박미선 누나를 더 애타게 찾았고 와인은 하루 720ml 한 병이 부족해 1.5 리터짜리를 사 먹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영주권 신청도 가장 오래 걸리는 EB-3(약 5 - 6년 걸린다)로 진행해야 한다는 말을 회사로부터 듣게 되었다.  MBA를 졸업하면 석사의 자격으로 EB-2(약 1년 반에서 2년 정도 걸린다)로 신청할 수 있었지만, 나 같은 경우는 회사 내 직급이 너무 낮아서 불가능하다는 통보였다.  나 같은 경우는.  이런 뭐 같은 경우가.


아 몰라 때려치워

이 당시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되뇌었던 말이다.  이렇게 되니 영주권이고 뭐고 다 그만두고 미국에서 돼지고기 사업이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그게 마음 편하지.  한국에서 하던 브랜드와 사업 모델 그대로 가져와 진행하면 본전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시장 조사도 하고 사업 계획도 준비하고 각종 이민 관련 콘퍼런스도 돌아다니며 사업가로서의 이민자 신분을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지도 공부했다.


물론 동시에 팀을 옮기려는 노력도 간헐적으로 했다.  나를 딱히 이뻐하지 않는 아부에 능한 털북숭이 아저씨 매니저도 보기 싫었지만, 무엇보다 PM으로서의 역할이 마음에 안 들었다.  PM 따위 더러워서 때려치우고 나도 BU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누가 5점 만점에 2점으로 이미 헤매고 있고 매니저로부터 사랑받지 못하며 대학 졸업 2년 차인데 액면은 아저씨인 열성인자 PM을 데려가려고 하겠는가.


그렇게 희망도 없이 시간이 흘렀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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