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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uchu Pie Nov 16. 2019

특별함을 잉태한 실패

고마워요, 동대문 시장

완전한 실패처럼 느껴지는 일이 훗날 나만의 특별함이 되어 돌아오는 일이 있다.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있다면, 지금 당장의 실패를 바라보는 눈이 바뀔 수 있다.

오히려 그 실패가 또 어떤 나만의 특별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갈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했던 첫 면접은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라 겨우 시작이었을 줄은 당시의 나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 후로도 몇몇 업체로부터 면접 초대를 받았지만, 번번이 낙방을 거듭했다.  계속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초조함도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지원하게 되는 회사의 범위는 점점 더 늘어났고 나중에는 메인 주(Maine) 어딘가 시골에 있는 젖소 실험실에도 지원했다.  그냥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복사해서 붙이는 수준이 아니었다.  지원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으면 철저한 조사에 들어가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최적화 해 지원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재미있는 현상이 발생한다.  지원을 마음먹을 당시만 해도 여러 회사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뒷조사를 거듭할수록 그 회사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다가 면접으로의 초대장이라도 받으면, 이미 나는 그 회사에 모든 걸 바쳐 충성할 각오 따위가 진심으로 생기는 것이다.  별생각 없이 지원했던 젖소 실험실도 마찬가지였다.  최종 면접까지 가게 됐을 때 이미 난 젖소와 평생을 함께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첫 면접에서 유일한 질문이었던 "walk me through your resume"에 대한 대답은 반복에 반복을 거듭해 언제나 딱 2분 3초에 끝낼 정도로 연습했다.  아마 한밤 중에 자다가 벌떡 일어나 읊어도 그랬을 것이다.  중간에 한 박자 쉬는 부분과 음, 하고 생각하는 척하는 부분까지 다 합해 2분 2초도 아니고 4초도 아니고 딱! 2분 3초였다.


그러나 겨울 깊어갈수록 쌓이는 건 하얀 눈과 낙방 통지서, 그리고 한숨뿐이었다.  약 200개 정도의 회사에 지원했고 약 80번의 면접을 했으며 모두 떨어졌다.  독일의 한 게임 업체로부터 오퍼(Offer: 최종 합격 통지서.  회사가 지원자에게 연봉 등을 제안하는 형식이다)를 받았지만, 비행기표는 고사하고 월급도 없는 사실상의 공수표였다.  젖소 실험실도 최종 면접에서 떨어졌다.  나와 또 다른 한 명이 남았었는데 그 친구가 오퍼를 받았다—이 친구가 그 소중한 오퍼를 발로 걷어찬 걸 안 건 그로부터 몇 개월 지난 후였다.  


마지막 기회

애간장을 태울수록 시간은 야속하게도 숭덩숭덩 흘러갔다.  별로 한 일도 없는 것 같은데 정신을 차려보면 사나흘은 훌쩍 지나가 있는 경우가 늘어났다.  아직도 인턴쉽 오퍼가 없는 나와 같은 학생은 캠퍼스에서 점점 더 찾기 어려운 희귀종이 되어갔고, 졸지에 희귀종이 되어버린 입장에서는 캠퍼스에 나가는 것 자체가 더욱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남들이 나를 점점 더 어려워하게 되었고, 내가 함께 있을 때는 인턴쉽 오퍼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 등 대화의 주제도 바뀌었다.  


사람들의 무심함도, 친절한 배려도, 모 상처가 되어 돌아왔다.  남들은 아무것도 안 하는데, 나 혼자 칼을 들고 이리저리 내 마음에 상처를 내는 격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마지막이라 생각된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The Day In The Bay라는 리쿠르팅 행사였다.  서부가 너무 먼 동부의 MBA 학생들을 샌프란시스코 근처의 호텔에 모아놓고 한꺼번에 면접을 보는 행사다.  나는 운 좋게 한 글로벌 게임업체와 전자상거래 업체로부터 면접 초청을 받았다.  이번이 인턴쉽을 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를 떠나 후회를 남길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 대한 사전 조사 및 공부는 물론이고, 두 회사를 조금이라도 경험한 사람들을 찾아 인터뷰도 했다.  서부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두 회사에 대한 조사 내용을 A4 용지 50장에 양면으로 출력해 비행 내내 외우고 또 외웠다.


첫 면접은 글로벌 게임 업체였다.  소파에 반쯤 누운 것처럼 앉은 이 백인 남자는 나에게는 눈길 한 번 안 준 채 이력서만 따분하다는 듯이 응시하고 있었다.  잘은 모르지만, 저녁에 뭐 먹을지 고민하고 있거나 어제 여자 친구에게 차이던 순간을 떠올리는 듯한 표정이었다.  크게 의미 없는 질문과 대답이 몇 번 오가고 이내 침묵이 이어졌다.  식품 가공 업체와 했던 첫 면접의 악몽이 떠올랐다.  그러다가 한 부분에서 눈빛을 반짝이더니, 비로소 나를 쳐다보며 물어본다.


"오, 태권도를 가르쳤네요?  발차기 한 번 보여줄 수 있어요?"    


아니, 이게 인턴으로서의 나의 업무수행 능력에 무슨 상관이란 말이가.  만반의 면접 준비를 했거늘, 나에게는 마지막 기회이었거늘!  왜 이런 얼토당토않은 면접관이 다시 한번 꼬이게 내버려 뒀냐고요, 하고 하늘을 원망했다.  원한다면 아예 4D로 볼 수 있게 해 주마, 하고 면전에 옆차기를 꽂아 넣는 상상을 했다.


후회됐지만 후련했다

샌프란시스코까지 날아와 본 첫 면접을 그렇게 허무하게 끝내고 담배를 한 대 태우러 호텔 밖으로 나갔다.  깨끗한 공기, 갓 겨울을 낫다기 보기 어려운 캘리포니아 특유의 따가운 햇살, 그리고 긴장감에 축축해진 겨드랑이의 땀이 스탠퍼드 대학교 박사과정에 입학하기 위해 을 시도했다가 처참하게 무너졌던 예전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런 탓인지 두 번째 전자상거래 업체 면접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반 포기 상태였다.  '마지막 기회'였지만, 너덜 해진 나의 가슴은 '기회'라는 희망보다는 '마지막'이라는 잔인한 단어에 이미 점령당한 상태였다.


"재밌네요.  좀 더 자세히 얘기해주겠어요?"


예전에 동대문 시장을 누비며 옷을 팔았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면접관이 눈을 반짝였다.  의외였다.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80번의 면접을 통틀어 그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동대문 시장 이야기에 대해 이 면접관은 유난히 궁금해했다.  의례적으로 던지는 관심의 표현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관심이 있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알 턱이 없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면접관을 다시 한번 쳐다봤다.  의심의 눈초리로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봤을지도 모른다.  낙방의 경험이 쌓여 거대해진 의심의 무게에 눈꺼풀이 짓눌렸기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어차피 마지막인 걸.  그녀의 관심이 진심이든 아니든 크게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상대방의 관심이란 것은 사랑과 비슷해서 내 의도대로 되지 않는 것.  생각이 이쯤 발전하니, 갑자기 하고 싶은 말이 많아졌다.  털어놓고 싶어 졌다.  그렇게 행거 조립 대회부터 시작해 입이 거칠었던 대기업 A의 담당자에 대한 험담, 구안괘사와 일장춘몽까지 버벅 거리며 신나게 떠들었다.  그녀는 때로는 두 눈을 크게 뜨며 때로는 박수까지 치며 나의 이야기에 빠져 들어줬다.  


두서없는 긴 얘기, 남에 대한 험담, 개인적인 일까지.  전통적인 면접 뽀개기 등에 의하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들만 늘어놨다.  후회됐다.  하지만 후련했다.


마지막 인터뷰는 피폐해진 나의 마음을 보듬어 주기 위한 신의 배려였을까.


그럴지도.  만약 그렇다면 반만 맞았다.  놀랍게도 약 한 달 후 이 전자상거래 업체로부터 인턴쉽 최종 오퍼를 받았기 때문이다.


희망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얼떨떨했지만 두 배 이상 기뻤다.  그리고 금세 불안해졌다.  입사를 위한 각종 서류가 들어 있는 봉투를 보며, 전산 착오가 아니기를 간절히 바랬다.  내 이름이 맞나 몇 번이고 확인했다.  200번의 거절 끝에 받은 첫 오퍼는 그만큼 비현실적이었다.


특별함을 잉태한 실패

나를 뽑아준 건 이베이(eBay) 패션팀이었고 12주 간 이베이 패션 제품의 classification strategy(분류 전략)가 담당 업무였다.  이베이 페이지 내에서 제품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상품 분류 전략을 다시 세우는 일이었다.  예를 들어 청바지라는 의류 카테고리 내에서 여성/남성 청바지로 나눌지, 아니면 여성/남성 의류를 먼저 나누고 그 안에 각각 청바지라는 카테고리를 둘지 등등을 제안하는 일이다.  


그리고 (훗날 듣게 된 일이지만) 회사 입장에서는, 우왕좌왕했지만 시장에서 발품을 팔았던 나의 현장 경험을 높이 샀다고 했다.  입이 돌아가는 사단이 벌어지고 결국 사업을 접게 되는 원인을 제공했던 동대문 시장에서의 경험이, 4년이 지나 실리콘 밸리에 정착하기 위한 첫 단추를 꿰는 열쇠가 되어 돌아왔다.


완전한 실패라고 생각했던 일이, 다른 지원자들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나만의 특별함이 되는 순간이었다.


완전한 실패처럼 느껴지는 일이 이렇게 훗날 나만의 특별함이 되어 돌아오는 일이 있다.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있다면, 지금 당장의 실패를 바라보는 눈이 바뀔 수 있다.

오히려 그 실패가 또 어떤 나만의 특별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갈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오늘도 실패했는가.  

또 하나의 재미있는 인생 에피소드가 막 시작할 참이다.


팝콘을 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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