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사업을 접고 두려움을 배웠다. 그리고 좀 더 나은 아빠이자 남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취업을 위해 이력서를 뿌렸지만, 중구난방의 이력을 받아줄 회사는 없었다. 국내뿐 아니라 미국의 실리콘밸리에 있는 회사에도 이력서를 뿌렸지만 역시 묵묵부답이었다. 그래도 간혹 엽서로 불합격 통지를 줬는데, 테크놀로지의 메카에서 엽서라니, 아이러니했다. 당시에 만났던 한 HR 상담사는 내 커리어가 회복 불가능이라고 사형선고까지 내렸다. 결국, 죽은 나의 커리어에 심폐소생술을 시행하는 심정으로 MBA(경영대학원)에 지원했다. 그러나 이것도 모두 떨어지고 만다. 낙방의 향연이 시작되었다.
그러던 와중 우연한 기회가 생겨 다시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온라인으로 돼지고기를 판매하는 사업이었고, 이 전의 두 사업보다는 잘 돼 빚을 갚는 수준에서 약 1년 반 만에 매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MBA에도 다시 도전해 다트머스 대학교(Dartmouth College)에 합격하게 되었다.
하지만 정작 가겠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는 걱정이 많았다. 실리콘밸리의 IT 기업에 취직하는 것이 목적인 사람이, 그런 미국 동부 뉴햄프셔 깊숙한 시골에 묻혀 있는 학교에 가서는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의 다트머스 MBA에는 졸업 후 뉴욕 월스트리트의 투자 은행이나 경영컨설팅 회사를 목표로 하는 학생이 가장 많았다. 지원 당시였던 2008년도 졸업생들이 취직한 산업군을 보면 컨설팅이 37%, 재무/회계가 35%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IT는 자그마치 0%(Source: Forbes)였으니 근거 없는 걱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결국 다트머스 MBA에 가게 된다. 개인적으로 도시보다는 시골을 좋아해서이기도 하다, 는 건 공식적인 이유일 뿐. 사실은 서쪽 실리콘 밸리 근처 학교는 어차피 다 떨어졌기 때문이다. (약 10년 전 버클리에서의 딜이 드디어 운명이 되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결국 이번 인생에서는 버클리 대학을 놓아주기로 했다.) 그래도 많이 기뻤다. 죽은 커리어를 되살릴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낙방 끝, 그리고, 낙방 다시 시작. 응?
미국 MBA는 보통 8월 중순에서 9월 초순 사이에 첫 학기가 시작하고, 그와 거의 동시에 이듬해 여름 인턴쉽 구직 활동도 시작된다. 보통 여름 인턴쉽이 끝나고 그대로 정규직원으로서 채용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인턴쉽은 졸업 후 취직의 첫 단계이자 아주 중요한 관문이었다. 그렇게 2009년 9월, 입학과 거의 동시에 인턴쉽 구직 활동이 시작됐다. 그리고 나의 낙방의 향연도 시작됐다.
일단 가을부터 겨울까지는 지원할 수 있는 회사 자체가 드물었다. 대부분이 컨설팅과 재무/회계 쪽 회사들 뿐이었고 IT는 전무했다. 재무/회계는 나의 정신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컨설팅 회사에(라도) 지원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다들 인터뷰 준비다, 케이스다, 이력서다 바빴는데 나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는 사실이 불안했다. 그래서 이력서나 인터뷰를 연습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역시 똑똑한 컨설팅 업체. 그런 '불손한' 의도쯤이야 진작에 알아챘다는 듯, 단 한 번도 나의 지원서에 응답을 주지 않았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글로벌 컨설팅업체부터 조그만 부티크 업체까지 모두,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총 30여 업체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면접으로의 초대조차 없었다. 단 한 번도.
11월이 지나면서 학교 캠퍼스에는 면접이나 회사 방문 때문에 정장을 빼입고 다니는 동기들이 종종 보이기 시작했는데, 나에게는 그런 건수가 전혀 없었다. 그저 아무도 없을 때 방구석에서 홀로 정장을 꺼내 입어보고 했을 뿐이다.
떨어진 자신감 때문에 잔뜩 웅크린 어깨를 차가운 바람 탓으로 돌릴 수 있는 계절이 됐을 때쯤, 드디어 컨설팅이나 재무/회계가 아닌 '일반' 회사들이 학교로 찾아와 면접을 보기 시작했다. 우린 그런 회사들을 '인더스트리 회사'라고 불렀다. 비연예인을 '일반인'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어감이다. 뭔가 나도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업체들이 학교의 시스템에 등록을 하면, 지원자가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보낸다. 지원서 검토 후 인사 담당자가 면접하고 싶은 지원자를 고르면 면접 일정이 잡히는 식이었다. 조금이라도 나의 경력과 비슷한 부분이 있는 업체가 있으면 모두 지원했는데, 드디어 한 업체로부터 연락이 왔다. 미국에서 가장 큰 식품가공 업체 중에 하나였다. 나로서는 근 3개월 만에 처음으로 받아보는 면접으로의 초대장(invitation)이었다.
면접을 이틀 앞두고는 모든 수업을 거른 채 동네 마트로 향했다. 첫 초대장인데 그깟 수업이 중요하랴. 그 회사 제품이 놓인 진열대의 상태를 연구하고, 제품을 구입하는 사람들을 쫓아가 인터뷰도 했다. 마트 직원도 붙잡고 이것저것 물어봤다. 그 회사의 가능성과 문제점에 대해 깊이 파고들었고, 면접관의 마음을 확실하게 얻을 이 세상에서 가장 획기적이고 신선한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데에 골몰했다. 아직 면접도 안 봤지만 마음은 이미 이 회사의 정직원이었다.
드디어 면접 당일. 나의 면접은 가장 마지막 날 마지막 순서였다. 어허, 이것은 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신의 계시다,라고 생각했다. 긴장해서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을 간신히 부여잡고 면접실로 들어갔다. 약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백인 아주머니가 앉아 있었다.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기가 무섭게 질문을 던진다.
"Okay, walk me through your resume."
간단한 자기소개는 면접을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연습하는 부분이다. 연습해온 대로 자신 있게 준비한 내용을 읊었다.
"Okay, thank you. Good luck."
그리고서는 이 아주머니, 천천히 폴더 등을 접더니 그대로 일어서 나가 버린다.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미처 깨달을 새도 없이, 문 밖으로 미끄러지듯 사라지는 면접관의 뒤통수에 대고 나는 버버 버버... 이러고 앉아 있었다. 이틀간 수업 대신 '현장'에 나가 직접 준비한 나의 철저한 시장 조사가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열심히 골몰해 생각해 낸 이 업체의 필승전략의 피읖은 고사하고, 45분으로 예정된 면접이 겨우 5분 남짓 만에 끝나버렸다.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 나와보니, 밖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서머타임이 끝난 뉴햄프셔 시골은 오후 5시에도 이미 어두웠다. 갑자기 술 한 잔이 너무 생각 나, 친한 동생에게 연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