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에서 미끄러지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첫 직장은 보험왕 출신의 공격적인 사장님이 이끄는 벤처기업이었다. IT기업이지만, 돈이 된다면 행사장에서 요요도 팔고 솜사탕도 팔기도 하는 헝그리 정신 가득한 회사였다. 이 곳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첫 사업을 시작했다. 엘르 코리아와 단독 계약을 맺는 등 시작은 그럴싸했지만, 결국 1년 만에 보기 좋게 말아먹었다.
그리고 2007년 봄 어느 날이 되었다.
첫 번째 사업 실패를 딛고 야심 차게 시작한 두 번째 사업도 영 생각처럼 되지 않아 고민이 많을 때였다. 일단 현금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아무리 힘들어도 매달 25일 직원 월급일은 단 1초도 늦지 않겠다고 스스로와 약속을 하고 시작했기 때문에, 매 달 단두대에 목을 내놓은 심정이었다. 당시에는 약 2주 간의 현금 흐름은 10원 단위로 기억할 정도였고, 월말에 어렵게 월급 지급을 완료하고 나면 월급을 '지급해냈다'는 안도감은커녕, '아 이제 30일밖에 안 남았네'란 생각에 한숨만 가득했다.
우리는 따로 사무실이 없었고, 조그만 의류 수출업체 사무실에 책상 네 개를 빌려 기생하고 있었다. (아무도 안 들어오는) 그 업체 홈페이지를 관리해주고 한 달에 1인 당 자릿세 10만 원에 퉁쳤으니 당시 기준으로도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수출업체는 1980년대 수출 붐을 타고 성장한 정직원 대여섯 명 수준의 작은 중소기업이었다. 아직도 팩스로 소통을 하고 원가계산서를 손으로 일일이 써서 결재를 받는 고지식함이 있었다. 의류 수출 붐은 IMF를 마지막으로 완전히 사그라들었고, 이제는 명맥만 겨우 유지하는 노인네 같은 업체였다. 뭔가 그런 생동감 전혀 없는 무거운 공기가 가득 찬 회사였다.
발칙한 아이디어
나는 그날 역시 아무리 짜내고 짜내어도 10원 하나 안 나오는 마른 잔고와 씨름하고 있었다. 그대로 가면 석 달도 버티기 힘든 상태였다. 담배 한 까치에 고민 한 줌 태워 보내고 사무실로 돌아와 텅 비어 있는 수출업체의 샘플실에 들어가 앉아 봤다. 삐걱대는 낡은 의자를 흔들거리며 주변을 멍하니 둘러보니 80년대부터 모아 온 의류 샘플들이 걸려 있었다. 한 때는 수출 붐에 앞장섰을 자랑스러운 샘플들이지만, 이제는 시간이 지나 색이 바랜 상장처럼 힘없이 걸려 있었다. 헤비 우븐(Heavy Woven) 봉제 업체였기 때문에 스키복, 오리털 잠바들이 대부분이었다.
아, 이걸 다 팔아버려야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패션이란 돌고 도는 것. 이제는 80년대 패션이 돌아올 때도 됐을 것이다, 고 마음대로 결론지어버렸다. 무엇이든 결론짓지 않으면 그 텅 빈 샘플실에서 못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가판대를 만들어 강남역에서 팔아 치울까 생각했지만, 원하는 스케일이 나오지 않았다. 쓸만한 샘플을 다 모아봤자 고작 7-80벌 정도. 만 원에 완판해도 80만 원이다. 당시 월 최저 임금도 안 됐다. 그래서 그 샘플들을 들고 의류 브랜드 또는 유통업체와 생산 계약을 맺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브랜드뿐 아니라 유통업체들도 자기만의 PB(Private Brand)를 만드는 추세였기 때문에, 가능하단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이 수출업체 역시 내수 시장 진출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시기이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아주 멋지게 맞아떨어졌다.
"제가 내수를 뚫겠습니다. 첫 오더 영업 마진의 30%를 저희에게 수수료로 떼어주시는 조건입니다."
우선 사장님과 딜을 했다. 당시 수출 업체의 영업 마진은 약 13% 수준. 수출 업체 입장에서는 영업 마진에서 추가로 30% 정도까지 떼면 판매관리비 제외하고 남는 게 없겠지만, 내수 시장을 했다는 레퍼런스가 큰 자산이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렇게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서 우리 팀의 스타일리스트와 같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국의 브랜드 및 유통업체 연락처를 모아, 틈만 나면 이메일 및 콜드 콜(Cold Call: 학연 지연 없이 마구잡이로 전화를 돌려 영업하는 행위. 정신적으로 매우 피곤하다.)을 돌리기 시작했다. 막상 리스트를 뽑아 놓고 보니, 우리나라에 그렇게 많은 브랜드와 유통업체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희망이 샘솟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몇몇 업체로부터 '한 번 보자'는 연락이 오기 시작했고 스타일리스트와 함께 샘플을 싸들고 품평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품평회란, 샘플들을 보여주고 바이어가 그중 몇 스타일을 골라 계약을 맺거나 그냥 패스하거나 하는, 일종의 의류 OEM/ODM 버전의 피칭이라고 보면 된다. 당시 수출 업체가 보유했던 차량인 구식 아반떼에 샘플 50벌과 행거 4 세트를 쑤셔 박으면 두 명이서 가까스로 탈 수 있을 정도로 꽉 찼다. 그렇게 스타일리스트와 함께 전국을 누비기 시작했다.
하지만 쉬운 일은 없는 법. 호기롭게 시작한 사이드 서바이벌 프로젝트는 별 성과 없이 방황했다. 본업으로도 바빠 죽겠는데, 이게 과연 잘하는 짓인가 수도 없이 고민했다. 당시에는 사정이 어려워 돈이 될 수 있는 것은 다 했는데, 나와 스타일리스트가 의류 판매로 현금을 도모하고 있었다면, 개발자들은 홈페이지 외주 제작을 하며 먹고살기 위해 일했다. 그러나 조금이나마 성과가 있는 홈페이지 외주 제작에 비해 우리는 성과가 전혀 없었다. 두 배로 초조해졌다.
그렇게 입질만 있고 계약은 없는 상태로 몇 개월이 지났다. 차에서 내리고 탈 때마다 행거를 분해했다가 조립해야 했기 때문에, 그동안 눈에 띄게 발전한 건 매출 대신 행거를 조립하는 우리의 손발뿐이었다. 가히 생활의 달인 수준이었다. 어디 행거 분해했다가 조립 빨리 하기 대회라도 있으면 우리는 무조건 1등이라며, 말도 안 되는 우리 꼴을 위로했다.
이렇게 생긴 행거를 최대 4개까지 구식 아반떼에 쑤셔 박고 다녔다. (Image Source: 리바트몰)
대기업 A
그러던 어느 날 한 대기업 유통 체인에서 연락이 왔다. 이름만 대면 알만 한 대기업 A이었다.
"소개 자료 잘 봤습니다. 혹시 트레이닝 복도 하시나요?"
아쉽게도 헤비 우븐 봉제 업체였기 때문에 트레이닝 복은 지난 약 20년 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네, 그럼요. 어떤 걸 찾으시나요?"
일단 던졌다. 아무것도 못해 보고 놓치고 싶지 않았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란 말을 진심으로 실천했다. 거짓말이 아냐, 지금부터 하겠단 말이라고,라고 자위했다.
"그럼 사흘 후에 저희 사무실에 샘플 들고 오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또 다른 품평회가 잡혔다는 작은 기쁨도 잠시,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걱정이 밀려왔다. 아니, 삼일 내로 어디서 샘플을 구한단 말인가. 이때 스타일리스트가 아이디어를 냈다.
"우리 동대문 새벽 시장으로 가요. 거기엔 뭔가 있겠죠!"
무릎을 탁 쳤다. 그렇다. 당시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어느 정도 신뢰가 쌓이고 나면 동대문 새벽 시장에서 옷을 빌려와 촬영한 후, 고객의 주문이 들어왔을 때 비로소 벌크로 구매하는 형태가 일반적이었다. 쇼핑몰 운영자들과 가까이 일했던 첫 번 째 사업을 말아먹으면서 배운 것 중에 하나였다. 말아먹었어도 건질 것은 있었구나. 하지만 문제는 우리에게는 그런 신뢰가 쌓인 업체가 없다는 것이었다.
첫 째 날 밤에 스타일리스트와 함께 출동했다가 퇴짜만 잔뜩 맞고 풀이 죽어 돌아왔다. 기존에 쌓아 놓은 관계가 없다 보니, 옷을 빌릴 수가 없었다. 영업을 위해 박카스를 박스째 사갔지만 소용없었다. 잠시나마 생겼던 희망은 일장춘몽이 되어 바스러졌다.
"오늘 밤에 다시 한번 가요. 대신 우리 쫙 빼입고 가요."
동대문 새벽 시장은 정글과 같은 곳. 모두가 잠든 시간에 업계 최고의 프로들이 모여 바쁘게 움직이는 전쟁터였다. 다만 새벽이고 모두 바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모두들 그냥 아무 거나 편안한 옷을 걸쳐 입었다는 것이 공통점이었다. 스타일리스트가 그 점을 노린 것이다. 최고의 프로가 아닌 우리들로서는 밑천 드러나기 전에 겉모습에서 뭔가 있어 보여야 말이라도 걸 수 있겠다는 그녀의 논리가 설득력이 있었다. 그렇게 내가 가지고 있던 최고의 양복에 구두를 말끔히 신고, 마찬가지로 신데렐라처럼 화려하게 변신한 스타일리스트와 함께 새벽 시장으로 나섰다.
결과는 대 성공이었다.
"저희가 여기 대기업 A와 일을 하는데, 트레이닝 복 샘플 몇 장만 빌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명함을 내밀면, 십중팔구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뒀다. 거기에 우리 스타일리스트의 전문 용어를 섞은 상품평을 추임새로 곁들이면, 명함 단 한 장만으로 업체 당 샘플 서너 벌은 쉽게 빌려 올 수 있었다. 그렇게 모아 온 샘플이 약 20벌. 우리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밤새도록 품평회 준비를 했다.
자료도 자료지만 사실 가장 어려운 부분은 원가 계산이었다. 트레이닝 복이 처음이니 원가 계산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저 스타일리스트와 마주 앉아 '나 같으면 이런 옷은 얼마면 사겠다'라고 마음대로 가격을 부른 뒤, 그것을 거꾸로 계산해 납품가를 정했다. 이러다가 손해 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지만 그런 걸 걱정하기엔 너무 절박했다.
드디어 다음 날, 생활의 달인 수준으로 행거를 조립해 품평회에 들어갔다. 이따금 음음,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외에는 별 다른 반응이 없었다.
"네, 잘 알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부적으로 논의해 볼게요."
이미 몇 백 번의 거절을 당한 거절의 달인으로서, 담당자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눈치챌 수 있었다. 아, 겨우 이건가. 이러려고 새벽에 동대문 시장을 그렇게 뛰어다니고 밤을 새웠단 말인가. 거절의 달인에게도 이번 것은 아팠다. 우리가 익숙하지 않은 제품을 거절당한 게 더욱 아팠다는 것은 아이러니였다. 아마도 제품을 모르는 만큼 더 노력했기 때문이리라. 아무리 간절해도 다시는 모르는 제품에 손을 대지 않으리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며칠 후, 그 대기업 A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저번 트레이닝 복은 잘 봤습니다. 그런데 혹시 등산복도 하시나요?"
아쉽게도 헤비 우븐 봉제 업체였기 때문에 등산복은 지난 약 20년 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네, 그럼요. 등산복은 복잡해서 저희가 아무나랑 하지는 않지만, 특별히 보여드릴게요. 어떤 걸 찾으시나요?"
다시는 모르는 제품에 손을 대지 않으리라는 다짐 따위는 진작에 잊어버렸다. 지금부터 알면 되지, 하고 자위했다. 그렇게 똑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동대문에 양복 쫙 빼입고 나가 등산복을 한 보따리 빌려 왔다. 밤을 새워 원가 계산을 대충 했고, 손해 보면 어쩌나 잠시 걱정했지만 곧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 등산복으로 대기업 A와 계약을 맺어 버렸다.
무려 첫 FW 시즌에 3억 원에 가까운 계약이었다. 수출업체가 난리가 났다. 우선 중국 공장 네트워크를 풀가동해서 우리 대신 등산복을 생산해 줄 공장을 찾았다. 그러던 과정에 알게 된 사실인데, 영업마진이 45%에 이르렀다. 수출 마진율의 3배를 훌쩍 넘었다. 잘 몰라 대충 한 원가 계산이 오히려 금 보따리가 되어 왔다.
노인네 같던 수출업체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사업 지속에 대한 희망에 부풀었다.
사장님은 아예 우리가 내수팀을 만들어 키워줬으면 하셨지만, 우리는 단칼에 단호히 호기롭게 거절했다.
...to be continued.